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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33
하루가 지난 뒤, 황성의 분위기는 평화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숨 막히는 긴장에서는 누구도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니 자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았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성 안의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했다. 연제를 비추던 해는 이미 저물었다고. 황성 안 모든 궁의 지붕에 내려앉은 아침다운 고요. 그러나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고요를 뚫고 고 환관이 황제궁으로 들어섰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부지런한 몇몇 궁인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굽힌다. 그러나 고 환관이 지나쳐간 그네들의 시선은 그를 뒤따르는,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눈매에 제법 다부진 이목구비를 가진 우겸에게 닿아있었다. 그런 호의적인 시선들이 익숙하다는 듯 우겸은 아무렇지 않게 고 환관의 뒤를 따른다.
“폐하, 늦었사옵니다.”
황제의 방으로 들어선 고 환관이 웃으며 우겸을 소개시켰을 때에도 그에게 보내는 황제의 시선은 비슷한 것이었다. 우겸이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고 입을 떼기도 전에 황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우리의 ‘열쇠’가 너였구나.”
“황공합니다, 폐하. ‘이우겸’이라 하옵니다.”
“어제까진 마부 차림으로 그 어엿함을 숨기고 있었군, 그래.”
겸손한 미소로 고개를 숙여 보이는 우겸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이 흡족함으로 차오르는 것을 고 환관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말한 그대로다. 우겸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작 연제 일파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열쇠’였다. 어제, 바로 어제까지만, 그리도 당당하게 목을 굽히지 않고 뻗댈 수 있었던 연제와 그 무리들을 그 자리에서 포박하여 감금시켜 버릴 수 있도록 한 열쇠.
“오래전부터 태감과 연고가 있었다지.”
“그러합니다. 폐하.”
“그보다 확실한 보증이 있겠나.”
황제가 고 환관을 향해 말하자 그가 웃음으로 답했다.
“이 자리의 태감 외에도 네가 살린 숱한 목숨들을 생각한다면야 부족하겠지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거라. 기꺼이 들어주마.”
“말씀만으로 광영이옵니다, 폐하.”
예를 갖추는 우겸을 바라보며 고 환관은 슬몃 미소지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가 우겸을 대신해 조심스레 입을 연다.
“폐하, 우겸에게 최고의 영예가 될 만한 상을 제가 한 가지 제안해 드려도 괜찮을는지요.”
“들어보지.”
“눈앞에 보고 계신 이 청년, 무예에 조예가 있습니다. 그 능력을 폐하께 바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궁정조직을 말하는 건가.”
“물론 그도 훌륭한 직책이겠습니다만, 저는 감히 ‘지원’의 직위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폐하.”
지원(知院). 예부터 황태자가 겸하는 군사조직의 장관직 다음가는 높은 직책으로 황제의 신변과 수도의 근위를 지키는 궁정조직에서는 가장 영예로운 직위였다. 현 황제에게는 후계자가 없어 그 장관직은 선황제 시절의 대장군이 맡고 있으나 지원을 우겸에게 맡기게 된다면 실질적인 영향력은 그가 행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사실상 황제가 군사력을 손에 쥘 수 있게 되는 것과도 같았다. 게다가 지원은 궁정조직에서 관리하는 황제 친위대와는 별개로 황제 개인의 호위로 둘 수 있으니,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고려인’을 둔다는 재상들의 반발만 막을 수 있다면 명목상으로는 가장 좋은 위치였다. 고 환관이 여러 날 고심하여 고르고 골라낸 최고의, 최상의 요직이었다.
“지금 연제가 완전히 폐하의 손아귀에 잡혀있다고는 하오나, 그를 처벌한 후의 여파에 어떤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호위를 따로 두시는 것은 전부터 진언 드리려고 했던 일이었습니다.”
우겸에게는 물론, 황제에게도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지만 지금이 두 사람의 첫 대면이라는 것에서 부터가 커다란 장벽이었다. 황제는 별 뜻 없이 묻는 것처럼 몇몇 질문들을 던졌다.
