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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32
“정신이 드니.”
작고 아담한 방이었다. 정갈하게 펼쳐진 이불 위에 제가 누워 있었고 그 곁을 언주가 지키고 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제게 괜찮냐는 물음을 던진다.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입을 열기조차 어렵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억지로 입을 열었을 때는 말이 아닌 어설픈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있어. 넌 아무것도 하면 안된다고 하셨어.”
언주가 물수건을 팔에 대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자 흉측하게 찢겨진 상처의 기다란 흔적들이 제 팔을 뒤덮어 상처 주변은 마치 죽은 듯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언주가 은의 고개를 돌려놓으며 말했다.
“뭐 좋은거라구. 보지 마.”
...
“폐하께서 커다란 은혜를 베푸셨어.”
재상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 그는 은의 치료를 목적으로 황제궁 깊숙한 곳에 작은 방을 마련해 주었다. 명분은 감시와 감금으로 하는 대신, 언주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때문에 둘은 여전히 죄인의 신분이었고, 마음대로 바깥을 다닐 수도 없었다.
“아마 또 한 번의 추문이 불가피하겠지. 폐하께서는 어떻게든 널 제외하고 진행시킬 수 있도록 해보겠다 하셨지만..”
“........”
“하긴, 추문장으로 출석하라해도 이런 몸으론 나갈 수도 없겠다.”
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언주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에도 몸은 극심한 고통으로 저려왔다. 차라리 잠에서 깨어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들 정도의 아픔이었다. 매섭게 저를 노려보던 황후의 눈, 처음으로 보았던 그녀의 분노. 은은 불현듯 눈을 떴다.
“황후..마마는..”
“황후궁으로 돌아가셨어.”
“........”
“폐하께서 아마도 추문장에서 너와 황후마마의 대화를 모두 들으신 모양이야.”
-라고 언주는 덧붙였다. ‘질투’. 그 시기의 마음을 가장 추악한 형태로 드러낸 황후의 실체를 알아버린 은이 문득 몸서리를 친다. 황제가 깨어났으니 황후에게도 죄가 씌워지지 않을까. 은이 생각할 수 있는 황후의 가장 큰 죄목은 연제를 아버지로 두고 평부사를 오라비로 둔 죄, 그 하나뿐이다.
은은 다시 눈을 감는다. 이 일로 많은 이들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거나 억울한 누명을 써야만 했다. 제가 그렇고, 언주가 그렇고, 아직 감옥에 감금된 고 환관이 그랬다. 마음과 몸에 깊은 상처를 얻었지만 아직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앞으로 황후 역시 발이 묶이게 된다면 연제와 평부사에게도 혐의가 씌워지고 소용에게도 화살이 돌아갈 것이다. 한꺼번에 퍼져버린 불행의 씨앗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일까. 은은 생각했다.
제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오라버니.
...
“곧 다시 추문이 시작될 것이다. 궁인 ‘언주’와 ‘은’은 어서 나와 따르렷다.”
추문이 중단되고, 정신을 잃었던 은이 깨어날 동안에 겨우 반나절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 사이 진행된 임시 회의로 다시 은의 처분을 서둘러야 한다는 결단을, 황제는 막지 못한 것일까. 두 사람이 머무는 방 앞에 우뚝 선 상궁의 그림자와 단호한 목소리는 은과 언주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황제의 그림자 뒤에 숨은 채로는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은 채 계속될 문제였다. 은은 천근 납덩이가 된 것 같은 몸을 일으켰다.
“..힘내.”
그걸 아는 언주도 억지로 은을 막아서지 못했다. 언주의 부축을 받은 채,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상궁을 따라 다시 추문장으로 돌아간다. 상처투성이 몸, 상처투성이 마음을 안고 발을 옮기는 은의 가슴속에 남은 두 글자는 ‘포기’ 뿐이었다.
...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이 모두의 얼굴에 드리워, 그들이 가진 마음 속 또 다른 인격을 대변하듯 이리저리 일그러진 음영을 만들어낸다. 최후의 심판이라 해도 좋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모든 이가 모였지만 정작 아무도 서로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밤은 깊어간다.
