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일탈(逸奪)을 꿈꾼다、※※ <006>

※※ 나는 일탈(逸奪)을 꿈꾼다、※※ "어이 흥국이!! 내가 9바퀴 마저 돌아주면 돼냐?!" 땀에 축축해져 미끌거리는 손바닥으로 간신히 테니스코트장의 기둥을 쥐고 턱까지 차오르는 숨이 참기 힘든 듯 수십번도 넘게 헐떡이며 고개를 땅바닥으로 처박고 있던 나의 귀에 들리는 저 목소리. "뭐, 뭐라!! 흐,흥국. 아니 저놈은 또 뭐야!!." 여학생들만이 날 뛰고 있어야 할 운동장에 별안간 공고교복을 말끔하게 빼 입은 남학생이 나타나 소리 치자 찬 가을바람이 몰아부침에도 불구하고 하나, 둘 고개를 창문밖으로 내미는 여고인들. 녀석이 누구인지 어떤 녀석인지. 헐떡 거리는 숨을 견뎌내며 먼저 이름을 불러 세우기도 전. "꺄아아아악!! 어떻게!! 너무 잘생겼다!!" "오빠!! 여기 좀 봐줘요!!!" "미친년! 오빠일지 아우일지 어찌 알고!! 그래도 잘생겼다!!!" 여기 저기서 튀어 나오는 함성들. 함성이라기 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시간이 멈춰버린 듯 꼼짝않고 녀석이 하는 모양새를 바라보고 기둥에 간신히 버티며 서있고. "가만 보니까 저거 공고 한강 아니야?! 아이구 난 몰라!!! 강이씨!!! 아이구야 강이씨가 어인일로 여고까지!! 강이씨!!" 우리반에서 터지는 비명소리에 의해 다른 반의 창문들도 하나 둘씩 열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저놈을 알아 본 한 여자 아이가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그토록 애절하게 이름이 불려지는 한강이란 놈은 가방과 교복 마이를 벗어 던지고 잘 정돈 된 까만색 머리카락을 날리며 운동장을 돌고선 나를 바라보며 셀쭉하게 웃는다. 그렇게 녀석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인하여 여고의 7교시 수업은 완벽한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 ................. "설강화 너 이놈! 이제 사내놈까지 학교에 끌어드리느냐!! 야! 이자식!! 넌 뭐야!!!" 콧털대마왕의 불호령과 같은 목소리가 넓은 운동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이럴 줄 알았어. 안그래도 날 못잡아 먹어 안달 난 콧털새끼한테는 좋은 쿠사리감이 생긴거네. 앞으로 닥쳐 올 상황이 뻔히 눈 앞에 보이는 나는 푹 한숨을 쉬며 땀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를 신경질 적으로 쓸어넘기는데. "할 일 없는 놈이야." 고막을 100번은 찢어내고도 남았을 콧털대마왕의 목소리에 눈 하나 깜짝 않고 저토록 반말을 찍찍 싸대는 녀석은 방금 전 운동장 9바퀴를 쉬지 않고 달려낸 정신 나간놈. 공고 한강. 그 놈의 말에 따라 콧털새끼의 콧털이 분노로 인해 달싹달싹 거리기 시작한다. 이새끼 미친거 아니야? "야!" 그 콧털을 감지한 나는 한강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놈을 부르고. "뭐야!! 이눔아!! 이게 어디서 어른이 하는 말에 꼬박꼬박 반말이야!!!" "괜찮냐?" 그런 콧털새끼의 콧털의 움직임이 놈의 눈에는 포착 되지 않는 것일까? 그 상황에서 어째서 넌 나에게 다가와 묻는것이냐. 콧털새끼의 콧털은 곧 떨어질것처럼 달싹거리는건데 이 타이밍에 나한테 그딴걸 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거냐. 엉? "아니 이새끼가!!" 역시나 녀석의 건방진 태도에 분노를 느낀 콧털대마왕. 소눈깔같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를 지르더니 죽도를 든 육중한 팔을 들어 나에게로 고개를 돌린 한강의 머리통 위로 쳐들고. 넌 죽었구나. 이제 곧 저 거만한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 지겠구만. 그런 예상을 하며 엄청난 속도가 붙은 그 손이 한강의 머리통을 내려치기 전에 두 눈을 꼭 감아버리는데. ........................... ................ "어!! 이새끼야!!! 이거 안놔!! 이 건방진새끼!!" 하지만 꼭 감은 두 눈을 살며시 떴을 때 보인 장면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 한강의 머리를 향해 힘차게 내려 앉으려던 죽도가 머리통에 채 닿기도 전 한강의 손에 잡혀 있고 그 녀석의 행동에 당황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콧털이. 왠지 내가 생각했던것과는 많이 반대로 흘러간 상황. 뒤이어 와작! 하는 소리와 함께 너무나도 초라하게 두동강이 나버린 죽도가 눈안에 들어오고. "아, 아니.." 