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명동의 문화적 랜드마크 ‘시공관’
옛 명동 국립극장 건물을 복원해 2009년 다시 문을 명동예술극장 전경. 뉴시스
명동을 명동답게 만드는 장소는 어디일까? 현재의 대중이 명동에 나갈 때 명동 거리를 걸으며 번화가의 분위기를 맛보는 곳이 명동거리이니 명동입구에서 명동성당으로 이어지는 명동거리가 가장 명동다운 장소일 것이다.
이 명동거리는 지금에 보면 강남 최신 유행의 거리인 가로수길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통금이 존재하던 1970년대 말까지 연말의 크리스마스가 되면 해제되는 통금해제라는 일탈의 시공간을 맛보기 위해 몇 십만의 인파가 몰려들어 스스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인파에 떠밀려 다녔던 욕망의 거리였다.
명동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던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에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기적적인 건물일 것이다. 꼭 두 건물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명동성당과 현재 명동예술극장으로 재탄생한 ‘시공관’ 또는 ‘국립극장’이라고 불렸던 건물이다.
설령 기적으로 살아남았더라도 북한군이 패주하면서 종로의 YMCA, 광화문의 광화문우체국과 같은 공공건물은 일부러 파괴해버렸는데 명동성당과 시공관은 종교, 문화시설이었기 때문에 바쁜 와중에 참화를 면한 듯하다.
명동 입구 좌측에 자리 잡은 시공관은 명동성당의 위용에 가려져 사람들이 건물의 가치와 매력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건물의 구조를 잘 보면 건물의 정면이 도로에 면한 쪽이 아니고 건물의 모서리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네거리의 중요 건물의 입구를 모서리에 만들어 건물의 집중력을 더욱 높였던 일본의 건물양식이기 때문이다.
1층에 위치한 입구는 모서리부분과 양옆에도 존재한다. 1층과 2층의 구분은 마치 띠를 두르듯 연결된 처마로 구분된다. 2층에 위치한 전면부는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하여 비교적 단순하게 장식된 나머지 부분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물 전체를 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창문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다. 2층의 전면부에는 사각형과 타원형의 창문이 있고, 2층의 측면부에는 기다란 창문과 짧은 창문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1층에는 정사각형의 입구들이 건물을 돌아가며 위치하여 2층의 각종 창문들과 시각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창문과 입구의 다양한 변주곡이 이 건물의 매력이다.
이런 건물은 언제 누가 어떤 용도로 건립했을까? 시공관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일본 다마다 건축사무소의 이시바시가 영화전용관으로 건립한 바로크 양식의 영화관으로 당시에는 명치좌라 불렀다. 대지 505평, 건평 749평, 객석 820석의 3층 건물인 만큼 영화관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었다. 개관 당시 인구 40만의 서울에선 명동성당을 제외하고는 가장 웅장한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적산건물인 이 건물을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다툼을 벌이며 일이 시끄러워지자 1950년 서울시가 건물을 접수하여 시공관이란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공관은 서울시민들을 위한 무대장소로 연극, 음악회 등 모든 예술행사는 물론 대중문화 공연도 담당하게 되었다.
가수 현인이 ‘신라의 달밤’을 시공관에서 처음 불렀고, 1950년대 초반 가수 윤복희가 7세의 어린 나이로 이곳 무대에서 데뷔했다. 또한 광복 이후에는 가수 김정구와 고복수의 은퇴공연, 코미디언 김희갑이 시공관에서 공연을 가졌다. 역사적 내한 공연이 열린 곳도 시공관이었다. 미국의 여자 가스펠 가수 마리안 앤더슨이 1953년에 영혼의 소리를 들려줬다. 미국 최고 재즈음악인 중 한 명인 매크 티가든과 그의 6인조 악단이 1959년 시공관에서 공연을 가졌다.