“신 등은 은혜를 모르는 저 파렴치한 계집들을 마땅히 화형(火刑)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폐하.”
성급한 재상들 가운데 누군가의 입에서 냉정한 말이 떨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은과 언주에게로 닿았다. 그 곁에는 침착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고 환관이 있었고, 연제와 평부사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옆자리, 다소 침통해 보이는 얼굴의 황후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관망하는 사이, 황제가 말했다.
“추문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섣부른 발언은 금하라.”
이 자리, 죄인이 아닌 모두에게 발언권이 있었다. 하찮은 공녀를 추문하는 일에 형식 따위는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은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아무것도 거칠 것 없었다. 분노에 치를 떨며 질긴 채찍 끝으로 저를 농락하던 황후가 고상을 떨며 앉아있는 모습을 노려본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고, 승자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누군가의 입이 떨어졌다.
“네년의 죄, 물을 것도 없이 극형에 처해 마땅하다만 사실을 토설할 기회를 주겠다. 네가 저지른 일이 혼자만의 계획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너를 원조한 자가 태감이라는 것을 인정하느냐.”
“........”
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뒤이어 추궁했다.
“태감은 답하시오. 공녀 ‘은’을 원조한 것을 인정하시오?”
“그렇소.”
“그것을 빌미로 반역을 꾀해 독초가 든 찻잎을 성에 들인 것 또한 인정하시는 게요.”
“아니오.”
“원조를 했으나 반역을 꾀한 일은 없다, 허면 모두가 저 맹랑한 계집 하나의 꾸밈이었다 우길 생각이오?”
“아니오.”
“지금 이 자리의 모두를 우롱하겠다는 게요!”
고 환관은 내내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포자기 보다는, 자신 있게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여 모두의 수군거림 속에 빈축을 샀다. 원 황실에 그의 인생 대부분을 바쳤고 앞으로도 그리 할 그에게 꼬리표처럼 달라붙어 절대 떨어지지 않았던 ‘고려인’이라는 이름이 그를 하루아침에 배신자, 반역자로 낙인찍었다. 그에게 있어서도 이 일은 지겹도록 따라붙은 오명을 씻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흥분들 하지 마시오. 그가 순순히 대답을 하고 있으니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묻기만 하면 되지 않겠소.”
좌중을 진정시킨 것은 진 대인의 목소리였다.
“폐하, 저희는 좀 더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윤허한다.”
진 대인이 앞장서듯 한 발 앞으로 나와 고 환관을 응시하다가, 은을 향해 질문했다.
“태감이 너를 원조하였다는 답을, 너 또한 인정하느냐.”
“그렇습니다.”
“사건의 본질은 네가 어떤 경로로 최상급의 찻잎을 궁에 들일 수 있었는가에 있다. 그것에 관한 것 또한, 도움을 받았느냐.”
“폐하께서 드실 찻잎이 상하게 되어 그 분량의 찻잎을 채워두라는 명을 상궁께 받았습니다. 하여 태감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답하시오, 태감.”
“찻잎은 제가 거래하는 상단으로부터 쉽게 구입하였습니다.”
“상단 이름은.”
“‘해송’입니다.”
“‘해송 상단’이라.”
진 대인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연제를 바라본다. 그리고 황제가 말을 이었다.
“한족들의 물품을 약탈하던 것이 발각되어 손을 놓아버린, 연 승상의 상단이로군.”
“폐하, 해송 상단은 제 손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알고 있소.”
황후가 황제의 옆얼굴을 응시한다. 황제는 진 대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진 대인은 다시 고 환관을 향해 묻는다.
“그 찻잎을 저 아이가 직접 황성으로 들였소?”
“상단의 부림꾼을 시켜 들여온 것으로 압니다.”
“들여온 것으로 안다, 허면 직접 보지 못했다는 뜻이 되는 군.”
“그렇습니다.”
“여기까지의 진술에 거짓은,”
“없습니다.”
너무 쉽게 추문을 마무리 지으려는 분위기가 되어버리자 재상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반발하고 나섰다. 이런 식의 추문이라면 죄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며 분노하는 재상들을 향해 진 대인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무엇을 끝낸다고 성화들인지.”