“지금껏 사람을 죽여 본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폐하.”
“만약 나를 해하려는 무리들이 나타난다면.”
“되도록 목숨은 앗지 않는 방법을 우선하겠습니다.”
“네가 섬기는 주인을 죽이려 하는데도 말이냐.”
“폐하께 거역하는 자들의 생사여탈권은 폐하가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만족스레 웃었다. 무사히 시험을 통과했다는 답이기라도 한 양.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미리 준비라도 해 놓았다는 듯 방 한켠의 오래된 장 안에서 비단으로 잘 동여맨 보검을 꺼내와 망설임 없이 우겸에게 건넸다.
“이 검과 그 직위가, 최고의 주인을 만났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도록 하거라.”
//貢女 奇皇后//
은의 조용한 걸음이, 금족령이 내려진 황후가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황후궁은 이제는 전혀 화려하게도, 웅장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황명에 따라 궁인 모두가 자리를 비운 황후궁은 을씨년스런 분위기마저 감돈다. ‘황후’라는 이름의 여자를 위해 쓸데없이 크게만 지어놓은 것 같은 무소용해져버린 건물 전체가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이 천천히 소리 없는 그녀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문손잡이로 가 닿는 은의 손등 위에 기다란 상흔이 아직도 여실했다.
드르륵, 열리고, 드르륵, 닫힌다. 그녀의 방 역시 당연하다는 듯 비어있는 모습을 보며 은은 잠시 굳은 듯 멈춰 있었다. 사람의 자취가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없는 적막. 그러다 저쪽 접빈실로부터 옅은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동그란 창밖을 바라고 선 황후가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수한 차림을 한 황후는 무언가를 그리워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바깥에 둔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끝이 나는군.”
“........”
“나를 이긴 것을 자축하러 온 것이라면 마음껏 비웃어도 좋다.”
황후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은은 스스로 자신의 패배를 입에 올리면서도 절대 예의 위엄을 잃지 않는 그녀의 태생적 고고함이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었다. 저는 마음이 약해 빠져서, 주저앉아 울거나 하는 황후를 대면했더라면 분명 동정하지 않을 수 없을테니.
“누가 이기고 누가 졌단 말입니까.”
“........”
“결국 승패는 황제 폐하와 연 대인께서 나누어 가지셨으니, 정작 우리는 그 사이에 휘둘린 인형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믿고 싶어도 벌써 은은 황후를 연민하고 있었다. 주체가 되지 못하고 아버지의 인생에 휘말려 이리저리 이끌려야 하는 운명, 자신이 겪었기에 그런 주 황후의 삶에 연민을 가진다는 것을 어쩌면 당연하게 느낀다. 동병상련. 연제의 딸로서 황후가 되지 않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좀 더-
“우스운 소리를 하는 군.”
황후가 비웃듯 말하며 뒤돌아섰다. 그러나 그 표정은 냉정하고 비장했다.
“그것은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아본 적 없는 패배자들의 입에서나 나올 말이겠지.”
“........”
“내 인생의 주체는 언제나 나였고, 나는 늘 내 뜻대로 살아왔다. 다른 이들이 나를 아버님의 꼭두각시로 보았다고 해도, 결국 살아가는 것은 나 자신이다.”
머리를 강하게 내리친 것 같은 그녀의 말이 은을 그대로 굳어버리게 했다. 그것은 그 말에 실린 단호함 때문인지, 뼈저리게 느껴지는 제 삶에 대한 자괴 때문인지 금세 파악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은은 입을 연다.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았다면, 어째서 죄를 짓는 삶을 택하셨습니까.”
“죄?”
“........”
“내가 옳다 생각했던 일들이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죄로 여겨졌을 뿐이겠지. 자기 부모와 형제를 지키는 일을 죄라고 할 이가 누가 있을까. 모든 것이 자기가 하면 덕(德)이 되고 남이 하면 죄(罪)인 세상이 아니냐.”
“궤변을 늘어놓으시는군요.”
“그 또한 네 생각일 뿐.”
