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를 서기 위해
과거를 깨끗이 닦아 봉투에 넣고
전철을 탔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는 노부부의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다
키가 아주 큰 남편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키가 아주 작은 아내의 말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초등학교 일 학년 학동 같다
그렇다, 부부란 키를 맞추는 것이다
키를 맞추듯 생각도 맞추고
꿈도 맞추고
목적지도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내릴 역에 다다르면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
말없이 함께 내리는 것이다
-『동아일보/나민애의 詩가 깃든 삶』2023.04.29. -
3월의 대학교 교정은 파릇파릇하다. 초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파릇파릇하다. 새싹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도 낭랑하게 떠드는 것을 듣고 있자면 흐뭇해진다. 화제 중에서도 연애 이야기가 나오면 톤이 높아지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나도 연애하고 싶다는 푸념이라든가 누구한테 관심 있다는 이야기까지, 청춘의 3월은 흥미진진하다. 사랑하기 좋은 계절,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싶다.
이 시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주례를 설 만큼 나이가 지긋한 시인이 지나가다 목격한 부부 이야기만 나온다. 노부부는 서로에게 키를 맞추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단히 화려한 장면도 아니고 눈에 확 들어오는 결정적 장면도 아니지만 시인은 거기서 사랑의 정수를 찾아낸다. 저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에게 맞추는 마음이 사랑이구나. ‘우리 지금 사랑에 빠졌어요’ 하는 의식이 없이도 노부부는 평생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했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렇게 살면 얼마나 성공적일까. 크게 부자가 된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이 부럽지 않다. 저 노부부의 사랑만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