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云南 최초의 고대왕국 남조의 大理王国
쿤밍(昆明)에서 바이족의 고도(古都) 따리고청(大理古城)이나, 나시족의 리 장 고청(丽江古城) 그리고 장족들의 샹 그리-라(香格里啦) 더 윗쪽의 매리설산등 윈 난성북부지역으로 트레킹을 계획하셨다면 쿤밍시내에서 가까운 석림(石林)세계자연문화유산 풍경지구나 윈난 소수민속촌 관람을 하고 밤 열차를 이용하면 효과적인 여행을 할 수 도 있습니다.
쿤밍역 앞 고속버스터미널 혹은 외각의 북부터미널에서 따리고청(下关)까지는 330여km로 약 5시간이 소요되며 리장(丽江)이 종점인 기차는 8~9시간 가량 소요된다. 쿤밍역에서 열차는 연휴를 맞아 밀려더는 트레커들로 자석이 매진되어 고속버스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역에서 가까운 터미널로 갔더니 16시 이후 다리로 가는 버스는 외곽의 북부터미널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시내에서 북부터미널을 연결하는 셔틀을 타고 30여분을 달려 북부터미널에 도착했다. 창구로 달려가 다리행 고속버스를 문의하니 샤관행이 곧 출발한다는데 왠 샤관이냐? 다리와 샤관이 동일지역이라는데 처음 들어본 지명이 영 불안하다. 우여곡절 끝에 18시에 출발한 고속버스를 타긴했는데 비가내려 밤 12시가 지난후에 샤관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바깥으로 나오긴 했지만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깜깜한 밤중에 이름도 생소한 도시 감이 잡힐리가 없다.. 터덜터덜 도로를 따라 걸었다. 북쪽인지 남쪽인지 알길은 없다. 얼마를 걷다보니 주차장 안쪽에 허름한 초대소간판이 보였다. 일단은 들어가보자 쫒겨나면 할 수 없고 광시 난닝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다.
다리고청으로 가는 정석은 역전광장에서 출발는 8호선 버스를 타고 샤관(下关)시내를 벗어나 얼 하이 호수를 바라보며 30여분이면 고청에 도착하니 택시를 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주인에게 간단한 정보를 얻어 역전으로 가지 않고 건설로(建設路) 신양시장을 찾아 걸었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버스를기다리는데 배낭을 멘 트레커가 고청가느냐며 말을 건냈다.
뒤따라 도착한 버스에 올라 투입구에 요금을 넣어려니 이사람 친절하게도 5마오(五角)만 넣어라 했다. 뭐야? 아침부터 횡재를 한건가? 요금함에 5마오를 넣자 자기는 1元을 넣고 안쪽으로 들어가고 기사는 2元을 더 내라고 했다.
뭐야 ? 투입구에 2元을 넣고 자리에 앉아 생각해보니 자기는 1元내고 나가 자기요금을 대납한 셈이네. 아침부터 들러리서셨구먼. 에이~ 잔돈이 없었겠지?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참된 스승은 길에서도 만나고 많은 인연도 오가는 길에서 맺어져 이를 교통(交通)이라 하지 않습니까?
고청 시문(西门) 종점에 내려 성루(城樓)를 넘어 안으로 들어서니`삼장법사는` 탁발을 나셨나 안뵈시고 손 우 쿵(孙五空) 주 빠 지에(猪八介) 쓰 우팅(四五停) 등 삼총사 모델들만 변함없는 분장으로 손님맞이에 분주하고 고청 문루(门樓)의 고색찬연한 건물들은 군데군데 부식되고 단청은 퇴락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과거로 회귀한듯 성내의 골목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옛 따리 국(大理国)선조들의 지혜도 감상하고 소수민족인 바이족의 전통별미를 맛보는데 아주머니가 백설기를 팔고있다. 어~어 백설기는 우리떡이 아니었나? 그럼 바이 족이나 이족들이 옛날 옛적에는 우리와 피를나눈 형제들이었을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중에 우리와 동일한 뜻을 나타내는 말들도 많이있다..
