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3 / 양을 잘 아는 목자이신 예수님
(요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을 고치십니다. 눈뜬 사람은 한 가지 아는 것을 붙잡고 핍박 중에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출교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켜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목자들로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사람이 진정한 목자인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달리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2절 이스라엘은 마을에 하나씩 공동 우리가 있습니다. 이 우리는 3m정도의 담이 쳐져 있고 문지기는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목자들은 양들을 이끌고 문으로 당당히 들어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어줍니다. 여러 목자들이 한곳에 양들을 섞어둡니다.
목자가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절도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문지기가 그는 모르는 사람이므로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담을 넘어오거나 개구멍으로 들어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편법을 많이 씁니다. 이들은 들어와서 양들을 자루에 넣거나 죽여서 훔쳐 갑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절도요 강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문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하신 문은 어떤 문입니까?
마태복음 7장 13,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나님이 정하신 문은 십자가의 좁은 문이요, 십계명의 문입니다. 그 문은 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 문은 자기가 죽어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올 때 좁은 문으로 나옵니다. 그 문으로 나오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문을 거쳐서 나올 때 나비는 힘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나비가 나올 때 번데기의 입구를 잘라서 문을 넓혀주면 그 나비는 힘을 읽고 조금 날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문으로 가십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수치의 길입니다. 처자와 형제도 버릴 수 있는 각오를 해야 하는 길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길로 가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이 좁은 길로 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피를 흘려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면 양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 자신도 생명을 얻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지 않은 문으로 갑니다. 그 문은 십자가 없는 넓은 문입니다. 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도 넓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길로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희생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최종에는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단들이 가는 길입니다.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 우리 안에는 여러 집의 양들이 섞여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와서 각각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서 인도하여 냅니다. 목자와 양은 깊은 사랑의 관계로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유치원에 자녀를 맡기고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러 갑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엄마의 발소리 목소리를 잘 압니다. 목자와 양은 서로를 알기 때문에 다른 집의 양들과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양들은 각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점 있는 양은 점박이, 눈이 큰 양은 왕눈이, 맘 착한 양은 온순이, 싸움 잘하는 양은 투쟁이, 소망이 가득한 양은 소망이, 기쁨이 충만한 양은 조이라고 이름을 지어줍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알아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각각 불러서 인도하여 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약점, 장점과 특기를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십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을 인격적으로 압니다. 목자는 양이 양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압니다. 주님은 니고데모, 사마리아인, 38년 병자나 소경을 아시고 각자 인격적으로 돕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사울은 여러 번 다윗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불레셋 가드왕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죽음과의 거리가 한 걸음 사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처지를 아시고 그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게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인도하신 목자 여호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39편 1-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을 보았을 때 이는 참 이스라엘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보았을 때 그가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또 다른 사람과 살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가 만족함이 없이 사시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보셨을 때 그의 병이 벌써 오랜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뜬 사람이 쫓겨난 것을 아시고 그를 찾아가 도우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이 죽은 후에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아시고 마리아야 부르시고 부활하신 자기의 몸을 보여주시며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시고 불러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