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권위(權威)
晳訂 홍 윤 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원효 스님이 수행 중에 해골바가지에 얽힌 일화에서 나온 깨달음이다. 마음이 일체를 만든다. 마음이란 것이 참 교활하고 간사하다. 평상심을 가지고 사람이나 사물을 관찰할 때는 기준이나 법칙이 균일하여 올바른 판단 한다. 마음이 생존 의식과 결부되면 세상에 없는 간사함과 이기적 극치에 다다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극기(克己)’ ‘명상’ ‘참선’을 제시하지만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자기의 마음과 마음이 충돌하면 내적 갈등이 생겨난다. 개인의 갈등은 개인의 인내와 양심으로 해결하지만, 집단과 집단의 이해 충돌이 부닥치면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정책, 사회제도, 법률로 해결한다.
일반적으로 각자의 기준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해 충돌이 생겨난다. 개인과 개인의 이해 충돌은 양보와 배려, 보상으로 해결한다. 공동체 안에서 이해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우선 필요하다. 권위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정당함과 공정함을 지칭한다. 공정함이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절대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인데 과학적 법칙을 제외하고 인간 생활에 적용되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도덕적 기준도 칸트는 ‘정언명법에 따른 것’을 강조하지만,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권위를 적용하는 기준에 따라 전통적 권위, 카리스마 권위, 합법적 권위로 구분한다. (M, Werber)
전통적 권위는 왕조 국가, 국가주의, 연공서열을 강조하는 봉건주의, 관료제에 많이 등장한다. 연장자, 서열이 높은 사람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형태다. 카리스마 권위는 카리스마란 말은 'gift'(신이 주신 재능)를 뜻하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 개성으로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힘을 의미한다. 즉, 카리스마적 권위는 대중을 심복(心服)시켜 따르게 하는 지도자의 뛰어난 능력이나 자질을 의미하며, 믿고 따르는 사람이 저항할 수 없게 하는 천부적인 지도력을 뜻한다. 공자가 주장하는 권위도 카리스마 권위임을 다음 글에서 입증한다. 애공이 공자에게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하느냐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시기를 "바른 사람을 등용하여 바르지 못한 사람 위에 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바르지 않은 자를 중용하고 바른 자보다 위에 두게 되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何為則民服?」孔子對曰:「舉直錯諸枉,則民服;舉枉錯諸直,則民不服。」(논어 위정편 19장). 합법적 합리적 권위는 법규화된 질서의 합법성과 그 질서에 부여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자의 권한이 합법적이라는 신념에 근거를 두는 권위를 말한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존중하면서 생겨난 민주주의가 크게 발전하면서 만들어진 권위이다. 개인의 편견이나 힘이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법적, 제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권위이다.
우리나라 선생님의 권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는 농업사회로 대표되는 봉건사회, 1980년대 이후 산업사회 2000년 이후 정보화 사회로 구분된다. 봉건사회의 선생님 권위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가 대표적이다. 교육이 그리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는 글을 안다는 자체가 전문성이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스승이란 말은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간 삶 자체의 롤 모델이 스승이었다. 해방 후 학교 수가 늘어나고 학생 수가 증가하지만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가르칠 교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교사의 질도 자연적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사의 전통적 권위로 학생을 지도했고 부족한 전문성을 덮으려고 폭력이 난무한 학교 현장이 되었다. 국립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의 잘 갖추어진 교사가 포진한 공립 중학교, 공립 고등학교는 그 도시의 최고 수준의 학교로 등장한다. 교사의 자질이 교사의 권위를 세워준 대표적 모습이다.
