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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에서 - 3 - 노나라 공자의 희양제, 장례법식, 발해에 왔던 신라인 사신 장도광, 生死路(道)를 배운 이규보의 詩
‘우상숭배자들은 자기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갖고 있다. 그 도시는 동북쪽과 동쪽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들은 교역에 의해서가 아니라 땅에서 거두는 곡식의 혜택으로 살아간다. 수도원과 사원들이 많은데, 그곳에는 그들이 바친 엄청난 제물과 대단히 경건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갖가지 우상들로 가득하다.'
위 본문에 나오는 '엄청난 제물'의 예로 바로 연결해서 나오는 본문을 인용해 보자. '아이들이 있는 사람은 우상(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양을 한 마리 기르는데, 1년의 시작이나 우상들의 제삿날이 되면, 그렇게 기른 양을 아이들과 함께 데리고 가서 우상에게 공손하게 경배한다.
이것을 마친 뒤에는 양을 전부 요리해서 우상 앞에 매우 경건하게 갖다 놓고는, 그들의 아이들을 살게 해달라는 축문과 기도를 올린다. 그들은 우상들이 그 고기를 먹는다고 말한다. 이것이 끝나면 그들은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자기 집이나 희망하는 다른 곳으로 가져간 뒤 친척들을 불러 모아 큰 잔치를 열고 아주 경건한 태도로 먹는다. 고기를 다 먹은 뒤에는 그 뼈를 모아 상자 안에 안전하게 보관한다.'
- 노나라의 孔子도 희양제를 얘기하고 있다. 노(魯) 나라에서 매월 초하루[朔]에 희양(餼羊)으로 고묘(古廟)하는 예가 있었다.《논어(論語)》 팔일(八佾)에 “자공이 고삭례(告朔禮)에 쓰는 희양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께서 ‘사(賜 자공의 이름)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 바로 그 지역(노나라)이 그 지역(탕구트)인 것이다.
또 앞에서 나왔던 “'노양의 창 휘두르고자'하는 말은 '전국시대에 노양공(魯襄公)이 韓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해가 지게 되었다. 그러자 양공이 해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창을 휘두르니 해가 뒤로 90 리를 물러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바로 여기 돈황 즉 낙양 동경 지역이 노나라 지역이었던 것이다.”는 구절을 이 문맥에서 재인용한다.
원래 노나라는 주무왕이 자기 동생인 주공에게 봉한 나라이다. 그런데 사기세가의 노주공세가를 보면 노나라가 제나라(하미 지역)에 딸린 나라인 것 같이 제나라와의 관계만 주로 나온다. 신강 중원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져서(고비사막으로 인해) 독립해 있고 하미 지역과 연결되어 있는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P172 '여러분은 세상의 어떤 우상숭배자들도 일단 사망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시신을 태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우상숭배자들이 집에서 화장터로 옮겨질 때, 죽은 사람의 친척들은 미리 길 중간 어느 곳에 작대기로 집을 만들어 금이나 은으로 짠 천으로 덮어둔다. 이렇게 장식된 그 집 앞으로 시신이 옮겨져 오면, 사람들은 그곳에서 멈추고는 술과 음식을 시신 앞에 놓는다....
화장할 장소로 시신이 옮겨지게 되면 친척들은 종이를 잘라 사람, 말, 낙타, 베잔트 금화만한 크기의 돈을 만들어서는 이 모든 것들을 시체와 함께 태우는데, 그들은 죽은 사람이 저승에서 종이를 잘라 만들어 태운 것만큼 많은 수의 노예와 짐승과 양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체를 태우러 가는 동안 그 시체 앞에서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행진한다....
또한 죽은 사람의 친척, 즉 그 집의 주인들은 시체가 머무는 동안 그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위해 상을 준비해서 매일같이 그 위에 먹을 음식과 마실 것을 놓는다. 그들은 그것을 시체가 안치된 관 앞에 갖다놓고 먹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거기에 두고는 그의 영혼이 그 음식을 먹었다고 말한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화장하는 날까지 시체를 보관하는 것이다.'