고청관람을 마치고 싼 따 루(三塔路)로 올라 시민걷기대회에 참여하듯 많은 트래커들과 이십여분을 걸어 충성사에 도착했다. 성문밖에선 아주머니들이 숙박객을 잡기위한 호객행위에 여념없고, 흐이차(黑车)기사들은 자기차를 이용하라며 몰려들고 암표장수도 입장료 25프로 DC 를 내걸고 접근하고 있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의 완만한 언덕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싼 타(三塔)탑 삼형제가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다. 승가 안밖은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모두들 관광을 왔으니 기념으로 기념사진도 찍어야하고, 조용해야 할 천년가람은 몰려드는 인파로 여느 풍물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번 방문 때 사찰내부는 관람을 했기에 거금을 지불해가며 두 번씩 보는것도 그렇고, 단지 사찰 이름이 헷갈렸는데 충성사(崇圣寺)로 의문도 풀렸다. 완만한 사찰중턱에 4각형으로 기단을 쌓고 위로는 원형에 가까운 팔각형으로 50여m 높이의 황토색 탑이 솟아있고, 약간 뒤쪽 좌우로 8각형의 같은 높이의 탑이 두 개더 세워져 이를 삼 탑이라 부르고 전체적인 구도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1963년 중국국가문물국 제1호 지정문화재로 보호하고 있으며 대웅전을 지나 윗쪽으로 전각(殿閣)에는 유명고승들을 청동형상으로 주조하여 모셔져있는데, 중국불교를 꽃피우고 충성사를 중흥시킨 범상치않는 고승(高僧)들이었나 봅니다.
사찰을 둘러친 돌담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담넘어 경내에는 세탁소도 있고 보일러실도 있고 호텔도 있고 식당도 있다. 이렇게 좋은 세월에 절이라고 손으로 빨래를 하겠는가? 식당도 있고 호텔도 있으니 두루두루 공용으로 쓰이겠지?
허난 성 샤오 린 쓰(小林寺) 주지스님 미국 하버드대 mba를 나와 사찰에 경영학을 도입하여 제약회사도 설립하고, 무술 학교도 운영하고, 식품회사를 만들고 이외 여러사업체를 경영하여, 예전처럼 신도들의 시주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을 넘어 그룹으로 변모하는 중국불교의 현실입니다.
하이 난도(海南島)의 유명 사찰인 난싼 쓰(南山寺)는 뉴욕의 자유의여신상보다 더 큰 해수관음상을 세워놓고 관광객들의 입장료와 신도들의 시주돈이 하루 수십만금이 들어온다고 한다. 전국의 유명사찰들은 이재(利財)에도 탁월한 현실이라 충성사에도 국내외 고명한 스님들이나 명망가들의 교류(交流)가 빈번할 테니 호텔을 운영하는 것이 방문객의 접대에도 효율적이고 수익면에서도 일거양득일 것이다.
언덕을 올라 사찰을 둘러싼 돌담길을 한바퀴 돌아 반대편으로 내려오려니 중턱에서 금단의 땅인양 철조망으로 가로막아 더 이상 출입이 불가능했다. 발길을 돌려 광장으로 내려와 호수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아름드리 대리석(大理石)돌기둥 수십여 개를 높이세워 불교경전을 새겨넣고 석림(石林)을 조성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광장에는 연화문을 비롯한 관음상을 조각한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
일주문옆 화단에는 자연석에 불교도시(佛都)라는 비문을 세겨 놓았는데, 애석하게도 현실의 따리는 불교보다는 이슬람이 번성해 길거리에서 머리에 흰 모자를 올려 쓴 무슬림을 흔하게 볼 수 있고 매일 수차례씩 행해지는 기도시간이면 `알라 아크바아르` 를 외치는 방송이 온시가지에 울려퍼지고 군데군데 회교도들만 모여사는 집성촌이 존재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국태민안(国太民安)을 근간으로 불교를 숭상했지만, 근래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 중흥을 꾀하는 모습이 진화하는 현대종교의 다양성의 소산이리라. 후한(后汉)시대 명제(明帝)는 꿈에 금빛을 두른 부처님을 알현한 후, 부처님의 불경(佛經)을 구하기 위해 사신 채 흠과 승려 법란(法兰)을 신독국(印度)으로 파견을 하는데---.
