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여유 (외 2편)
김승일
여유가 있네, 이 새끼, 낮은 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고 석고로 본뜬 것 같은 기괴한 표정이 내 이마에 찍힌다 걸어오는 자를 아지랑이는 막질 못해 나무도 숲도 잡풀들도 그 시간의 흐름을 어긋나게 하질 못해 나는 가까워지는 괄호와 괄호 사이에서 눈물을 증발시킨다 나는 낮 동안 기상천외한 기계 속에서 갈리었어 내 유두를 건드리는 칼날에 진절머리가 나서 온갖 욕설을 눌러 짜는 고름의 밤 화생방에 젖은 눈알처럼 수통의 물을 다 써야만 사라질 고통처럼 나를 그리마 절규하는 표정을 그리마 이마 위로 기어 다니는 모멸감 스위치를 끄기 위해서, 누군가는 머리를 계속 벽에 부딪치는 밤 나는 어둠 속에서 코를 베는 느낌을 상상했어 잘못 쏜 총알처럼 삭제가 불가능한, 나는 미칠 수도 없어,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개새끼 씨발새끼 개좆같은 새끼, 욕설로 문드러지는 새벽까지, 침구 속에서 혹한을 견디는 병신, 달궈진 다짐만이 북소리처럼 나를 간신히 살리고 죽이고 드럼통 핑그르르 허공에서 구르는 것을 봤고 누구는 다리가 절단되었어 다리를 절단하고 차라리 여길 떠났어 떠나지 못하는 나는 왜 울지도 않을까 견디다가 잠긴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는 병사의 울음은 아침이 되면 더 은밀한 곳으로 옮겨졌어 갖가지 실험의 목록들이 나의 목덜미에 새겨졌어 분ㅁ명히 잠가 둔 소총이 사라지는 것처럼, 지뢰를 밟은 병사의 다리가 오려지는 것처럼, 하나 남은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리는 것처럼,
이 새끼 상의 탈의시켜 봐
이 새끼 진짜 여유가 있네
씨발새끼야 네가 벗으라고
남자 새끼가 젖가슴이 있어
이리 걸어와서 손가락에 네 젖가슴 걸어
아니라면 내가 걸어 줄까?
땅에서 강제로 뽑혀진 당근을 본 적이 있어 뽑아 오라고 말하면 닥치고 뽑아 와 소리 없이 지나가는 저녁이 있고 도마 위에서 주황이 썩둑 썩둑 잘려 나가는 소리를 듣는 밤이 있어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 펼치고 있는 이 소리 나지 않는 울음은 무엇일까 슬픔은 슬픔을 말할 여유가 없어 슬픔은 슬픔을 다시 점검하고 슬픔 아닌 것으로 일어날 힘이 없어 현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백지 위의 현장에서 나는 울 수 있어 너무 극적으로 명확한 사진 한 장이 폐 속에 붙어 있어서 숨을 내쉴 때마다 그을음의 냄새 그들이 씹다 버린 껌의 이빨 자국 같은 시간의 패임 그 좆같은 사건사고 달력에 매여 나는 매립할 수도 없는 나의 절망을 뒤집어썼어 숨을 쉴 수 없다고 발광 고통을 기억하라고 명령 오늘만 잊을 수 있냐고 조롱 숨을 고르고 탕! 반작용을 느낄 수 있게 꺽, 꺽 우는 존재를 만나 개같은 새끼들아 제발 죽어, 그래 나는 걸어가 나는 그들에게 자꾸 걸어가는 여유가 있는 개새끼야 나는 조롱과 부끄러움을 한 아름 안고 사는 개 씨발새끼야 나를 더 수치 속으로 함몰시킬 너의 그 부러뜨릴 수 없는 손가락을 향하여 나는 가슴을 달고 걸어가 나는 가슴 달린 괴물이야
나의 관자놀이에서 딱 한 발의 총성이 들렸어
어른들은 좋은 말만 하는 선한 악마예요*
멀티 플러그를 보는 것 같다
선생이 학생을 학생이 학생을 학생이 선생을 선생이 선생을 비집고 들어간다
멀티 플레이를 보는 것 같다
가해자가 더 길길이 날뛰는 학교에서
피해자가 죗값을 낱낱이 받아야 하는 학교에서
우리는 죄다 연결될 수 있다
우리는 죄다 연결할 수 있다
우릴 막 갖다 꽂을 수 있다 여기에 다
들어오게 할 수 있다 여기에 다
플러그에 플러그에 플러그에 플러그를
들어오게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슬픔은 절대로 지구 전체의 슬픔이 될 수 없다
발전소 하나가 지구 전체를 밝힐 수 없듯이
혼자서 울고 있는 학생이 있다
울고 있는 한 가족이 있다
지구 전체의 슬픔을 유가족의 어깨에 짐 지우지 않듯이
유가족의 슬픔을 지구 전체가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어제의 뉴스는 오늘의 뉴스보다 뜨겁지 않고
오늘의 뉴스는 내일의 뉴스보다 차가운 것
얼마나 많은 뜨거운 것들이 우리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나
얼마나 많은 차가운 것들이 우리의 뒤에서 사라지고 있나
플러그에 플러그에 플러그에 플러그를
집어넣게 할 수 있다
끝에서 끝으로 올라가는 저
학생이 있다
밀리고 밀려 올라가는 저
학생이 있다
울면서 얼굴을 가리는 저
학생이 있다
다리부터 떨어지는 저
학생이 있다
머리까지 부서지는 저
학생이 있다
전류가 흐른 뒤에도 작동하지 않는다면
고장 난 것이니까 바닥에 뭉개진 저
학생
플러그 플러그 플러그 끝에서 빨간 눈물을 흘리던
학생
고장 나지 않았던 건 그 학생의 눈뿐
끝없이 눈물을 흘러나오게 하던 그 학생의 눈뿐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 끝에서 마이너스된
학생이 있다
마이너스 마이너스 끝에서 플러스를 찾고 있는
선생이 있다
* 학교폭력 그 끝에 몰리고 몰려 투신한 두 학생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한 학생은 아파트 8층에서 투신하기 전에 유서를 썼다고 합니다. 초등학생이 유서를 썼습니다. 학생은 유서 속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자신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입으로만 선한 악마입니다.” 투신한 학생은 동급생들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과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엄마는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모습에 절규했지만 학교는 지속적으로 외면했습니다. 학생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학폭위가 열리면 끔찍한 학교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학생의 절규를 무시했습니다. 어른들이 학교 안의 폭력을 방관한 것입니다. 결국 A4 용지 반쪽 분량의 유서를 품에 안고, 이 땅의 한생 한 명이 슬프고도 참혹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런 처절한 고통을 내면 깊은 곳에서, 혼자서, 단도처럼 품고 있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학교)폭력으로 괴로워하는 모든 학생들과 부모님들께 이 시를 바칩니다.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실패를 풀어놓고 있었다
출구를 상상하고 있을 때
실패를 꼭 쥐고 있었다
나는 나의 실패가 그린 그림을 헤아리면서
울음의 포화 속을 걸어 나와야 한다
시작과 끝이 다 다른 키스
시작이 끝에 다다른 키스
모든 도망과 탈출과 증발과 비로소
구원까지 사라지고
입구와 출구가 다 다른 키스
입구가 입구에 다다른 키스
나는 나의 폭력을 폭력이라고 처음 발음해 본다
나는 나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처음 갈음한다
—시집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202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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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 1981년 서울 출생.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 수료. 2007년 《서정시학》 신인상 시 부문으로 등단했고, 시집 『프로메테우스』 『나는 미로와 미로의 키스』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