- 죽음의 제의는 죽은 자의 것이다. 즉 조상의 것이다. 살아 있는 내가 치르는 것이지만, 그 양식은 조상들의 것이다. 나의 여건과 편의 때문에 변화가 끼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 양식은 조상이 남겨준 전통의 부분이다. 카쉬가르강 야르강하 호탄강 시르다리아 아무다리아 인더스강 갠지즈강 소륵하 황하 양쯔강 메콩강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그 어디를 가든, 이 기본양식은 다 같다.
반도에도 지금은 다들 화장으로 돌아 왔지만, 이전에 산소에 매장할 때, 돌아가신 분의 유품과 옷가지들을 그 옆자리 어딘가에서 태운다. 모질고 독한 조작이 장례법에까지 미쳐서 화장법을 시행하지는 못해도 유품과 옷가지들을 태우는 것으로 그 전통을 지켰던 것이다. 말과 낙타와 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반도로 온 사람들은 지전을 만들어 태우는 풍속은 사라졌다.
아마 조작세력이 이것은 금했을까? 주44)에도 ‘지전 등의 후장풍습을 나라에서 금지한 사례가 보인다’고 나와 있다. 그 외에는 반도의 장례식 풍속과 완벽히 일치한다. 우리도 빈소에 매일 음식을 차린다. 그리고 路祭를 지낸다. 21세기에 이 지역을 지나가는 한 여행가가 목격한 장례식을 한번 인용해보자.
2003년에 출판된 ‘나는 걷는다 3권’ P327 '장예(張掖-甘州)가 가까워질수록 경치가 빠르게 달라졌다....소리가 나는 집 앞 긴 장대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등(상갓집 등)은 높이가 1미터 가량 되는 사층 짜리 탑 모양으로, 여러 개의 지붕이 있는 탑을 흉내 낸 것이었다. 진홍빛의 금단추, 여기저기 파란 점이 있는 등 색깔이 강렬했다.
벽에는 여러가지 색깔이 칠해진, 두개의 커다란 종이 원반이 있었다. 장례용 화관이었는데, 고인의 무덤에서 태우려고 하는 것 같았다. 조문객이 많이 있었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마당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마당에는 테이블에 앉은 여섯 명의 연주자들이 엄청나게 소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젊은 연주자 세 명이 트럼펫처럼 끝이 벌어진 수오나라는 악기를 연주했다.
네번째 사람은 두개의 심벌즈를, 또 다른 사람은 삼각대 위에 올린 커다란 청동제 종을 나무망치로 두드렸고, 마지막 사람은 실로폰을 연주했다. 각자 힘껏 자기 악기를 연주하면서, 다른 사람의 연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들은 죽음의 침묵을 몰아내기 위해서, 막 세상을 하직한 영혼을 늘 훔쳐가려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있었다. 화음을 맞추는 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두꺼운 양탄자를 놓은 문턱에, 하얀색 옷을 입고 머리장식을 한 남자 두 명이 무릎을 꿇고, 땅에 손을 놓고 머리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작은 제단 옆에서 초가 타고 있었고, 깃발이 하늘을 물들이며 사방에서 날리고 있었다.
소란한 연주 속에서 강렬한 색깔의 글씨가 적힌 커다란 천과 예쁜 등이 켜진 가운데 할머니가 통곡을 하며 울었다. 우리 유대-기독교 문화에서 거부하는, 죽음과 삶이 조화롭게 양립하는 모습은 늘 내게 활력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우선, 상중임을 뜻하는 이 하얀색은 훨씬 산뜻해 보인다.'
