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맹(美盲)을 만난 화가
엄상익(변호사)
“변호사님의 눈은 참 이상해요. 한쪽 눈은 선하고 착한 데 다른 쪽은 차갑고 무서워요.”
변호사를 하면서 만났던 한 화가를 돌이켜 본다. 그는 평생 계곡과 인물만을 그렸다. 그가 그린 계곡 그림을 잠시 빌려서 사무실 벽에 걸어놓은 적이 있다.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 영혼이 바위 아래 고여있는 어두운 계곡물 위에서 떠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림 속에는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인물화도 특이했다. 폐지를 가득 채운 리어커를 끌고 언덕길을 올라가는 노인의 얼굴을 극사실화로 그렸다. 노인의 얼굴에 겹겹이 포개져 있는 주름의 사이사이에 그 노인 일생의 고통들이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혼자서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한번은 그를 사무실 근처의 허름한 중국음식점으로 데리고 가서 소주와 탕수육 한 접시를 주문하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가족도 돈도 모든 걸 포기했습니다. 하루 종일 계곡에 앉아 그림만 그렸어요. 길을 가면서 우연히 스치는 사람의 내면에서 뭔가가 보이면 그 사람을 그렸죠. 나의 그림은 수행을 하듯 여러 단계를 거쳤어요. 젊은 시절 무수히 묘사해서 손재주가 어느 단계에 가도록 노력했어요. 그 다음에는 매일 기도하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 속에 감동을 넣어야 하는데 정말 그게 쉽지가 않아요. 그래도 어쩌다 그런대로 만족 스런 그림이 나오는 순간이 뿌듯했죠. 지금은 내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혼자 산에서 살다 보면 어떤 때는 다시 사람이 몹시 그리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혼자 있고 싶어지죠.”
그는 약간의 생활비와 물감을 사기 위해서 인물화를 주문받았으면 좋겠다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그를 위해 잠정적으로 영업사원이 되기로 자청했다. 그런데 인물화를 그려줄 사람의 소개보다 더 힘든 일이 생겼다. 그는 인물화를 그릴 사람을 먼저 만나서 그 영혼을 봐야 붓을 들 수 있다고 했다. 이왕 도와주기로 나선 길이다 싶어 어려운 자리들을 마련했다. 그중에는 내가 존경하며 모시던 상관들도 있었다. 그 앞에서 말이나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분들이었다.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실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 자리에서 그는 조심하지 않고 말이 막 튀어나오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자유분방한 예술가의 기벽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한번은 그가 선물이라며 나를 그린 그림을 가지고 왔다. 그가 포장지를 뜯어 보이는 순간 나는 기분이 상했다. 그림 속의 나는 분노를 참고 있는 험한 얼굴 같았다. 내가 가장 감추고 싶었던 어떤 것을 발가벗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변호사님의 눈은 참 이상해요. 한쪽 눈은 선하고 착한 데 다른 한쪽 눈은 차갑고 무서워요.”
나는 불쾌한 느낌을 주는 그 그림을 없애버렸다. 나의 소개로 그가 인물화를 그려준 사람마다 그림을 받고 난 후에 아무 말이 없었다.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 같았다. 한번은 산에서 내려온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그림을 그릴 시간도 부족한데 이렇게 인물화나 그리고 있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나는 속으로 화가 벌컥 났다. 그러면 그를 위해 인물화 주문을 위해 뛴 나는 무엇인가. 변호사 일을 제쳐두고 그를 돕는다고 입품을 팔면서 돌아다니고 밥을 먹는 자리의 비용까지 댔다. 그게 나의 입장이었는데 그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쯤 해서 그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때부터 세월이 이십 년 정도 흐른 어느 날이었다. 로펌의 대표인 고교 선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화가가 그린 인물화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 선배는 많은 그림들을 수집하는 컬렉터였다. 그림에 대해 박식하고 전문적인 감식 능력이 탁월한 분이었다.
“그 화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그 인물화를 두고 두고 볼수록 대단해. 내 주위의 전문가들에게 보였더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구.”
나는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인물화의 예술성을 볼 눈도 기본적인 지식도 없었던 것 같다. 노르웨이 쪽의 한 미술관에 가서 드라크로와의 자화상을 본 적이 있었다. 추악한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그게 최고의 걸작이라고 했다. 나는 미(美)라는 것이 뭔지 모르는 맹인이었다.
Stratovarius -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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