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한 정중동
오월이 중순에 접어든 둘째 화요일이다. 어제부터 살고 있는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는 관계로 집을 비워두고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세간 가운데 내구연한이 지났거나 불요불급한 것들은 과감하게 폐기시키고 다시 살려 쓸 살림들만 현관 바깥 비상계단으로 옮겨 놓았다. 간단한 취사도구와 침구류만 챙겨 동네에서 멀지 않은 사림동 주택지에 공실 원룸을 거소로 정해 지내게 되었다.
시공 첫날 저녁 리모델링 현장을 찾아가니 인부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철수해 아파트 내부는 전쟁으로 폭격을 맞은 집 같았다. 그런 와중에 인터넷이 연결되는 컴퓨터를 켜 뉴스를 검색하고 하루를 보낸 일정을 ‘임시 거처를 정해’라는 글로 남겼다. 이후 스무날 지내기로 한 사림동 원룸으로 돌아가 고단한 몸을 눕혀 잠을 청해도 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새날 새벽을 맞았다.
평소보다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딱히 어디로 산행을 나서거나 강둑으로 트레킹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파트 리모델링이 진행 중인 현장에서는 도울 일이 없었다만, 그렇다고 나는 모른다며 외면하고 있을 입장도 아니었다. 일단 비상 연락이라도 오면 즉시 출두 가능한 근접 거리에 있을 심산이었다. 그런 선택지 가운데 한 곳이 사파동 축구센터 곁 시청 공한지 텃밭이었다.
지난 주 그 자리 텃밭을 일구는 벗으로부터 이웃에서 경작하던 노인이 힘이 부쳐 짓지 못하는 밭을 인계 받았다. 내야 텃밭의 필요성이 절박하지 않음에도 주변의 경작 권유를 뿌리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봄 농사 시기가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묵정밭의 잡초를 뽑고 검불을 치워 채소 모종을 심었다. 가지와 고추에 이어 오이와 토마토를 심고 호박도 몇 구덩이에 심어 놓았다.
채소만 심기는 밭이 넓은지라 다른 작물도 심어야 할 형편이다. 밭이 모두 세 뙈기인데 맨 아래는 푸성귀를 가꾸고, 그 옆자리에 야콘과 참깨를 심을 생각이다. 야콘은 고구마와 같은 덩이뿌리로 중남미가 원산지인 여러해살이인데 우리나라에선 한해살이다. 먼저 텃밭을 가꾸는 벗이 모종에 해당하는 뇌두를 챙겨주어 고마웠다. 멧돼지가 덮치지 않아 고구마보다 경작이 수월했다.
아침나절 사파동 축구센터 곁 언덕으로 올라 엊그제 채소 모종을 심어 놓은 옆 자리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며칠 전 잡초를 뽑아둔 검불을 치우고 야콘을 심을 이랑을 짓고 벗이 보내준 뇌두의 순을 정성스레 심고 수분이 부족할까 봐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와 뿌려주었다. 얼떨결에 텃밭을 인수받아 퇴비나 거름을 준비하지 못해 잡목이 자라는 숲의 부엽토를 긁어와 덮어주었다.
야콘을 심고 나서 넓은 이랑 두둑에 참깨를 심는 일이 기다렸다. 사실 참깨는 푸성귀를 가꾸는 텃밭 농사 수준을 넘어선 전문 농사꾼이라야 지을 수 있는 작물이다. 텃밭 경작을 허락 받은 일자가 가까워 퇴비나 비료를 준비하지 못한 상태라 씨앗을 먼저 심을 요량이었다. 작년에 옥수수를 심었던 비닐 멀칭은 그대로 둔 상태에서 꽃삽으로 구멍을 내어가면서 참깨 씨앗을 심었다.
참깨를 심고 나니 점심때가 늦어져 갔다, 참깨를 심은 밭뙈기 위에 내가 경작할 터가 두 군데가 더 남아 있었다. 며칠 전 무성했던 잡초는 뽑아 놓았다만 삽으로 땅을 일구어 이랑을 지어 모종이나 종자를 심을 예정이다. 한 군데는 고구마 순을 심고 그 위 밭뙈기는 쥐눈이콩을 심을 생각이다. 앞으로 모종 심을 일도 남았지만 퇴비나 비료를 뿌리고 김을 매줄 일도 기다리고 있다.
참깨까지만 심고 남은 터를 일구는 일은 훗날로 미루었다. 텃밭을 내려오니 이웃에서 푸성귀를 가꾸는 중년 부부가 작물을 돌보려고 올라와 인사를 나누었다. 본래 살고 있던 아파트가 아닌 임시 거소로 정한 사림동 원룸으로 향했다. 늦은 점심을 먹었더니 저녁 끼니와 같이 해결된 셈이었다. 원룸의 세탁 사정이 여의치 못해 창원대학 앞으로 진출해 셀프 세탁방을 이용해야 했다. 22.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