2001년에 출판되고 2003년에 번역되어 나온 ‘나는 걷는다 2권’ P136 '이슬람의 장례는 명확하고 꼼꼼하게 짜인 의식을 따른다. 먼저 시신을 씻기고 즉시 땅에 묻는다. 햇빛과 더위의 나라인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다음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서 일곱 번째 날, 사십 번째 날(49재인 듯), 일 년 되는 날에 여러 의식을 반복해서 올린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도 비슷한 모임을 가지고 죽은 이의 부재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애도의식을 치른다.'
‘나는 걷는다 2권’ P197 '여기(담간)에는 장례탑 두개가 남아 있다. 조로아스터교도가 시체를 전시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탑일까? 지금은 사라진 두 가지 관습은,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의식을 특징짓는다. 이들은 시신을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는 것을 금지했는데, 땅, 공기, 불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시신을 높은 탑에 놓았는데, 이는 곧바로 독수리의 먹이가 됐다.'
‘힌두교의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근친자들이 밖으로 뛰어 나가 큰 소리로 곡을 하며 사신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남쪽을 향해서 기도를 올린다. 유체는 흰 천으로 싸가지고 대나무 등으로 만든 관대에 싣고 노천화장장으로 운구하여 성수로 유체의 입을 적셔 주고 머리부터 발까지 성수를 뿌려 준다. 유체는 장작 위에 안치되고 생화로 장식한 후 화장하고 남은 재는 주변의 강에 뿌린다.
화장을 한 날부터 상복을 입는데, 10일째까지 매일 의식을 행하고 11일째에 상복을 벗는다. 친족 모두가 모인 가운데 한 달에 한 번씩 조령제(祖靈祭)를 거행하고 만 1년 만에 모든 절차를 끝낸다.’- 다음 까페 TOMMY PANG(세계의 장례풍속)
소륵하가 끝나는 부분에(과주에서 서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지금은 사막으로 변모되어 있지만, 지명이 서호(西湖)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당하가 서북방으로 흐르다가 동북으로 방향을 틀어서 돈황으로 들어가면서 사막으로 사라지는데, 그 방향을 트는 지점의 바로 서쪽에(돈황에서 서남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남호(南湖)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돈황과 이 남호 사이에 또 돈황서호(敦煌西湖)라는 지명이 나온다. 바로 이 돈황 지방이 관개수리시설과 치수사업이 잘 되어 있어서 사막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파괴되기 이전까지는.
1870년대 이전까지는 그 지역을 사막으로 만들어서 이익을 볼 그 어떤 세력도 없었다. 기련산맥(남산산맥)에서 북쪽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대강(大江)들이 수십 개는 되는데, 고대 정치의 핵심이 되는 치수사업을 제대로 한다면, 이 감숙성 지방이 결단코 사막화할 수가 없도록 수량이 풍부한 지역이다.
그 사정은 신강성 지방과 똑같다. 의도적으로 파괴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사막이 될 수는 없다. 낙양과 동경을 역사적으로 사막으로 묘사한 어떤 典籍이라도 본적이 있는가? 그런데 20세기 이후에 그 지명이 사주, 돈황이라고 바뀐 후부터는 이 지역이 사막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웃기지 않는가? 무섭지 않는가? 섬찟하지 않는가?
당나라의 고구려 발해관련 연표를 정리해 보자.(한국사연표/한국정신문화연구원,동방미디어)
618- 수, 멸망
630- 당, 동돌궐을 멸망시킴(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합밀[하미]멸망시킴)
640- 당, 후군집이 고창(투르판)을 멸망시킴
645- 당, 고구려의 요동성 함락시킴 (- 파미르 이서에 있는 요동.)
648- 당, 구자(쿠차)왕 체포 - (조작) 고구려 평양(국내성)이 쿠차인데, 쿠차왕을 체포하다니!
655- 당, 정명진, 소정방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
657- 당, 소정방, 돌궐의 사발라가한을 생포, 서돌궐의 땅을 나누어 2개 도호 설치(대당서역기, 돌궐 멸망시키고, 가필시 간다라에 2개 도호 설치) - 655년에 고구려를 공격하러 갔던 소정방이 657년에 서돌궐이 있는 인도의 서북부 지방을 점령하고 2개 도호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인도의 서북부 지방이 고구려의 한 지방이라야 말이 된다.