환도 이후 시공관은 1950년 4월 국립극장으로 지정되면서 내부수리 등 새로 단장하는 대공사를 끝마쳤다. 한데 비만 좀 많이 오면 무대 쪽에서 빗물이 스며들었다. 다시 무대 쪽의 천장 내부를 뜯고 보아도 빗물이 스며드는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구인가 6·25전에 무대에서 실탄사격을 했었다는 말을 했다. 외부천장을 다시 뜯고 면밀한 조사를 한 끝에 총상을 입은 흔적을 발견하고 본격적인 수리를 했다. 극장이 총상을 입었을 때의 내막은 이렇다.
1950년 1월 KBS 직속으로 방송문화사가 설립됐다. 첫 사업으로 4월에 명동 국제극장에서 ‘10용사’라는 음악극 형식의 매머드 무대를 올렸다. 연극인 김동원, 이해랑을 위시해 인기가수, 연극배우, 합창 등 당시의 일급연예인들이 총출연한 무대였다. ‘10용사’는 6·25전에 38선에서 자주 일어났던 북한군과의 충돌사건 중 전투실화를 무대에서 재현한 작품이었다.
무대의 전투장면에서 총격전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무대 뒤 한구석에는 육군의 일개분대가 동원됐다. 이들은 실제 카빈과 M1 소총을 천장을 향해 쏘아댔다. 그것도 하루 공연이 낮과 밤 2회였다. 5일간 공연을 하며 천장에다 총을 쏘았으니 벌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포탄이라는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인지 예술작품을 향한 열정이었는지 알기 힘들다.
시공관이 위치한 곳이 문화의 중심지 명동이고 바로 근처 종로 일대가 정치의 중심지였으니 자연히 시공관은 정치행사의 중요한 장소로도 활용됐다. 광복 이후에는 정치주먹들의 충돌로 인해 김두한이 구속된 이른바 '시공관 사건'이 벌어졌다. 1956년 9월에는 시공관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대회 도중에 장면 당시 3대 부통령이 권총피격을 당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1960년 4·19를 앞두고 행해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데모도 시공관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투표일을 이틀 앞둔 3월 13일 낮 12시쯤 서울시내에서는 곳곳에서 공명선거를 외치는 남녀고등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이날 12시 정각 마침 민주당 서울시 당확대대회가 열리고 있던 시공관 3층 창구에서 한 학생이 로프를 타고 2층 발코니로 뛰어내렸다. 그는 공명선거를 호소하는 내용이 적힌 띠를 한쪽 어깨에 메고 ‘백가지 공약보다 아쉬운 공명선거’라고 붉은 연필로 쓴 100여 장의 삐라를 뿌리는 한편 ‘학원자유를 달라’는 피로 쓴 플래카드를 펼쳐들었다.
그 후 곧 사복경찰과 시공관 직원이 그를 뒤쫓았다. 약 5분간 발코니 위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과 행인들이 쳐다보는 가운데서 추격전이 펼쳐졌다. 그 사이에 플래카드, 삐라 등은 모두 미리 배치되었던 경관과 교사들에게 압수되고 그 학생은 마침내 붙들려갔다. 현장에는 경찰청 간부가 즉시 출동했다. 수십 명의 방망이 든 순경이 증파돼 모였던 학생들을 강제해산시켰다.
이 시공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국립극장으로서의 역사이다. 그 역사가 기구하다. 해방이 되면서 1949년부터 국립극장은 현재에 태평로에 있는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부민관이었다. 그러나 부민관이 국회의사당 건물로 사용되면서 시공관을 국립극장으로 지정했다. 극작가 유치진을 초대관장으로 임명, 1950년 4월 29일 개관식을 열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국립극장은 개관한 지 57일 만에 휴관하게 된다. 1952년 대구에서 문화극장을 접수하여 국립극장으로 쓰다가 끝나고 환도하여 1957년 6월 1일 시공관을 서울시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다시 국립극장이 시공관에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는 서항석을 2대 단장으로 하여 신협과 민극이라는 두 개의 전속극단을 국립극장 내에 두고 연극공연을 위주로 운영되었다.
