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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을 낳아 지방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의 옥당골이나 북쪽의 안악골로 보내라 ”는 옛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옥당골이 바로 지금의 영광군이다. 조선시대에 정이품 당상관, 곧 옥당(玉堂)의 자제들이 벼슬길에 오르면 처음 부임하던 고을이라고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었다. 당시 27개 면과 12개 섬을 거느린 영광은 각종 산물이 풍부한 부자 고을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ㆍ남해안을 연결하는 뱃길의 요충지였다. 게다가 전라도 15개 고을에서 징수한 세곡(稅穀)을 갈무리하던 법성창도 이곳에 있었다. 법성창을 감독하던 법성첨사에게는 세곡 관리 업무말고도 행정적인 권한까지 주어졌다. 그 덕택에 영광군을 다스리던 수령보다도 더 큰 세도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육상운송이 발달함에 따라 조운이 쇠퇴해지자 법성포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토사의 유입과 해저의 융기로 인해 포구의 수심이 얕아진 탓에 작은 어선조차 마음놓고 포구를 드나들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도 법성포는 살아 있다. 영화롭던 옛 시절에는 못 미치지만, 영광굴비의 본고장이라는 명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영광굴비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려 인종 때부터라고 한다. 인종의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1126)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부하인 척준경의 배신으로 실패한 뒤 법성포에 유배되었다. 귀양살이 중에 ‘석수어’(石首魚)라는 고기의 독특한 풍미에 반한 이자겸은 그 고기에다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의 ‘굴비’(掘非)라는 이름을 붙여서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그 이후 영광굴비는 조선시대까지도 진상품이 되었다.
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만든다. 조기 중에서도 법성포 인근의 칠산바다에서 잡힌 참조기로 만들어야 진짜 영광굴비다. 법성포 선창에 부려진 칠산조기는 ‘섭장’을 거쳐 영광굴비로 거듭난다. 칠산조기가 ‘섭장’이라는 독특한 염장법(鹽藏法)에 의해 맛좋은 영광굴비로 만들어지는 것은 영광 일대의 대규모 염전 덕택이기도 하다. 특히 염산면에는 질 좋은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많다. 오죽하면 ‘소금 산’, 즉 염산(鹽山)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실제로 염산면의 맨 서쪽에 위치한 두우리로 가는 도로 옆에는 농경지보다 소금밭이 더 많다. 하지만 이곳의 염전은 대부분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값싼 수입 소금에 밀린 탓이다. 그래도 염산면과 이웃한 백수읍 하사리 일대의 염전에서는 예전과 다름없는 활기가 느껴졌다. 염전지대 특유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 속에서도 소금밭을 쓸고 다듬는 염부(鹽夫)들의 몸놀림이 기운차고 생기 있어 보였다. 그곳에서 만난 한 염부도 “품질과 가격 면에서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곳에서는 계속 소금을 만들 것”이라고 장담했다.
백수읍에는 전남 서해안 제일의 해안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백수읍 대전리와 구수리 사이의 바닷가를 따라가는 백수해안관광도로이다. 약 18㎞에 이르는 이 해안도로는 줄곧 칠산도, 송이도, 안마도 등의 섬들이 올망졸망 떠 있는 칠산바다를 바라보며 달린다. 이 길에서는 동해안처럼 탁 트인 전망도 일품이거니와 해질 녘에 칠산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가 장엄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썰물 때에는 최대 4㎞의 광활한 갯벌이 드러나기도 하고, 갯벌 곳곳에는 주민들이 설치해 놓은 ‘이강망’과 정치망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백수해안관광도로에서 가장 전망이 탁월한 곳은 ‘금강산 가는 길’이라는 음식점 옆의 해안공원과 그 이웃의 팔각전망대이다. 칠산도, 안마도, 송이도뿐만 아니라 낙월도와 위도까지도 아스라이 보인다. 이곳의 절벽 아래에는 모자바위, 고두섬 등의 기암괴석과 무인도가 어우러져서 절경을 이룬다. 해안도로는 정유재란(1597) 때에 왜적을 피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여덟 열녀를 모신 팔녀각을 지나자마자 잠시 바다와 멀어진다. 그러다가 대치미마을에서 다시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데, 모래미해변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부터는 강처럼 좁아진 바다 저편으로 법성포가 빤히 건네다 보인다.