658- 당 안서도호부를 구자(쿠차)로 옮김 - (조작) 668년에 당이 쿠차를 점령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659- 당, 설필하력으로 요동을 경략케 함
660- 당, 백제 멸망시킴
661- 당, 임아상으로 고구려 공격, 서역의 여러 나라를 96주 8부로 함
666- 당, 이적에게 고구려를 치게 함
667- 당, 이적 고구려 17성 함락
668- 당, 고구려 멸망시킴
698- 발해 대조영, 천문령(알리바바 패스)에서 이해고의 당군 격파, 대조영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함
747- 당, 행영절도사 고선지 제1차 서역원정, 파미르 남방에 이름.
750- 당, 고선지 제2차 서역원정, 타시켄트에 이름.
751- 당, 고선지 제3차 서역원정, 탈라스강에서 사라센군에 패함.(조작 - 고선지는 발해 세력과 대결하는 중임)
752- 당, 안록산 거란을 침(발해를 쳤다는 말로 보인다.)
753- 발해 당나라에 사신을 보냄
755년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안사의 난)
756년 1월 안록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한다.
756년 5월 양귀비 자살하다.
756년 6월 장안(쿠차, 서경) 점령.
757년 1월 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안록산 살해당한다.
759년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안경서가 살해당한다.
761년 사사명의 맏아들 사조에게 사사명이 살해당한다.
762년 당 현종 사망(호탄[남경, 상도 성도 송도]으로 몽진했던 현종이 호탄에서 사망, 조작사는 서안의 장안에서 현 사천성의 성도로 몽진왔다가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당연히 현 성도에 현종의 릉을 만들어 놓았음)
763년 사조의 자살로 난이 평정됨.
- 안록산과 사사명은 아랄해 주변의 세력이다. (안씨는 사마르칸트 출신이고 - 엄밀히 말하면 부하라다 -, 사씨는 케시출신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안사의 난으로 유명한 두 주체들의 출신지와 근거지가 아직 발해에게 넘어 가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고선지가 탈라스에서 사라센군에게 패전했다는 것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751년에 사라센군에게 패배한 당군이 752년에 (안록산이) 거란을 친다고 하니, 거란이 사라센군이라는 말인가? 사라센군과 거란군 둘 다 발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선지의 1차 원정이 파미르 남방은 맞는 말이고, 2, 3차 원정이 타시켄트, 탈라스라는 말은 조작으로 보인다.
아무다리아 북부지방이 안사(안록산과 사사명)의 근거지라면, 타시켄트와 탈라스로 원정을 간다는 것이 이상하다. 아마도 1차 원정과 같이 파미르 남방으로 원정을 계속 갔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것이 아닐까? 3차 원정에서 고선지가 실패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와 케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안록산을 시켜서 그 지방에서 원정을 하게 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 돈황에 자리 잡고 있는 당이 현 요동과 반도의 고구려 침공을 한다면, 100만 대군을 이동하는 데만 10년은 걸릴 것인데, 어불성설! 북서인도를 통합해서 간다라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수나라가 현 요동과 반도로 100만 대군을 이동시킨다면, 20년은 걸릴 것인데 황당해도 유분수지. 파미르 이서지역이 요동이고, 고구려의 평양과 국내성은 쿠차에 있었다.
파미르 동서의 남부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수나라를 물려받은 돈황 중심의 당나라가 파미르의 동서의 북부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것이다. 고선지의 3차에 걸친 서역원정은 사라센과 싸운 것이 아니라, 발해와 싸운 것이었다.
