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하게 보내는 나날
현역에서 은퇴한 이들 사이에 흔히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이 말이 요새 내가 처한 상황에 꼭 들어맞은 표현이다. 지난 이월 말에 정년을 맞아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는 영혼이다. 지난해 연말 겨울방학에 들면서부터 3년 간 머문 거제 연사 와실에서 철수해 창원으로 복귀하면서 나의 인생 후반전이 시작되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추위가 가시질 않아도 날마다 근교 산자락과 강변으로 트레킹을 다녔다. 봄이 되어 들녘으로 나가 쑥이나 냉이를 캐 오기도 했다. 외감마을 동구와 주남저수지 근처 농수로에서 돌미나리를 걷어와 무학상가 주점에서 전을 부쳐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도심 가로수 벚꽃과 응달 산자락 진달래꽃이 저물자 연초록 잎이 돋았다. 산나물을 채집하는 계절이 되니 몸이 더 바빠졌다.
북면 천주산과 양미재 일대는 물론이고 진전 여항산 미산령도 두 차례나 넘었다. 산자락을 누비면서 배낭을 가득 채운 산나물은 우리 집 식탁의 찬거리로 삼음은 물론이고 지기들과도 나누었다. 무학 상가 주점 아낙에게 넘겨 전을 부쳐 친구와 안주로 삼아 봄내음도 맡았다. 비가 오면 도서관에도 들리려고 했는데 몇 차례 밖에 가질 못했다. 한 시도 집안에서 미적댄 날 없이 바빴다.
문학회 동인 몇 분과 낙동강 강변 임경대에 올라 원동까지 걸었고, 을숙도와 다대포로 트레킹을 다녀왔다. 벗과도 동행하기도 하고 혼자서 다닌 날이 더 많았다. 남강 하류 악양루 일대를 누비었고 남지 박진나루와 개비리길도 걸었다. 현직인 교육대학 동기들과도 술자리도 가지면서 청년기를 회상하기도 했다. 지난 주중엔 떠나온 거제 국사봉으로 올라 곰취를 채집해 오기도 했다.
보름께 전부터 살고 있는 아파트를 리모델링을 하는 건으로 신경이 쓰인다. 이십여 년째 눌러 사는 아파트인데 건령이 삼십여 년 더 되다보니 베란다 창틀을 비롯해 곳곳이 노후화되었다. 아직 재개발 얘기는 언급되질 않아 이사를 가지 않고 전면적인 개보수를 하려니 그 과정이 만만하지 않았다. 이참에 내구연한이 지난 가구들은 모두 폐기하고 책과 옷가지도 과감하게 정리했다.
같은 아파트단지에 사는 초등 친구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를 도와주어 고마웠다. 친구는 연전 도청 고위직에서 퇴직해 먼저 리모델링을 한 바 있어 나에게 시공업자를 소개하고 실용적이고 경비를 절약하는 방도를 안내했다. 버려야 할 세간이 많기도 했지만 책을 비롯한 다수의 살림 도구를 일일이 싸고 묶어 베란다 창고와 현관 바깥 계단으로 옮겨 놓는 일은 이사만큼 힘들었다.
이런 와중에 대학 동기로 현직인 벗은 자기가 가꾸는 텃밭 이웃에 한 노인이 가꾸던 터를 나에게 경작하라고 했다. 텃밭의 위치는 사파동 창원축구센터 곁 시청 공한지였다. 현대로탬에서 퇴직한 노인은 나이가 여든이 넘자 기력이 부쳐 농사를 지을 형편이 못되어 그간 지어 왔던 밭뙈기를 묵혀 놓았더랬다. 지난주부터 그 묵정밭으로 가 잡초를 뽑고 검불을 치워 모종을 심고 있다.
어제는 집을 리모델링할 업자가 공사를 시작한 첫날이라 창틀을 교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마쳐 놓았다. 아침나절 시공자의 일을 거들고 오후는 지귀 장터로 나가 채소 모종을 사서 묵정밭을 일군 자리로 나가 심어두었다. 가지와 오이를 비롯해 고추와 토마토까지 심고 호박은 시간이 부족해 남겨두었다. 호박까지 다 심으려니 친구와 함께 할 술자리 합석을 재촉해 미루어 놓았다.
오월 첫째 토요일이었다. 아침나절은 용호동 가로수길 단독주택단지로 나가 세를 낸 원룸 사정을 알아봤다. 리모델링 기간에 해당하는 보름 정도 임시 거처를 알아보니 사정이 녹녹하질 않았다. 이후 텃밭으로 올라가 남겨둔 호박을 심고 먼저 심음 모종 곁에는 부엽토를 긁어와 뿌려주었다. 오후에 텃밭을 내려와 용호동 가로수길 골목에서 공실 원룸을 한 곳 까까스로 찾아두었다. 22.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