채흠일행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신독으로 가던도중 중앙아시아 대월지국(大月氏国)에서, 신독국 고승 축법 란(竺法兰)과 가섭마등[伽涉眠] 등 두 고승을 만나, 그들과 함께 불교경전과 불상을싣고 낙양으로 돌아온 후 명황제는 중국최초의 승가인 백마사(白马寺)를 창건했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당나라 이후 근대무신론(無神論)의 지평을 넘어 불교국가였던 시대로 회기한 듯 손오 공 저팔계와 함께 서유기를 남기며 인도로 건너가 부처님의 불법을 구해오신 당승(唐僧)삼장법사께서 현실불교의 단면을 보신다면 얼마나 흡족해 하실까?
여러 형태의 조형물을 감상하며 노란유체꽃 만발한 밭이랑을 따라 구(久)길로 내려오면 얼 하이(耳海)선착장이 나온다. 중국지도에도 나오는 따리와 샤관에 걸쳐있는 귀를 닮은(耳河)얼 하이 호수를 바다가 없는 내륙인들은 애착을 가지고 해마다 서핑대회나 요트경주를 개최하며 국제적인 해양스포츠제전도 거행한다.
그밖에 여러가지 위락시설을 갖춰 관광객을 맞이하고 호수주변 곳곳에는 민물고기를 양식하여 갖가지 종류의 물고기가 시중에 유통되고 따리에 오시면 우리 입맛에 딱 맞는 얼큰한 매운탕을 맛보는 것도 여행과 더불어 식도락의 즐거움도 있습니다.
따리 주(州) 바 이족(白族) 원주민들이 호수에 유람선을 띄워, 선상(船上)에서 지역특산의 차(茶)를 팔며 시음회도 곁들이는데, 여러 종류의 차를 싼 뻬이(三盃)라 하여 종류별로 석잔씩을 마시게하고, 춤과 노래로 여흥을 돋우며 호수를 돌아오는 낭만적인 코스도 있습니다.
바이 족 마을에서 음식을 맛보면 얼큰하고 매운맛이 우리입맛과 흡사하며 정말 일미입니다. 친분이 쌓이면 먹던 수저로 반찬이며 음식물을 이것저것 밥그릇위에 올려주어 좀 그렇기는 하지만, 손님을 대접하는 열정(熱情)은 우리 할머님 어머님의 심성이 그대로 묻어나고, 음식솜씨를 한번 맛보면 다시가고 싶어지는 곳이도 합니다.
상업이나 공공업무지구는 샤관에 몰려있고 행정구역상 따리시가 대외적인 명칭이며 소수민족인 바 이족자치주(自治州)다. 우리에게 대리석(大理石)으로 잘 알려진 다양한 문양을 갖춘 대리석의 원조이며 창산(蒼山)은 국가지질공원(地質公園)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있으며, 창산을 오르는 싼 위에 자(三月街)등신로는 연중 산을찾는 트레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도시의 행정이나 상업의 중심축은 샤관(下關)으로 대부분의 공공건물이 상주하고, 교통의 요충지로서 남으로는 쿤밍을 거쳐 광시 성이나, 귀주 성 등으로 통하고, 동으로는 딴지화를 지나 서촨성, 서쪽은 바 오산(寶山)을 거처 미얀마로 통하는 국경요충지이고 북으로는 리 장, 상 그 리-라, 더 칭(德慶)을 거쳐 쓰촨 성이나 티베트의 라사까지 연결된 차마고도의 대동맥이다.