시공관이 국립극장으로서 본격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계기는 1961년 11월 세종로에 대중문화의 전당인 시민회관이 개관하면서 찾아왔다. 그동안 한 건물을 시공관이라는 대중문화공연장과 국립극장이라는 순수예술 공연장으로 동시에 사용해오던 불편에서 벗어나기 위해 1961년 12월부터 우선 열악한 시설의 개·보수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총공사비 1억8000만 환으로 좌석을 안락의자로 바꾸고, 무대를 종전보다 20평을 더 넓혀 전동식 회전무대로 했다. 무선마이크 3대를 완비하고 무대막과 무대바닥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샤워실, 무대효과실, 음악효과실을 갖추고, 휴게실을 대폭 늘렸다. 로비는 벽화와 예술작품으로 장식하여 국립극장다운 존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10년이 넘게 바닥에 달라붙은 껌을 세 양동이 분량이나 제거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예술단체도 기존의 국립극단에다가 국립오페라단, 국립국극단, 국립무용단 등 3개의 단체를 추가하여 1962년 3월 21일 국립극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재개관하였다.
그런데 이런 대대적인 보수작업에 냉난방시설의 완비도 계획되어 있었지만 결국 갖추어지지 못한 채로 개관되어 이후에 두고두고 국립극장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된다. 가장 더운 여름의 7, 8월과 겨울의 12, 1월에는 공연을 하지 못하고 문을 닫아둘 수밖에 없었다.
11월이 되면 청중은 겨울옷으로 중무장을 해야 했고, 출연자들이 쉬는 무대 뒤의 분장실은 더욱 추운 곳이어서 고문을 기다리는 대기실과 같은 곳이었다. 한 번은 영국의 피아니스트가 너무 추워서 밍크코트를 입고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추위에 못 견뎌 외국인들은 공연 도중에 자리를 뜨곤 하여 한국인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런 평판을 부채질한 것은 정부의 국립극장에 대한 인색한 지원이었다. 야심차게 재개관을 하고 기념공연까지 했지만 그 이후에 예산이 소진되어 공연기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상의 뒷받침 없이 서둘러 발족한 국립극단을 제외한 세 개의 전속극단은 월급도 주지 못했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던 국립극장은 새로운 국립극장이 1973년 10월 장충동에 들어서자 예술극장으로 존속했으나 결국 정부는 새로운 국립극장 건립의 비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민간에게 매각을 시도하여 1975년 대한종합금융이 극장건물을 매입함으로써 극장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되고 시공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970년대까지 유행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명동은 1980년대 들어서서 강남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그 중심이 강남으로 이동하였다. 명동은 과거의 영광을 상실하고 따라서 상권도 쇠퇴해갔다. 이렇게 찾아든 명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시공관의 부활이 떠올랐다.
명동에서 문화의 중심이었던 시공관을 되살려 다시 공연장으로서 기능을 회복시켜 명동에 문화의 숨결을 불어넣어 명동을 부활시키자는 운동이 명동상가번영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시공관은 2009년 5월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선택은 참으로 현명하고 문화적이다. 명동의 초입을 명동예술극장이라는 문화적 인프라가 시작해주고 마무리는 명동의 끝에 있는 성찰과 참여의 공간인 종교시설 명동성당이 해주고 있으니 명동의 기운이 제대로 모아지는 형국을 띠고 있다. 문화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과거에 국립극장은 국가가 운영해도 그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문화의 가치를 이해하게 된 현재는 국가가 아니라 민간이 나서고 국가가 뒤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공연장을 복원했다. 민간의 힘으로 문화를 살려내고, 상권을 살리고, 강북을 살리고 있다. 이것은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민간과 국가가, 상인과 예술가가 어떻게 상호협력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김형찬 / 대중음악평론가
첫댓글 명동예술극장 의 역사
잘 보았습니다
시공관.
말은 많이 들었는데 ...
이 건물인 줄은 몰랐네요
명동은 내 젊은날의 추억이
많이 배어있는곳....
지금은 너무 상업적인 거리로
탈바꿈한 명동이 생소하게 느껴지네요
가끔씩, 지나면서 명동 국립극장은
그렇게 지난 세월의 모습으로만
남아있는가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예술극장으로 태어났으니
많은 공연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번 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