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린고비와 굴비>
1)자린고비는 조선시대에 살았던 실제 인물로써 지금의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증삼마을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조륵이다.
자린고비하면 생각나게 하는 것이 바로 굴비이다. 제사에 쓰고 난 조기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반찬 삼아 밥을 먹으면서 식구들이 어쩌다 두번 이상
쳐다보면 “얘, 너무 짜다 물켤라”고 호통쳤다는 이야기.
며느리는 생선 장수가 왔는데 생선은 사지 않고 생선만 만지작거리다가 들어와
손을 씻은 물로 국을 끓였는데, 자린고비가 하는 말이 물독에다 손을 씻었으면
몆끼를 더 먹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 장독에 앉았다 날아간 쉬파리를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며 단양 장벽루까지
쫒아갔다는 일화.뿐만 아니라 무더운 여름철에 부채를 사다 놓고 그 부채가 닳을
까봐 벽에 부채를 매달아놓고 머리를흔들었다는 수없는 기행. 일화 중에 하나인
전라도에서 소문난 구두쇠가 조륵의 소문의 듣고 겨루려고 찾아와 하룻밤을 묵는데
저녁 때 밥풀 몇 알을 남겼다가 자기가 가져온 창호지 조각을 바람 들어오는 창
구멍에 붙이고 잤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손님은 “조 선생, 문에 발랐던 종이는 내것이니 가져 가렵니다”라며
창호지를 뜯어 집을나선 뒤 5리쯤 되어서였는데, 조륵이 헐레벌떡 뛰어와 “종이에
붙은 밥풀은 우리 것이니 놓고 가야 합니다”며 칼로 밥풀 붙였던 자리를 긁어내
담아 가지고 돌아가니 전라도 구두쇠는 “과연….” 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 하는 등 수많은 이야기가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한 덕택에 자린고비 나이 이순(60세)에 만석꾼이 되었단다.
그는 지독하게 인색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으나, 환갑이 되는
날부터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다.자린고비는 그 동안 억척스럽고 피나게 모은 재산을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전혀진다.
조륵이 가뭄으로 3년 동안 기근에 시달리던 영호남 1만여 가구에 구휼미를 베풀었는데,
이에 감화를 받은경상, 전라 현감들이 ‘자인고비(사랑할 慈, 어질 仁, 아비 考, 비석 碑)‘
라는 송덕비를 잇따라 세웠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그의 자비정신을 높이 평가해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죽은 후
검소하게 장례를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식에게는 아무런 재산을 남겨주지 않았다고 한다.
자린고비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전해 오고 있다. 충주에 이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는 종이를 아끼기 위해 부모님 제사를 지낼 때 붙였던 지방(紙榜)을
태워버리지 않고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다시 꺼내 쓰니 기름때가 묻어 절여졌다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 고(考)자와 돌아가신 어머니 비(妣)자가쓰여진 지방이 기름에 쩔었다 하여
‘절인고비’에서 ‘자린고비’로 변했는 설도 있다.
어원은 어찌되었든 요즘 같이 재벌들의 상속편법이 만연하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탐하는 시대에 이제라도 근검절약하고 남을 도우는데 아끼지 않는 자린고비 정신을 본보기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2)굴비라는 이름은 고려 때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은
셋째와 넷째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세도정치를 하던 중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가 척준경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정주(지금의 영광)
로 쫓겨나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조기가 너무 많이 잡혀 내다 팔기도 하고, 소금에 간하여 말려서
보관해 두었다가 먹기도 했다. 말린 조기가 감탄할 만큼 맛이 좋아 이자겸은
임금님께 면죄부를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임금이 생각나서 조기를 진상하였다.
이자겸은 마른 조기에 '정주굴비'(靜州屈非)라는 네 글자를 써 붙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굴비라는 말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이자겸이 마른 조기에 굴비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비(非)에 굴(屈)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것이었다.
이자겸의 뜻은 임금에게 전해졌고, 결국 굴비라는 말 한마디로 인해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고 한다. 현광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