그리고는 몸을 돌려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폐하, 태감이 진술한 모든 것이 사실인지를 진술할 증거인을 소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증거인을 대령하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저 멀리서 군사의 인도를 받으며 증거인 두 명이 들어섰다. 한 명은 군사 차림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성 밖 저자에서 쉽게 볼 수 있을 평범한 사내였다. 그들은 천천히 들어와 고 환관과 은의 곁에 멈춰 서서는 황제를 향해 절했다.
“두 사람은 모두 찻잎이 성으로 들어오는 데 한한, 확실한 증거인입니다. 한 사람은 그 날 성문을 지킨 수문장이고, 또 한 사람은 상단으로부터 찻잎을 직접 싣고 온 마부입니다.”
진 대인은 두 증거인을 향해 엄포를 놓는다.
“묻는 말에 즉각 답할 것, 그리고 한 치의 거짓을 포함하여선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문장은 그 날의 일을 상세히 고하라.”
“그 날 번을 서던 도중에 이 마부가 찻잎이 실린 마차를 끌고 와서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를 고집하였습니다. 효궁으로 가는 것이라 하였으나 출처를 알 수 없기에 통과시킬 수 없어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허면 찻잎이 어찌 황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냐.”
“때마침 입궁하시던 평부사께서...”
수문장은 힐긋, 평부사의 눈치를 본다. 그가 사색이 되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계속하라.”
“평부사께서는 본인의 저택에 선물된 귀한 차를 폐하께 진상하고 싶어 남몰래 조용히 들여가는 것이니 모른 체 하고 함구해 달라.. 하셨습니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평부사.”
“아, 예. 크게 알리지 않으려 하다 보니. 하하...”
“그 마차에 든 찻잎은 태감이 보낸 것이었을 텐데요.”
“..시일이 겹쳤던 모양이지요. 분명 제가 보낸 찻잎일 겝니다.”
평부사는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숙였고, 연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며, 황후는 침통한 얼굴로 시선만을 내리 깔고 있었다. 진 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부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너는 해송 상단의 사람이냐.”
“잠시 부림꾼으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네가 틀림없이 그 날 효궁으로 찻잎을 들여갔으렷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부림꾼으로 심부름을 하는 처지라고는 해도 보내는 출처 정도는 알았을 터. 그 날 네가 싣고 온 것이 저기 저 평부사 저택의 찻잎이었느냐.”
바닥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은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마부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순간엔, 모든 것이 끝이었다. 질끈 감은 눈을 뜨지 못하고 마른 침을 삼키던 은의 귀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마부는 입을 다물었는지 답하지 않고 있었다. 은은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씩 고개를 들어 제 옆의 고 환관을 보았다. 숙인 고개로 저처럼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고 환관의 얼굴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미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은은 놀라 당황했다.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진 대인도, 황제 역시도 같은 표정이었다.
은은 무언의 계시라도 받은 듯, 불현듯 놀라 고개를 젖혀 무릎 꿇은 제 곁에 선 마부의 얼굴을 본다.
“아니요, 아닙니다.”
은의 동그란 두 눈은, 정직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아니라고 대답하는 우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첫댓글 우겸이 드디어 나타났군요. 아아. 은이 구출되는 걸까요!
우겸이다~! 우겸이 마부의 모습으로 나올 줄은 생각 못했어요 ㅎㅎ 나날이 작가님의 문장력이 늘어가시네요 ㅎㅎ 읽을때마다 감탄한답니다.
드디어!!우겸이네요~~Irene님 그런데 너무하신거 아니에요?ㅠㅠ이런 절묘한 순간에 끊어버리시다니요!! Irene님의 절단신공에 저는 애가 탑니다ㅠㅠ
와..!~~ 드뎌 우겸이의 등장했내요...ㅎㅎㅎㅎ 그럼이제 연제랑은 끝장인가요,,ㅎㅎ
우겸이나타낫네......!!ㅎㅎ 아근데 얼굴보고 있는데 끊어버리면ㅠㅠ .....저울어요ㅜㅠㅠㅠㅠ
우겸이가 드디어!!!! 늘 가슴이 두근두근 뛰게 하는건 역시 작가님의 재량이 뛰어나셔겠죠? 후후, 정말 멋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