'753년에 오공이 당나라 사신 장도광을 수행하기 위해 건타라국에 갔을 때는 이 나라가 계빈국(가필시) 동부의 한 도성이 되어, 왕이 여름이면 이곳에 머물고 겨울에는 계빈에서 보내곤 했다.'(- 한헌석칼럼 30호 카슈미르에서)는 사실과 753년에 발해가 당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선지의 탈라스 패전과 다음해의 안록산의 거란 공격의 전후처리의 사신단이 상호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신강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중앙아시아 아프간 서북 인도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중원제국인 구려(漢나라 혹은 晋나라)를 신강의 국내 以東에 있는 당이 서쪽으로 침입해서 장악하는 과정이 반도사의 3국통일이고, 대륙사의 당의 천하통일인 것이다. 당의 고구려 공격의 실제 침공의 지명들에 관해서는 최두환교수님이 몇차례 고증한 바 있다. 앞으로 더욱 상세한 지리 비정이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이태수칼럼 64호에서 필자가 정리했던 것을 재인용한다.
‘640년 ; 고창국(트루판, 카라코쟈) 정복
644년 ; 언기국(카라샤르, 얜치) 정복
668년 ; 쿠차(서경, 평양, 장안) 정복
의 연보를 보면, 당나라 즉 신라는 동에서 서쪽으로 구려(한나라)를 정복합니다. 즉 신라는 쿠차와 카라샤르와 트루판의 동쪽에 있는 것입니다.’
원 상도(송도 성도 신도 - 호탄, 화전, 화도, 강화도)가 아닌 후기의 상도(송도, 개경, 개성, 개도 - 카라샤르, 얜치)의 시인 이규보의 시를 한편 감상하고 넘어 가자. 이규보도 몽고 전란으로 호탄 남경으로 몽진한 고종을 따라 송도(개경, 카라샤르)에서 원 송도(상도, 성도, 신도 - 호탄, 화전, 화도, 강화도)로 가서 여생을 마친다. 당연히 반도 조선인으로 조작당한 이규보는 반도의 강화도에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먼저 제망매가를 다시 한 번 감상하자.
“제망매가(祭亡妹歌) '생사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나니잇고.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게 저게 떨어질 잎처럼, /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운수, 그러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사람의 마음. 미욱하고도 미련한 마음이여! '내 간다.'는 말도 한마디 못하고 끌려가듯 떠나는 중음신의 마음이여! 사랑하는 사람아! 누이야! 이 지상에 한 몸으로 나서 살다가 너는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이렇게 졌지만, 내 또한 어느 바람에 질지 모르니, 도 닦아 미타찰에서 만날지니, 서러워 말라. 서러워 말라. 부디 서러워 말라!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내 죽음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서러운 인연법에 묶여 있는 미욱하고도 미련한 마음이 그렇게 애가 닳도록 머뭇거리고, 하마나 하마나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 애가 타도록 안타까와서 차마 간다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떠나게 되는구나. 도 닦아 이 생사에 얽매여 있는 마음을 다스려 이겨 내어 '내 간다.'하고 툴툴 털고 가야지.
어차피 한 가지에 나서 한 땅 속으로, 한 미타찰로 돌아가는 것이니. 구천을 떠돌며 억울해서 떠나지 못하는 중음신과 살아 있는 생신 모두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정리해서 툴툴 털고 갈 수 있게 하는 참으로 큰 위안과 은혜의 법문이로다. 미타찰에서 다시 만날지니, 도 닦아 기다릴 뿐이로다. 죽음과 중음신과 귀신조차 품속에 품어 내는 불국토여, 불국토의 지상신선도여! 선도, 처섄도로다. 處仙道(朝仙道, 朝鮮道)로다.”
이 월명사의 제망매가로부터 약 450년 후에 이규보의 아래의 시가 나오는데, 그 변주의 차이성과 동일성을 한번 감상해 보자. 번역은 ‘백운 이규보 시선’/평민사,허경진 엮음에서 옮겼다.(憶二兒도 같은 번역이다.)
