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시계 / 박경주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라도Rado’란 앙증맞은 손목시계를 사주셨다. 가는 체인에 손톱보다 조금 큰 얼굴을 한 시계였다. 어찌나 좋았던지. 시계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라도 시계는 종일 내 손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본 아버지는 쓸쓸히 웃었다. “나중엔 좋은 걸 사 주마.”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까. 체육수업을 마치고 운동장 수돗가에 잠깐 풀어둔 시계를 영영 잃게 될 줄이야. 뒤늦데 그곳을 찾았지만 시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슬픈 얼굴을 한 시계가 내 눈앞에 자꾸 어른댔다. 가슴이 쓰렸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나를 위로하셨다. “괜찮다, 괜찮아.” 사실은 종고 시계를 샀던 것이니 괜찮다고. 이참에 월급을 받아 새 걸로 사주마고 하셨다. 그 후 내 손목을 찾았던 시계들은 꽤 여럿이었지만, 중고품이라던 그 첫 시계만큼 또렷이 기억나는 건 없다.
지금 내 경대 속에는 남편의 롤렉스 시계가 멈춰선 채 긴 잠을 자고 있다.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자동 시계다. 가끔 서랍을 열 때 그 시계를 마주치게 되면 타계한 남편 생각보단 궁핍했던 아버지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많지 않은 월급으로 일생 병마와 싸우면서 가족을 부양하느라 고생했던 아버지. 내가 결혼을 앞뒀던 그 시절.
“네 신랑 결혼시계는 그냥 오메가로 하자. 그것도 좋다.”
“싫어.”
“시계가 시간만 잘 맞음 됐지. 로렉스 소용없어. 아버지 시계는 세이콘데도 시간이 어찌나 잘 맞는지, 고장 좀 났으면 좋겠더라.”
“싫다고. 난 새언니들처럼 일류가 아니고 이류인가, 뭐.”
“….”
아버진 내가 이류라는 말을 꺼내자 더 이상 오메가를 권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마음에 걸리셨던 거다. 위로 두 오빠들은 결혼 시계로 죄다 롤렉스 시계를 받은 터였다. 그땐 부잣집에서는 신랑에게 롤렉스를 혼인 예물로 주었다. 내 남편 될 사람만 그걸 갖지 못한다면? 왜 그랬을까. 나는 그게 자존심 상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매일처럼 시내 시계점들로 출퇴근을 하다시피 했다. 사위될 사람에게 줄 그 비싼 롤렉스 시계를 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경주야, 로렉스 시계다.”
퇴근한 나에게 아버지는 거창한 상자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롤렉스 시계를 꺼내 가만가만 보여주었다. 기뻤다. 나는 아버지를 껴안았다. 껴안고 볼을 비볐다.
결혼식이 끝나자 남편은 그 시계를 식탁 위에 두고 저렴한 시계를 사서 차고 다녔다. 잃어버릴까봐 차고 다니기 부담스럽다고 했다.
“엄마, 이서방은 로렉스 시계 차지도 않는데, 괜히 비싼 걸 샀나봐. 잘못한 거 같아. 아버지 돈도 없는데.”
“아니다. 아버지는 그 시계 때문에 늘 마음 아파해야. 그 시계가 사실은 중고품이였어야. 아버지가 시계방에 쫓아다니다 새 거 같은 중고를 구했어야. 아버지 실력으로 그 비싼 로렉스 시계를 살 수가 없었어.”
“….”
살기는 갈수록 팍팍해지고, 내 자식의 집을 전세도 아닌 월세를 구한다고 온종일 돌아다니다 보니, 그 옛날 롤렉스 시계를 사기 위해 광주 시내를 헤매고 다녔을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이 비로소 떠오른다. 가난했던 아버지가 내게 준 정성, 두 개의 중고 시계가 오늘 내 마음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