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이 한 번 깜박, 했다. 감겨 있는 시간을 조금 늘려서, 또 한 번 깜박, 했다. 그러나 겨울의 처진 듯한 햇살마저 생기를 찾는 오후 1시의 시계는 그대로였고 모니터 앞에 펼쳐진 화면도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내게, 몇 명이나 응모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여행 티켓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운이 빠져 키보드에 올려놓았던 손을 늘어뜨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늘어진 고개가 천장을 바라보고, 밀린 방세가 무서워 주인 집 아줌마에겐 말하지도 못한 빗물 샌 얼룩이 보이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하하, 하하하.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헛웃음을 몇 번이고 토해냈다.
가끔씩 신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시는 모양이다.
집으로 전화를 할까 하다, 부모님이 말리기라도 하면 설득당할 것 같아 대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요란스런 호들갑과 자랑과 부러움의 탄성이 한동안 오고 간 후에, 슬금슬금 걱정이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월세도 두 달치나 밀렸는데, 여행 간다는 건 웃기는 소리 아닐까."
ㅡ월세가 문제야, 지금? 그렇게 일본놈들 나오는 드라마만 보고 있더니, 나 같으면 그 시간들이 아까워서라도 넙죽 받아먹겠다. 어차피 안 간다고 해서 월세 낼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지금 딱 방학 때잖아. 겨울이라서 볼 게 많지도 않겠지만, 일단 일본 땅 공짜로 밟아보는 것만 해도 본전 뽑는 거 아니겠어? 그냥 다녀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친구는 숨쉴 틈도 없이 제 할 말을 쏟아내고 나선 전화를 끊었다. 후회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엔 경고인 양 힘까지 집어넣고서. 사실, 이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다. 아니, 후회할 게 분명하다. 지금 내 처지에 사비로 가는 여행이란 몇 년 동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당장 대학이 눈 앞에 기다리고 있고,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 구하기에 목을 매야 할텐데, 난 현실을 뭉개고 여유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베짱 있는 인간이 아니다.
전화를 끊고, 두 남자의 사진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는 화면 보호기 모드로 들어간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저기.. 이벤트 당첨자인데요. 네, 여행 티켓이요.."
일주일이 이렇게 두근거리면서, 빠르다 싶으면 또 느리게 느껴지도록 지나간 건 처음이었다. 가방은 몇 번이나 쌌다 풀었다를 반복했고, 관광명소는 안내원보다 능숙히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히 검색해 보았다. 혼자 가는 여행에 들떠하다니, 어지간히 혼자 노는 데 익숙해진 모양이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여행은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는 5박 6일의 그럴 듯한 코스였다. 인솔자가 없다는 말에 조금 불안해지긴 했지만, 문제 없다고, 고향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유롭게 여행사 직원에게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날 좀 빨리 보내달라고, 신이 이 별 볼 일 없는 장난감에 질리기 전에 빨리 날 떠나게 해 달라고 속으로 소리를 질러대면서.
공항 라운지에서 마지막으로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여행사 직원을 생글생글 웃으며 돌려 보내고,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야 왠지 모를 초조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순간까지 겁을 먹었던 모양이다. 뭔가 잘못될까봐. 이제 됐다고, 한숨을 내쉬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본어로 이어지는 가사. 흐르는 이 노래들을, 그저 듣기만 해도 뭐라고 하는지 이해하고 싶어서. 나는 그런 바보 같은 이유로 일어를 독학했다. 그리고 그 머리 빈 바보짓의 형벌로, 고등학교 시절 내내 역사 시간마다 가슴을 두근거려야 했다. 날 행복하게 하는 그들이 그 잔인한 역사의 현장들에 직접 서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내려앉는 심장에 저항해 봤지만 차라리 몰랐다면 편했을텐데-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도 편하게 쪽바리 새끼들이라고 욕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미 일본이라는 말이 한국인에게 주는 그 거대한 관념적 덩어리에 묻혀진,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노래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를 깨달아버린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용서할 수 없는 역사를 배웠고 나 역시 그것에 분노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어요. 이 말을 누가 곱게 받아줄까. 아무리 말을 그럴듯하게 한들 애초에 날 깨우치게 한 것이 한낱 아이돌인 이상 비웃음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당해지기 위해선 그들을 버려야 했지만, 하지만 그래도 가까이 가고 싶었다. 한 번쯤은. 그리고 지금이 그 때인 셈이다. 내가 그저 나로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
공항을 나오자마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일본어가 귀를 때렸다. 멍하게, 엽서 뒷면에 박힌 여행 사진을 바라보듯이 쳐다보던 풍경들이 서서히 현실의 모습으로 인식되어 왔다. 바닥을 한 번 툭툭 쳐 보았다. 내가 정말 이 위에 서 있는가, 하면서. 호텔을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공항 앞에 무료 셔틀버스가 대기해 있을 거라고 들었고, 실제로 그랬다. 두리번거리는 게 어쩐지 내키지 않아 똑바로 버스만 보고 걸어가다, 걸음을 멈췄다. 눈을 감았다 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보았다. 두려워하던 것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일탈의 유혹. 저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버리고 싶은 유혹이, 처음 와 본 곳에서 길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이성적 불안감보다 강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기껏 되찾았던 현실감이 또 다시 발 밑으로 새어나가고 있었다. 물거품이 이는 바닷가에 맨발로 섰을 때, 파도가 밀려가는 데 따라 발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멀어져 간 것은 다시 돌아온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물결에 설득당하고, 귀를 스치는 소음들이 막을 씌운 듯 감각을 벗어나면서, 나는 버스가 서 있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백과사전을 넘기듯 천천히, 도쿄의 거리를 떠올렸다. 신주쿠, 하라주쿠, 시부야, 긴자, 에비스, 록본기, 오다이바... 어느 한 군데도 익숙한 곳은 없으므로, 결정 내릴 기준도 없다. 그럼 어디로? 아니, 사실 한 군데가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가본 적 없지만 알고 있는 곳. 고민하는 동안 괜히 기념품점에 들어가 서성이다가 도로 나와, 근처 쇼핑몰로 들어가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면서 돌아다니다 결국 선물이라기엔 어딘가 어색한 물건들만 몇 가지 사서 나왔다. 다행인 건 결심이 섰다는 정도일까. 나는 공항으로 돌아가 셔틀버스를 탔다.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하는, 호텔이 아닌 공항의 버스를.
