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6~10 / 양의 문 이신 예수님
(요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0:10, 개정)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6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좋은 양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양들의 좋은 목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7~8절 예수님은 다시 한번 진실로를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왔지만, 절도요 강도가 아닙니다. 그는 양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로 들어가지 않고 예수님께로 들어가는 자를 막고 있습니다.
먼저 왔다는 것은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앞세우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다는 율법을 앞세우는 자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성전이나 율법은 예수님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성전과 율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자신들의 배만 부르게 하는 자는 삯군이 나옵니다. 지금도 본이 되지 못하고 죄악을 짓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양들은 저 지도자 때문에 나는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것도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님보다 이념이나 교리를 앞세우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율법이나 도덕이나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나 타 종교로 설득하는 자는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것은 앞에 나온 비유와 또 다른 상황입니다. 앞에는 마을에 있는 공동 우리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양들을 이끌고 너무 멀리 나가서 마을의 공동 우리에 들어오지 못할 때를 말합니다. 그때는 돌로 만든 울타리만 있는 우리에 양들을 데리고 갑니다.
목자는 출입구를 가로질러 침구를 놓고 잡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의 문이 됩니다.
목자는 도적이나 사나운 들짐승에서 양들을 보호하는 문이 됩니다. 문은 통로이고 보호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들어가며 나오며 할 수 없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목자를 통과할 때 양들이 다치거나 병들었는지를 살피게 됩니다.
상한 자는 싸매주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다가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사단에서 구원해 주시고 사망 권세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며 나가는 자는 꼴을 얻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자유로운 교제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자유로운 교제를 하며 꼴을 얻습니다. 풍성한 말씀을 얻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살과 피를 참된 양식과 음료로 얻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얻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풍성해지고 다른 양들에게 풍성한 꼴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을 풍성히 얻는다는 것은 생명이 넘쳐난다는 말이고, 성령이 충만해짐을 말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만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풍성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예뻐 보이고 나무도 꽃도 예뻐 보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 잔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목자시니 나의 삶이 풍성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돈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합니다.
능력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편에서 보면 풍성합니다.
우리가 욕심을 가질 때 부족한 것 많지만,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 편에서 보면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장막 생활을 하였고 한 평의 땅도 없었지만, 그는 풍성하게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우리가 풍성하신 예수님을 나의 중심에 모시면 우리의 삶도 풍성해집니다. 예수님은 풍성한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랑도 풍성하고 지혜도 풍성하고 물질도 풍성하고 건강도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내가 가져야 할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깨닫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