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찬송가 543장 (구 342장) / 사도행전 20 : 13 - 24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543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사도행전 20장 13절 – 24절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이방인 교회들이 드린 구제헌금을 갖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당시 모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흉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갈수록 들려오는 소문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이 오기를 벼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바울이 곳곳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니 눈에 가시 같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기만 하면 즉시 체포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런 위험 앞에 바울도 사람이었기에 마음이 착잡했을 겁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바울이 취한 한 가지 행동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생애 가운데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사도행전을 보면 자주 ‘우리는’ 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저자인 누가의 시각에서 기록한 것으로, 누가와 바울을 비롯한 선교팀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서는 ‘우리는’ 이란 말에서 사도 바울이 제외됩니다. 사도 바울이 일행으로부터 따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제외한 일행이 따로 배를 타고 앗소로 갑니다. 그러면 어디서 따로 떨어졌습니까? 드로아라는 항구 도시입니다. 드로아는 유두고가 바울의 설교 중 창문턱에서 졸다가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 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터어키 북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일행과 잠시 헤어져 혼자 걸어서 육로로 앗소라는 항구 도시까지 가서 다시 합류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바울이 왜 그랬을까요? 당시 그 지역을 육로로 혼자서 여행한다는 것은 마치 자살행위와 같이 위험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짧은 거리도 아닙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거리가 80리 길 가까이 됩니다. 더욱이 전날에는 드로아에서 늦은 밤까지 설교를 하고 육체적으로 아주 피곤한 상황입니다. 배를 타고 일행과 함께 여행하는 게 어떤 면으로 보나 유익하고 편하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굳이 혼자서 도보로 여행을 했다는 것은 필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가까워지는데, 바울이 그곳에 도착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죽음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혼자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길을 회고하면서, 인생의 중간 결산을 해 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시간을 갖고 난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14절~16절을 말씀을 보면, 앗소에서 다시 만나 일행과 합류한 바울의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앗소에서 미둘레네, 기오, 사모, 그 다음에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밀레도는 에베소에서 약 45km 떨어진 항구도시인데, 에베소는 바울에게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그는 순회 전도자로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는 이례적으로 무려 3년 동안 고락을 같이 하며 지냈습니다. 사실 지금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못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천국에 가서나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정리를 생각하면, 아무리 바빠도 에베소에는 잠시 들러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급히 예루살렘 길을 재촉합니다. 구제헌금도 전달해야 되겠고, 오순절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기 때문에 빨리 기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모습 가운데 두려움이나 걱정, 망설임 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복음의 열정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걸은 70리 길에서 새롭게 영적으로 무장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두려운 게 인지상정입니다. 바울도 어쩌면 죽음의 위협 앞에 일말의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앞의 현실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두려움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십자가를 보면 혼란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확신이 넘치게 됩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조차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홀로 걸으면서 주님 앞에 자신의 구원 문제를 점검해 보았을 겁니다. 자신의 고백처럼 죄인 중에 괴수였던 자기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십자가 은혜를 깊이 묵상했을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도 기억했을 겁니다. 우리도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면 확신이 생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나가 보십시오. 대합실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 총총 걸음으로 갑니다. 그리고 버스나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서 떠납니다. 모여 있을 때는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았지만 각각 행선지가 다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 각처에서 모여 살아가니까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행선지가 다릅니다. 영원한 천국입니다. 여러분의 행선지는 과연 어디입니까? 천국이 맞습니까? 이것을 확신한다면 그 어떤 위험도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확신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당당히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홀로 70리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합니다. 아무리 길이 험해도, 외로워도 여전히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결국 바울은 새 힘을 얻고 용기백배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보면, 바울은 그렇게 예루살렘에 갔고, 예상대로 거기서 체포됩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져 로마로 압송됩니다. 그런데 그가 탄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납니다. 배가 난파지경입니다. 그때 선장도, 선원들도, 승객들도, 로마 군인들도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벌벌 떱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선 바울의 모습은 당당합니다.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는 바울이기에 광풍의 와중에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닥쳐오는 위기 앞에 벌벌 떱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당당해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얻은 축복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멘! 이 약속대로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바울은 홀로 걸으며, 닥쳐온 죽음을 생각하면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대로, 사명을 위해 사는 게 가장 지혜롭고 복된 인생입니다. 바울은 외칩니다. 로마서 14장 7절, 8절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이런 사명감 때문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갔고, 로마에서 감옥에 갇힌 후에도 줄곧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게 세상에 왔다가 언젠가 갑니다. 그 후에 주님 앞에 섭니다. 그때 과연 우리 인생 가운데 어느 것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쌓아놓은 소유? 우리가 성취한 권세와 지위?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명을 위해 얼마나 충성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위해 산 것만이 영원한 가치입니다. 우리도 홀로 걸은 침묵의 시간을 통해 인생과 신앙을 재점검해 보시고, 이전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