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군사는 동수에서 패해 남쪽의 금호강까지 밀렸다. 이때 두 나라 군사가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쏜 화살(살)이 하천(내)을 가득 채웠다(살내). 여기서 신숭겸과 김락의 지원 병력과 합세한 고려군이 대구 시내에서 동화사로 가는 길의 파군(破軍)재 삼거리에서 다시 후백제군과 큰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고려군(軍)은 후백제군에게 대파(破 깨뜨릴 파)당했다(파군재 破軍峙). 이때 부하였던 신숭겸 장군은 왕건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왕건 행세를 하면서 싸우다가 대신 죽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왕건은 왕산(王山)에 숨었고 주변의 독좌암(獨坐岩)이라는 바위에 홀로 앉아서 잠시 쉬기도 하였다. 시량이(失王里 실왕리, 동구 평광동 소재)라는 산골 마을에서는 한 나뭇꾼이 자신이 먹을 주먹밥을 주고 나무하고 내려오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없어졌는데(失 잃을 실) 나중에 왕(王)인 왕건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왕건은 반달이 비추어 주던 반야월(半夜月)의 도망길 속에서 적의 추격을 벗어나서야 굳었던 얼굴이 풀리고(해안동 解顔洞)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안심동 安心洞). 그리고 남쪽으로 더 멀리 도망쳐 앞산(남구 소재)에 숨으면서 안일사, 은적사, 임휴사, 왕굴 등에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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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공산전투의 공신들에게 큰 보답을 하고
3년 후 왕건은 경북 고창(안동)의 병산전투(930)에서 다시 직접 맞붙은 견훤에게 완승을 거둠으로써 공산전투의 패배를 되갚기도 했다. 이후 왕건이 신라 경순왕을 위로하고 배려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경북 중심의 많은 지방 호족들이 왕건에 항복해 왔다. 이를 계기로 경북지역에서의 왕건 세력은 더 강화되었고 후삼국 통일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936) 왕건은 지혜로운 묘책(지묘 智妙)으로 자신을 구하고 죽은 신숭겸장군과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파군재 삼거리에 지묘사를 세웠다. 현재 신숭겸 장군 유적지가 있는 마을은 지묘동(智妙洞)이다. 또, 신숭겸, 김낙 등 모두 여덟 명의 고려 장군이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공산(公山)이라는 산 이름은 팔공산(八公山)으로 바뀌었다.
또, 왕건은 매년 열리던 팔관회에서 자신을 위해 죽은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이 함께 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이들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조복을 입히고 자리에 참석시켰다. 팔관회는 토속신에 제사를 지내고 국가 태평, 왕실 안녕을 기원하면서 동시에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던 불교 의례였다. 그리고 약 200년 후 고려 제16대 왕인 예종은 서경(평양)의 팔관회에서 신숭겸과 김낙의 허수아비가 있는 사연을 알고 두 장군(二將)을 추도하는(悼 슬퍼할 도) 가요인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짓기도 했다(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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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타고 하늘을 내려오는 아름다운 모습이 새겨진 마애불
동화사 옛날 정문이 있는 곳에 봉황문이라는 일주문이 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머문다는 상상의 새인데 오동나무 숲이 무성했던 동화사와 잘 어울린다. 마애불은 봉황문 옆 암벽 위쪽에 있다. 5월말, 오후 5시가 되면서 마애불에 햇빛이 들기 시작한다. 마애불이 새겨진 곳은 바위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린 종이처럼 보인다.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둥근 얼굴에 오종종한 눈, 코, 입에서는 포근함이 넘친다. 머리와 몸 주변에서 나오는 빛은 석양과 만나면서 황홀할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아름다운 마애불중의 하나이다.
첫댓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참좋은 ♡♡♡♡
감사합니다 ~~~ 참 좋은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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