콧털대마왕은 망연자실한 눈동자로 그 두동강이 난 죽도를 바라보며 입만 뻥긋 거린다. 어쩐지 그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나. "때리지마." 하지만 일말의 죄책감같은건 느끼지도 않는건지 그 죽도를 질퍽거리는 운동장에 내다 버린 한강이 새까만 머리를 쓸어넘기며 하는 말. ............ .... "기지배들 앞에서 가오 죽게." ............................................. ......................... 너 이자식 두고보자며 한강을 향해 한 삿대질을 마지막으로 그 옆에서 지켜보고 섰던 나를 두어번 흘겨보고는 쿵쾅쿵쾅 거대한 소리를 내며 그자리를 떠나 버린 콧털새끼. 그런데도 저 놈은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되는 걸까. "야. 학교 앞이거든." 학교 정문 앞의 기다란 봉에 앉아 있는 내 옆에 따라 앉더니 뻔뻔스럽게 담배를 피어대고 있는 한강놈. "그게 뭐." 지가 방금 전에 행한 행동은 싹 다 잊어 먹은 듯 피식 웃으며 말한다. 골때리는 놈. 그런 천하태평한 놈을 보니 어이가 없어지고 그 놈을 말없이 흘겨보며 짜증나는 듯 머리를 긁적거린 나는 놈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어 든다. "..........." 아무 말 없이 그런 나를 바라보는 한강 놈. 그런 놈의 따가운 시선이 옆얼굴로 느껴지지만 돌아보지 않은채 정문쪽만 바라보고. "피고 싶음 말을 해, 임마." 피식하는 웃음 섞인 말을 내뱉고 새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무려하는 한강. 탁!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손은 허공에 뜬채로 있고, 고개도 여전히 허공에 뜬 그 손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손에 아무것도 있지 않은 그와는 반대로, 질퍽한 땅이 담배 한대를, 그리고 내 손이 새 담배 하나를 들고 있다. 말 없는 한강의 짙은 검은눈이 나를 바라본다. 그와 마주친 내 두눈에는 오기가 가득 차 있다. 내 두눈에는..오기밖에 가득 차 있질 않다. "뭐야. 너 뭐야 진짜. 나한테 왜 이래?" 담배를 오른손으로 꽉 쥐고 안자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 놈을 내려다 본다. "내놔 그거."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하는 한강. "너 뭐냐고 했어. 나한테 왜 이러냐고 했어." "그거 이리내." "대답해. 니가 아는게 뭐고 장유한이랑 다 끝난 나한테 왜 이러는건지 다 대답해," 뭔가 심하게 빗나가 있는 서로의 눈이 마주하지만 마주하지 못한채로 서로를 바라본다. 지독하게 시린 눈으로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던 한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놈이 내게 다가와 내 어깨 넘어로 양팔을 뻗어 두 팔을 겹친다. 난 순간적인 녀석의 행동에 아무 말도 못한채 그 놈을 올려다 보기만 하고 그런내게 허리를 숙여 다가오는 한강녀석. ..................... "자꾸 까불면....이 자리에서 먹어버린다." 입에 고여있던 침이 꼴깍.하고 넘어간다.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상황에 아무말 못하는 난 두 눈만 깜박깜박. 그런 나를 보며 녀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더니 내 손에 쥐어진 담배를 슬쩍 빼앗어 문다. "강화야!!" 때마침 운동장 저 끝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그 목소리에 녀석을 툭 밀치고 돌아본 내 눈에는 내 가방을 들고 내게로 뛰어오는 난영이와 신자가 있다. "자, 종례 끝났어. 역시 강이였구나. 멋졌어. 강아!" "지난영! 지금 누구더러 멋있대는 거야!!" 해맑게 웃으며 내게 가방을 건내준 난영이가 태빈이의 목소릴 듣더니 태빈이를 부르며 그쪽으로 달려간다. 오자마자 닭살이시군. "야야. 말두 마. 우리반까지 난리났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내가 잠에서 다 깼다는거 아니냐. 근데 니네 둘. 무슨 사이냐?" 질퍽한 땅덕에 운동화에 엉겨붙은 진흙을 정문 벽에 스윽스윽 문질러대던 신자씨가 미심쩍다는 듯이 나와 한강을 바라보며 만한다. "헛소리마. 미친년." 신자에게 한마디 한 나는 한강에게 뺏어 든 담배를 한강놈의 가슴팍에 턱!.하고 밀어부치듯이 내어주고 삐죽하고 올라간 두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고나서 유유히 정문을 통과해 버린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굴욕감. 