산업사회가 등장하면서 학부모의 학력이 높아지고 학생의 눈높이도 높아졌다. 중학교부터 시작하여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이 학생이나, 학교의 지상 최고의 목표가 되었고 선생님은 대학입시에 필요한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은 대접받고 실력이 모자라면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의 권위는 여전히 전통적 권위에 머물러 있었다. 학생들은 학교 선생님 수업으로 실력을 높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교육에 치중했다. 학교 선생님보다 학원 선생님의 권위가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 당시에 어느 대기업 간부가 외국에 출장 갔다가 고급 양주를 구매하여 거래처 은행 직원에게 선물하고 은행 직원은 금감원 공무원에게 선물하고 공무원은 학원강사에게 선물한다는 이야기다. 교사의 권위가 빠르게 추락한 모습이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일명 ‘1타 강사’인 유명 강사의 강의에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학교 선생님의 권위는 더욱더 추락한다. 교실은 잠자는 학생으로 가득 차고 교사는 혼자 수업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울러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지면서 교사의 본분인 학생의 훈육은 더 줄어들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토론 수업 등 다양한 수업 방법으로 수업에 유도하지만, 국가의 대입 제도 때문에 헤쳐 나가기 힘들었다. 선생님의 모든 행위가 학부모의 민원으로 연결되었기에 교사의 자주권이나 독립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학부모와 학생의 민원에 학생인권조례와 학습권 보장으로 교권 자체가 희미해졌다. 수업과 훈육이 교사의 교권을 지킬 수 있는 것인데 보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권(敎勸) 확립과 학생 지도를 위해 교사가 해야 할 일을 3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 첫째로 수업에 필요한 전문적 지식은 기본이고 독서를 통한 많은 상식을 가지자. 초, 중, 고에 따라 다르지만, 수업이 지루하다고 생각할 때 농담이나 잡담이 아닌 학생에게 상식이 될 만한 것을 제시 해 보자. 필자는 음식으로 유도를 해 본다. 먹는 것은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공통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차이점을 제시한다. 눈이 맑아진다. 둘째로 학생과의 관계를 잘 설정하자. 카리스마 권위를 최대한 활용하고 학생과 평등한 관계로 공감과 배려를 만들자. 나는 후배 선생님이나 학생들을 나와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후배 선생님보다 교직을 오래 했으니 노련하고 비법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 않고 후배 선생님의 재치와 능력을 배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늘 칭찬이 많아진다. 학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도 학생과 언어 사용은 좀 틀려도 소통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학생과 내가 늘 동일선상에 놓여 있기에 간섭이나 잔소리가 필요 없다. 셋째로 ‘기다려 주기’이다. 내가 좋아하는 ‘화두 교육’과 일맥상통한다. 나이가 적은 학생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행동은 하지 않는다. 선택에 잘못은 있을 수 있다. 선택에 잘못이 상대에게 피해 주는 행위 또는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다. 학생이 기계가 아니기에 말 한마디로 바뀌지 않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잘못 할 경우라고 판단되면 미소를 날려주거나 짧게 한마디 하면 된다. 그러면 학생도 많은 생각을 하고 고치려 한다. 이것이 안 되는 학생은 치료해야 완치된다. 대표적으로 ‘ADHD 중후군(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경우이다.
선생님의 권위 확립을 위해 너무 완벽한 선생님으로 조건을 요구하는 것 같아도 이젠 선생님은 전문직이어야 한다. 교사 자격증 있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선생님으로 부임해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다. 학생과 더불어 활동하고 소통하여 학생의 수업과 훈육을 이끌어 가야 한다. 특히 학생들 대부분이 외로운 사람들이다. 어디 가서 속 시원히 자기 애로사항과 자랑을 말할 수도 없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더욱더 휴대전화로 들어간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따뜻한 정도 주고 한 번쯤은 어려운 학생을 품어주며 눈물도 흘릴 줄 아는 선생님이 되면 평생 ‘은사님’ ‘사부님’으로 존경받는 선생님이 될 것이다.
2023. 10. 24 憲
장래 선생님이 되고 싶은 학생 동아리 '교학상장'의 수업 자료로 쓴 글입니다.
첫댓글 빈 백년이 지난 어린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문화의 전달자이며 세상을 향해 열린창으로 일거수일투족이 배움의 대상이고 표준이었는데.... 상전벽해를 연상할 만큼 변한 사회 때문인지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려운 지금 같습니다. 그래도 선생님들이 계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닐까요. 나라가 재대로 서려면 공권력이 무너지면 않되듯이, 학교와 학생을 지키고 바르게 인도하는 선생님이 무너지면 우리 교육 또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마련인 작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