법성포 포구가 시작되는 진내리 좌우두에는 ‘백제 최초불교 도래지’가 있다.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남중국의 동진으로부터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중 행사존자(行士尊者;마라난타)가 불법을 전하러 올 때에 상륙했던 곳이다. 법성포(法聖浦)라는 지명도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법성포에 상륙한 마라난타는 지금의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불갑산으로 들어가서 불갑사(佛甲寺)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법성포와 불갑사라는 지명이 불교와 관련된 것임은 확실하지만, 마라난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불갑사가 번창한 것은 고려 말기 각진국사(覺眞國師; 송광사 16국사 중 제13조)가 머무르면서 500칸 규모의 당우(堂宇)를 세운 뒤부터였다고 한다. 당시 승려만도 수백명에 이르렀으며, 사전(寺田)이 십리에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건물은 대부분 정유재란 때에 전소되어 1598년에 중수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한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보물 제830호)를 비롯해 팔상전, 칠설각, 천왕문 등이 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중기에 지어졌다. 건물 외벽에 단청을 하지 않아서 언뜻 보면 소박하고 단조롭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매우 화려하다. 특히 정면과 측면의 중앙 삼분합문에 장식된 연꽃무늬와 국화무늬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법당 안의 불상이 건물 정면인 남쪽을 향하지 않고 측면인 서쪽을 향해 앉아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처럼 불갑사에는 이따금씩 찾아오는 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얼마쯤 있기는 하지만, 절 자체보다도 주변의 자연이 오히려 더 마음을 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느긋하게 걸어도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숲길이 작은 내를 따라 이어지는데 각종 활엽수들로 터널을 이룬 데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서 한적하고 여유롭다. 더구나 불갑산 주변의 산비탈과 골짜기에는 난대성 상록활엽수인 참식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제112호)와 희귀식물인 개상사화를 비롯해 서어나무, 굴참나무, 비자나무, 송악, 자귀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7월의 녹음이 참 아름답다. -이달의 원자력발전 참고-
♣ 영광굴비가 태어난 법성포. 썰물로 갯벌이 드러났지만 보이는 것 처럼 갯골만큼은 물이 들어차 있어 언제든 배가 드나들 수 있다. 전남 영광군의 법성포와 주변 관광지를 찾는 여행길은 거의 22번 국도와 함께 한다. 이 국도는 전북 정읍시와 전남 순천시를 잇는 동서간 167.6km의 2∼4차로 도로. 서해안고속도로의 고창나들목으로 나와 전북 고창군부터 여행일정을 짠다면 인촌 김성수 선생과 미당 서정주 시인의 생가(시문학관), 학원농장의 청보리밭 구릉과 봄꽃이 아름다운 모양성(고창읍성), 고인돌공원(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거쳐 명사십리 구시포 해변을 들를 수 있다.
여기서 한창 제철인 주꾸미를 맛본 뒤 상하면으로 되돌아가 22번 국도를 따라 남행하면 영광군이다. 도경계를 가로지른 22번 국도는 곧바로 법성면을 지난다. 법성포에서 포구 산책 및 백수해안도로 드라이브, 불갑사 답사를 마치면 영광 일정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다. 22번 국도는 광주와 전남 화순군을 지나 순천으로 이어진다. 순천에서는 아직도 갈대 무성한 순천만과 조계산에 깃든 두 대찰 송광사 및 선암사(순천시 승주읍), 그리고 옛 모습 간직한 낙안읍성(민속마을)을 추천한다. 송광사 선암사 두 절을 잇는 옛 고갯길 트레킹도 좋고 청매화 홍매화로 꽃 대궐 차린 선암사는 지금이 찾아보기에 안성맞춤이다.
●백제 최초의 사찰 불갑사 한반도에서 꽃피워 일본 불교의 모태가 된 백제 불교. 그 최초 전래지라고 알려진 법성포에 들렀다면 당연히 불갑사(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를 찾을 일이다. 부처님 말씀을 백제인에게 들려준 서역승 마라난타가 백제땅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다름 아닌 법성포 갯벌.불갑사는 법성포에서 남쪽으로 19km 거리다. 크지 않은 이 절은 여러 차례 화재로 중건한 탓에 조선후기 양식의 당우만 있다. 그러나 터만큼은 1600여년 전 그대로다. 지금 불사가 한창이어서 어수선하기는 해도 백제 최초의 사찰을 감상하기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우선 대웅전(보물 제830호)의 부처님부터 만나보자. 정면(서향)의 문을 여니 세 분 부처님이 오른쪽(남쪽)으로 돌아앉아 계신다. 정문이 옆문인 셈이다. 남방불교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란다. 대웅전 정면의 꽃살문과 지붕꼭대기 한가운데의 귀면보주(鬼面寶珠·도깨비 얼굴 형상의 보주로 ‘보주’란 악을 제거하고 혼탁한 물을 맑게 하며 재난을 없애는 한편 원하는 것을 갖게 하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지는 탑 꼭대기에 올려두는 장식), 사천왕상도 눈여겨보자. 사천왕상에서는 1987년 월인석보 등 귀중한 문화재가 쏟아져 나왔다.