悼小女 죽은 딸아이를 슬퍼하며
小女面如雪。 딸아이의 얼굴 눈송이와 같았고
聦慧難具說。 총명과 지혜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
二齡已能言。 두 살에 벌써 말할 줄 알아
圓於鸚鵡舌。 앵무새의 혀보다 부드러웠고
三歲似恥人。 세 살이 되자 수줍음을 알아
遊不越門闑。 문밖에는 나가 놀지도 않았지.
今年方四齡。 올해에 막 네 살이 되어서
頗能學組綴。 바느질도 제법 배워 가더니
胡爲遭奪歸。 어쩌다 목숨 빼앗겨 저 세상으로 갔는지
倏若駭電滅。 너무도 갑작스러워 꿈만 같아라.
春雛墮未成。 자라지도 못한 새새낄 땅에 떨어뜨렸으니
始覺鳩巢拙。 이 아비의 둥지가 너무 못났음을 알겠어라.
學道我稍寬。 나야 도를 배웠으니 그런 대로 참는다지만
婦哭何時輟。 아내의 저 울음이야 언제 그치려나.
吾觀野田中。 내 저 밭을 보니
有穀苗初茁。 곡식이 싹을 처음 돋을 무렵
風雹或不時。 바람이나 우박이 때 아니게 덮치면
撲地皆摧沒。 여지없이 모두들 결딴났었지.
造物旣生之。 언제는 조물주가 세상에 내 놨다가
造物又暴奪。 이제는 또 갑자기 조물주가 뺏어가니,
枯榮本何常。 꽃 피었다가 지는 것이 어찌 그리 덧없는지
變化還似譎。 세상 돌아가는 게 속임수만 같아라.
去來皆幻爾。 왔다 가는 게 모두 다 허깨비이니
已矣從此訣。 이제는 그만일세 영원히 떠나가거라.
그 딸아이가 살아 있을 때의 살갑고 정다운 모습이 담겨 있는 시가 있어 같이 실어 본다.
憶二兒 其一 두 아이를 생각하며 1
我有一弱女。 나에게 어린 딸 하나 있는데
已識呼爺孃。 아빠 엄마를 벌써 부를 줄 안다네.
牽衣戱我膝。 옷자락 끌며 내 무릎에서 장난질치고
得鏡學母粧。 거울을 보면 엄마 화장 흉내 내네.
別來今幾月。 헤어진 지 이제 몇 달 되었나
忽若在我傍。 갑자기 내 곁에 와 있는 것 같아라.
我本放浪士。 나는 본래 떠돌아다니는 선비라
落魄寓他鄕。 혼자서 타향에 얹혀 있단다.
沈醉數十日。 몇 십 일이고 술에 몹시 취하기도 하고
病臥三旬强。 한 달이 넘도록 병으로 눕기도 했지.
廻首望京闕。 고개를 돌려 대궐을 바라보니
山川欝蒼茫。 우거진 산천 저 너머 아득하구나.
今朝忽憶汝。 오늘 아침 갑자기 너를 생각하며
流淚濕我裳。 흐르는 눈물로 옷깃을 적신단다.
僕夫速秣馬。 마부야 빨리 말을 먹여라
歸意日轉忙。 돌아가고픈 마음 나날이 바빠지누나.
- 참으로 삶도 간절하고 죽음도 사무치는구나. 삶에 대한 자세도 치열하고, 죽음에 대한 자세도 의연하구나. 처섄도의 위엄과 기품이 절로 배어난다. 절로 존경과 사모의 정이 일어난다. ‘죽음과 삶이 조화롭게 양립하는 모습은 늘 내게 활력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우선, 상중임을 뜻하는 이 하얀색은 훨씬 산뜻해 보인다.'고 한 베르나르 올리비에(’나는 걷는다‘의 저자)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그에 비해 현대문명의 죽음의 의식(儀式)에 등장하는 삶과 죽음은 참 품위도 없다. 삶과 죽음 양자가 다 존립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삶이 삶답고 죽음이 죽음답게 만드는 처섄(조선)도의 삶의 향기여! 죽음의 멋이여! 진정으로 그리웁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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