뭐라고? 나한테 뭘 어쩌겠다고? "강화야 어디가?" "응? 설가!! 설가 어디가!!!" 한강놈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바르르떨리는 주먹을 꼭 쥐고 내 앞에 서 있는 난영이와 골빈이. 그리고 날 부르는 착한이와 나머지 공고 놈 둘을 지나쳐 아무런 대답도 않고 그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설강화." 저물어 가는 가을 노을 아래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대답않는 나는 터벅터벅. "설강화." 그런 나를 줄기차게 부르는 그 입술. 내가 밟고 있는 이길이 지금 어디로 뻗어있고, 내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건지도 모르는채. 무작정 걷기만 하는 나. 그런 내 뒤로 더이상 내 이름이 들리지 않고, 들리는 건 내 뒤를 따르는 나보다 조금 빠르고 무거운 발자국 소리. 하지만 그 소리가 내게 가까워 지든 어떻든. 난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만 한다. 하지만. ......... "놔."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냐." "노라고 했어." "내가 자꾸 까불면 어떻게 한다고 했냐." 그런 나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낚아챈 한강의 손. "놔, 이새끼야. 좋은 말 할때 놔." 무미건조한 말이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다. 말에는 억양이 없고 그 억양없는 말에는 그어떤 감정또한 실려 있질 않다. "먹는다 그랬다. 이 자리에서 먹어버린다 그랬다. 내가." "노라고 했ㅡ." 말을 채 끝내기도 전. 붙잡혀 있던 손이 강한 힘에의해 앞으로 끌려나가고 놈의 왼손이 내 머리통을 끌어 당겨 버린다. 내 왼손을 잡고 있던 그의 오른손에서 힘이 풀리고 그 오른손이 다음엔 내 허리를 휘감아 그의 몸뚱아리와 나를 바짝 밀착시킨다. 감정없는 말이 세어나왔던 그 입술에는 낯선 입술이 와 닿아 말을 가로 막아 버렸다. .....멈춰버린걸까. 시간이 멈춰버린걸까 정말. 멍하게 뜨고 있는 두 눈에 보이는 저 사람들이 아무 미동없이 다들 입만 벌리고 멈춰있는것처럼. 나도, 시간도 멈춰버린걸까.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런거라고 누군가가 이 상황에 뛰쳐나와 외쳐줬으면 좋겠다. 나라도 외치고 싶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이놈의 숨결이 내 얼굴에 와 닿고, 이놈의 차가운 심장의 움직임이 내 가슴에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아무것도. 멈추지 않은거야. 시간이...멈추질 않은거야. "어떡해!! 난 몰라!!! 꺄아아악!!!!" "엄머, 엄머! 죽인다, 야." 얼마간의 침묵 끝에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비명소리들이 내 귓가를 진동시킨다. 그 진동으로 시간의 초침이 멈추지 않고 여전히 돌아가고 있음이 명백해 졌다. "이 미친것들아!! 조용히 안해!!! 다 눈감어!! 빨리!" 여태 당황해서 아무말 못하고 있던 신자가 뒤늦게서야 주위에 뺑 둘러 서 있는 애들에게 소리지른다. 이제와서 눈감으란 말은 너무 늦은거잖아. 내 입술에서 떼어진 그 낯선 입술이 씨익 곡선을 그리고 올라가 버린 이 순간에 눈 감으라니. 늦어도 한참은 늦은거잖아. 그리고 눈꼬리가 약간 휘어져 있는 그 눈이 나와 마주치고. "한강이다." "......." "내가 한강이야." "......" "한다면 하는게 바로 한강이야, 임마." 놈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을 가만히 내려 누를 적에. ............. .... 짜악!! 듣는것만으로도 따가운 소리가 길 한복판을 매워 버린다. 어이없다는 듯 하!하고 웃는 그 꼴보기 싫은 면상이 왼쪽편으로 돌아가 있다. 녀석이 터져서 피나는 입가를 손가락으로 만지며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놈과 마주친 내 두눈에서는 탁한 눈물이 한줄기 내려 내 자줏빛 마이를 스치고는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다. 그런 날 바라보는 검은색 눈의 동공이 커진다. 그런 놈의 눈빛을 초점 없는 눈으로 응시하는 난 손등으로 입술을 스윽 닦아내고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고 하늘비가 섞인 한마디를 내뱉고 돌아선다. ......... .. "개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