주변 고산(高山)지역 중소도시에 광산장비나 생필품을 공급하는 도매시장이 발달되어 있으며 관광이나 교통의 주요 거점답게 버스터미널이 다섯 곳이나 산재해있다. “삼국연의“(三國志)의 초나라 군사(軍師)주걸 량에게 늘 당하기만 하던 칠종칠금의 이(夷)족 수장 멍 획의 본거지였던 남만과도 멀지 않으며, 마침 집주인이 이족이라 했는데 멍 획의 후예일까?
따리지방은 4,290m 높이의 창산으로 둘러쌓인 분지속에 고색 창연한 고대유적과 왕실사원인 충성사 중국보물 1호인 삼탑(三塔)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3번째로 큰 호수 그리고 해발 2.000여 M 높이에 연평균 기온이 섭씨 17도 C의 아열대성 기후로 호수 주변 수려한 지역에 별장이 산재하고 불교와 기독교와 회교도가 공존하는 매력이 물씬 풍겨나는 고도(古都) 춘청(春城)입니다.
따리왕국 에필로그
남조(南詔)는 당나라 때 티베트 버마족이 지금의 윈난(雲南) 지방에 세운 왕국이다. 조(詔)란 왕(王)의 뜻이다. 강력한 세력으로 몽수(蒙嶲)·월석(越析)·시랑(施浪)·등섬(邆賧)·낭궁(浪穹)·몽사(蒙舍) 등의 6조(六詔國)를 통합하여 윈난(云南)지역을 장악한 후 738년 남조(南詔)를 건국했다. 남조는 9세기에 수도를 따리(大理)로 옮겼다.
남조(南詔)의 후신으로 따리왕국 (937~ 1254)을 건국한 태조(太祖) 단사 평(段思平)은 타이 족의 후예로 대대로 따리지방 바 이족(白族) 부장으로 남조왕국(南詔)의 중신이었다. 937년 단사 평은 남조를 무너뜨리고 따리왕국을 세운 후 남조문화를 계승하여 바 이족(白滿)을 중심으로 찬란한 불교문화를 개화(开花시켰다.
당나라 이래 대대로 송나라의 제후국이기는 하였으나 교류는 거의 없었으며 태평성대를 누려오다 1094년 권신 고승태(高昇泰)가 권력을 잡고 왕위를 찬탈해 국호를 대중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상치(上治)로 바꿨으나 1095년 병으로 쓰러져 단정순에게 왕위를 반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얼마 후 고승태가 죽고 왕권은 다시 원래 왕조에 되돌아갔으나 실권자 고씨가 대대로 재상이 되어 권력을 행사함으로 단씨왕조는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는데 그쳤다. 단씨에게 왕권이 되돌아간 뒤를 후 따리 국(后大理)이라 부른다.
송나라 (宋代) 시대 3세기를 거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태평성대를 누려오다 1254년 몽골제국 친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말발굽아래 왕조는 무릅을 꿇고 22대를 끝으로 317년 만에 사직(祠稷)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따리의 영토는 원나라 세조의 서자가 다스리는 운남 왕국의 영토로 계승되었다.
马艸
첫댓글 저도 운남성쪽에 안가본 곳이 아직 많은데 언제나 가보게 될런지요..좋은 글 감사합니다.
운남에서 트레킹을 하며 6개월을 머물렀는데도 아직도 가야 할곳 둘러 볼 곳이 많습니다.
따리 고성을 잘 구경했습니다. 사진을 정말 잘 찍으셨네요.
조나단님 사진 실력이 탁월 하시지요? 작가` 김중만 `이 한수 배워야 할듯 합니다.
조나단 님 감사합니다.
멋집니다.
따리고성
그리고 숭경사 쑹징스
장군님!!! 늘 무탈하시지요?
앞으로 상 그리-라. 더 칭 기행문 작성때 장군님의 사진 몆컷 활용하고 싶은데 빈한 한 환경에
저작권료는 불가능 합니다. 그렇지만 동의 해주시겠지요? ㅎㅎㅎ
네 쓰세요~~
여행갈 시간이 없는 제에게 대리만족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운남성 구경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행이란 萬人의 로망으로 좋긴 하지만 때론 다리가 불평을 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발걸음 주심에 보람도 느낍니다. 늘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