요한복음 9:1~3 / 운명이란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오늘 말씀에는 자신의 불행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번째 표적 중에서 여섯 번째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1절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8절에 보면 그는 거지였습니다. 그 처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서 땟국물이 흐르는 옷을 입고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옆에 두고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라는 노래를 하모니카로 부르며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파리 떼가 그에게 달라붙었습니다.
소경의 삶은 바로 이런 삶입니다. 소경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2절 제자들은 이 소경을 보자 심각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소경의 불행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죄인가? 아니면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소경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불행하게 산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 불행이 죄 때문에 생긴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조상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니 그도 고통을 당하였고 그 후손에게도 가난과 질병과 두려움과 원망과 죽음이 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다가 자신도 큰 풍랑을 만나고 그 배에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을 때 그는 집안의 분란과 국가의 내란에 시달렸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고통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과연 죄 때문에 생긴 것입니까? 이 사람이 자신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면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니까 엄마 뱃속에서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불교에서는 전생에 죄를 지으면 이생에서 불행하다고 합니다.
본인이 아니라면 그 부모가 죄를 범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어머니가 성병이 있는 상태에서 아기를 낳아 눈에 바이러스가 감염되어 소경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면 부모가 약물을 과다 복용하든지 돌연변이에 의해서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소경은 부모나 사회에서 원인을 찾으면 원망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고난받는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며 불행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고난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욥은 아무 죄를 짓지 않았지만 큰고난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죽었습니다. 열두 제자도 죄를 짓지 않았는데 순교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이나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의 죄냐 누구의 책임이냐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심각한 질문 앞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그 불행의 원인을 과거나 사람에게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불행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래의 선을 이루기 위한 좋은 뜻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때 그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행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생깁니다.
요셉은 분명히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보내셨다고 요셉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편에서 보았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이나 보디발의 처를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노예로서도 열심히 일하여 가정 총무가 되었고 죄수로도 열심히 일하여 죄수들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이 요셉에게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인간의 불행을 통해서 선한 일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하신 일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불행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도 자신의 불행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불행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동기가 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행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 불행이 올지라도 그 불행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고난이나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는 아름다운 그림을 이룹니다.
모자이크가 하나하나 보면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름다움 그림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고난을 통해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계십니다.
베에토벤은 아홉 번째 아들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매독에 걸렸고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입니다.
그의 형들은 귀머거리, 장님, 정신지체아들이었습니다. 베토벤도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조건 가운데 태어난 베에토벤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행을 선으로 바꾸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