●백수해안도로 드라이브 이 길은 해질녘에 찾는 것이 좋다. 석양과 노을이 빚는 환상적인 바다 풍경을 감상하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바다 쪽 도로변에는 정자각과 주차공간도 곳곳에 마련돼 있어 차를 세우고 편안히 앉아 낙조를 즐길 수 있다. 해안도로를 찾아가는 접근로는 여러 개. 법성포에서는 22번 국도 입구에 서 있는 ‘원불교 성지∼해안도로’라고 쓰인 이정표를 따른다. 이 길은 ‘바다의 물돌이동’이라는 별난 법성포 지형을 살펴 볼 수 있어 좋다. 아니면 법성포를 지나 22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접어드는 길도 있다. 어디서든 ‘백수’ 혹은 ‘해안도로’라는 이정표를 따라간다. 해안도로는 길용리 원불교 성지∼홍곡리의 18km 구간이다.
○ 전라남도 북단 영광군의 법성포 앞 칠산 앞바다. 일산(一山)부터 칠산(七山)까지 산으로 이뤄진 섬 일곱 개가 모여 있는 바다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70년대 중반만 해도 곡우 때면 북상하는 조기 떼를 쫓느라 바빴던 곳. 물고기 서식 환경의 핵심은 수온이다. 소수점 이하의 작은 변화에도 물고기는 민감하다. 지구온난화로 해수 온도가 올랐으니 칠산 앞바다에서 산란하기 위해 회유하던 조기 떼가 방향을 튼 것은 불문가지. 게다가 제주도 동남쪽의 남중국해까지 나가 배를 대고 잡아 버리는 기술의 개가로 칠산 앞바다 조기 어획량은 격감할 수밖에 없다.
○ 굴비의 고향서 ‘영광의 만찬’ 그래도 ‘굴비의 고향’ 법성포에는 아직도 ‘영광굴비’가 과거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서 잡아 온 조기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모두가 칠산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조기가 아님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조기 양식한단 말은 들어 본 적 없으니 ‘자연산’임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말로만 듣던 영광굴비 맛을 본다. 법성포(法性浦). 그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근방에 백제의 첫 불교 사찰로 알려진 불갑사(佛甲寺)가 있고 지난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원불교를 창건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1891∼1943)가 근방에서 태어나고 그의 깨침 터가 예 있음도 그 이름과 전혀 무관치 않으리라. 그렇다. 중국의 동진(東秦)에서 백제로 건너와 불교를 처음 전파(384년·침류왕 1년)한 인도승 마라난타(摩羅難陀) 존자가 첫발을 내디딘 곳. 그곳이 여기, 법성포다. 서해안에서도 하필이면 이곳에 배를 댄 이유는 뭘까. 딱히 정답이 없는 터라 나름대로 추적해 본다. 그러려면 법성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뒷산의 이름 없는 팔각정이 제격이다.
○ 갯벌사이 바닷길 굽이굽이 장관 '바다의 하회마을’이라고나 할까.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갯골(푹 패어 썰물 때도 물이 고이는 물골)을 따라 갯벌을 감싸 안듯 동그랗게 휘돌아 흐르면서 오른편의 바다로 흘러드는 형국이 영락없는 물돌이동이다. 바다와 멀찌감치 떨어진 골 안에 포구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갯골 덕이다. 썰물 때도 배가 바다를 자유로이 오가게 하는 천혜의 물길. 그러니 마라난타 존자도 이곳에 안전하게 배를 댈 수 있었으리라. 고깃배 역시 수시로 드나들며 고기를 잡을 수 있었으니 포구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포구 밖 큰길가로 나가면 영광굴비 판매점과 식당이 줄지어 있다. 이름 하여 굴비거리다. 게서 한 상에 2만원하는 굴비정식을 맛보았다. 그런 후 영광의 새 매력을 찾아 나섰다. 조기 울음소리 들렸다던 칠산 앞바다의 바다 풍경을 자동차로 달리면서 차창 밖으로도 즐길 수 있는 백수해안도로다.
○ 18㎞ 해안도로 따라 환상의 드라이브 법성포 떠나 해안도로 찾아 가는 길. 길은 물돌이 갯골을 따라 바다로 향하는 한적한 도로다. 골짜기를 메운 갯벌. 그러나 바다가 보일 즘에는 만(灣)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드넓은 개펄로 변한다. 골 안의 개펄. 이 역시 서해안 어디서도 보기 힘든 특이한 풍광이다. 가는 길에 건너편 산 아래로 공사 중인 불교 전래 기념관이 보인다. 자그마한 언덕을 돌아서 오르면 바다. 해안도로는 예서부터 남쪽으로 18km가량 이어진다. 달리는 차에서 오른편은 바다, 왼편은 산, 아래는 절벽. 모퉁이 도는 차를 보니 바다에서 치솟아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 드라이브 중 보게 된 석양과 낙조. 붉은 석양은 저마다 산을 이룬 칠산의 일곱 형제 섬 사이 바다로 내려앉았다. 조기는 갔지만 조기 떼 노닐던 칠산 앞바다의 멋진 풍광을 오히려 드라이브로 되찾았으니 영광의 법성포 찾을 일은 여전히 남아 있다. - 동아 트레블 참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