“스스로 죄인이 되셨는데 죄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치열하게 다투어 황후가 되었고, 늘 스스로를 부추겨 황후라는 틀에 걸맞는 사람이 되도록 나를 끼워 넣은 것, 그것이 죄라면 죄겠지.”
“폐하를, 좀 더 이해하려 노력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은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결정나버린 이제와서 지난 일들을 들춰보는 것이란.
“이해. 나보다 더 그 분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 하여 부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 분을 은애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 적막한 궁에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
은은 말없이, 조금씩 누그러져가는 황후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애’라는 단어. 자신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음을 뒤늦게 기억해버린 듯한 아련한 얼굴을 하고선 깊어져가는 눈동자를. 아마도 황후는 깨닫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에게도 그를 사랑했던 순간이 분명 존재했음을. 그 마음과 기억을 잃고 산 세월이 너무 길었음을.
“다른 건 몰라도 마마의 죄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요.”
“........”
“폐하를 은애했었던 자신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죄.”
은은 곧 울어버릴 것 같은 황후를 위해, 그녀를 등지고 방을 나왔다. 반절의 후회와 반절의 후련함. 조금만 더 있었다간 동정의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은은 서둘러 황후궁을 벗어난다. 스스로 제어되지 않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것처럼, 외려 제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숨이 가쁘도록 빠른 걸음으로. 은은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가쁜 숨을 고른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음과 동시에 다시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꾸 히죽히죽 웃음이 나고 괜스레 안심이 되는 건, 분명 저기 저 앞에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존재 때문이리라.
“오라버니.”
열 걸음 아니, 스무 걸음도 더 될 것 같은 거리를 두고 은은 작게 그를 불러 보았다. 존재만으로 힘이 되는 사람. 죽어버린 심장을 다시 뛸 수도 있게 할 사람. 먼발치의 우겸 역시 그런 은은 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를 믿지 못했어요.”
들리지도 않을 그를 향해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던 저를 탓하며 용서를 구했다. 우겸 역시 그런 은의 말을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다. 단 한 걸음도 은에게 가까워지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거리가 아니더라도 서로가 전보다 훨씬 더 많이 가까워져 있음을.
은은 우울한 표정을 지우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마치 과거의 어느 날처럼, 높이 들어 올린 손을 우겸을 향해 흔들었다. 우겸은 장난스런 얼굴로 한 손을 가슴께에 대고 허리를 굽혀 그 인사에 답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게 마음으로 당부한다. 지금처럼 웃어야 한다고. 이제는 이보다 더 멀리서 서로를 바라봐야만 할지라도.
첫댓글 캬~~~~~~~~~~~우겸이 등장이요!! 잘보고갑니다
절망과절정사이 님★ 우겸이 앞으로 자주 보실 수 있을거예요, 다음화도 확인해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은과 우겸의 만남이 반가우면서도 마지막 말 때문에 가슴이 찡 합니다ㅠㅠ
Tiare★ 님★ 딱 하나의 코드를 찾아내셨군요. 저 역시 가슴이 저릿저릿. 다음화도 지켜봐주세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우겸과 은. 황제. 황후.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도 기대할께요 ~
후안 님★ 가까운 미래에 아주 많은 변화들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저런,, 황후는 이렇게 스러지고 마는 건가요 왠지 안타깝네요. 이젠 은이 활약할 때가 온거군요!! 기대합니다^^ 화이팅~!!
헤르티아 님★ 이제 모든 인물들의 행보를 눈여겨 봐 주시길, 다음화에서 뵐게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이 님★ 은의 입장에서라면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는 궤변일 수 있지 않을까요. 황후를 아끼시는 마음이 너무 다치시지 않길 바래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황후가 안쓰러워요... 미움도, 다툼도 모두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것들을 풀어나가는게 묘미 아니겠어요.
유리별미곰 님★ 유리별미곰 님은 언제나 평화주의셔서 가끔은 이런 내용들이 외려 죄송스레 느껴질 때 마저 있어요. 그럼에도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