유리카모메를 타고서ㅡ그 사이 몇 번의 자잘한 실수들은 돌이켜 생각하기엔 부끄러운 일이다ㅡ 멍하니 창문으로 거리를 내다보았다. 이미지. 건물들에 걸린 전광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바다 건너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은 이 곳에서 포장되어 나온 이미지일 뿐이다. 어떻게 보여지고 싶었는지가 반영된 구미에 맞게 맞춰진 이미지. 그 자체가 거짓, 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지는 분명 실체에 바탕을 두고 존재한다. 하지만 본연의 모습은 한 단계 높은 무언가를 추구하며 덧칠되고, 덧칠은 두꺼워져 가면서 껍데기처럼 실체를 단단히 감싸버린다. 내가 단 며칠 만에 그 안에 든 실체를 볼 수 있을까. 아니, 이 길 위의 거리의 가면은 벗겨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ㅡ안다고 생각하는ㅡ그 사람들은? 될 리가 없잖아. 웃었다. 만날 수도 없고, 만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지를 내세울 수 밖에 없다. 그런 위치의 사람들이다. 외면한 버스가 등 뒤에서 슬며서 비웃었다. 기껏 도망쳐 나와놓고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헤매고 있느냐고. 도망치다니, 말이 심하잖아. 나는 그냥 잠깐 다른 곳에 먼저 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버스의 헤드 라이트가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어디를? 어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딜까. 황망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이바역이라는 안내 멘트와 함께 문이 열리자 처음부터 이 곳에 오기로 작정했던 사람마냥 태연스레 내려버렸다. 이미 도쿄의 하늘은 짙은 파란색에서 어둠을 품은 보라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인파에 섞여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대로의 코스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이미 정도(正道)를 비껴나갔다. 복잡한 건물들 사이의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남아 있는 소심함으로, 몇 발짝 걸어들어갈 때마다 고개를 돌려 역의 위치를 확인해 가면서.
골목길을 제 집인 양 능숙히 누비는 고양이들과의 조우도 몇 번을 겪고 난 뒤, 왼쪽 편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길로 보이는 널찍한 입구가 나왔다. 빨간 조명등이 벽 왼편에서 깜박거리고, 나사형을 그리며 돌아내려가야 하는 구조로 보아 어느 건물의 지하 주차장인 듯 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좁은 골목의 어둠 속에서 건물의 등을 바라보고 그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 곳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차장을 걸어내려가 본 적이 있었던가. 없다. 그럼 해 볼까. 제어 기능을 상실한 뇌는 오히려 판단이 빨라졌다. 결과의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마침 환하게 불이 켜진 경비실은 비어 있었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또각또각 가볍게 공간을 울려가며 걸어 내려가다보니, 그제서야 갑자기 올라오는 차에 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꽤나 내려온 상태이니, 도로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통로를 도는 순간 널찍한 주차장이 보였다. 탈출, 하고 중얼거리며 다라락, 남은 내리막길을 재빨리 뛰어내려갔다. 역시 주차장이구나. 직원용으로 사용되는 곳인지, 의외로 주차되어 있는 차량은 많지 않았다. cctv가 매달린 곳이 어디쯤인지 궁금해하면서ㅡ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눈에 띄어서야, 걱정한들 달리 방법이 없다ㅡ 주차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띄엄띄엄 주차되어 있는 차들 중에는 제법 고급스럽게 생긴 차도 보였다. 차에 대해선 문외한인데도 어쩐지 눈에 익은 느낌이었다. 다가가볼까 하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만두었다. 곧 내려온 길의 반대편 끝에 다다랐다. 경고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붙은 문이 있었다. 우리나라 식으로 치자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를 알리는, 흔한 경고문이었다. 평소 규칙을 벗어나는 행동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었고, 아무리 비정상적인 날이라고 해도 금지, 라고 완고하게 막아서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문은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안쪽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쪽에서 나오는 빛이 주차장 바닥에 직사각형의 빛을 그릴 만큼. 문고리를 잡고 당기자 빛은 몸집을 늘리며 늘어나다 발 밑으로 퍼져나갔다. 고개를 드니 길지 않게 이어지다 오른쪽으로 틀어지는 복도가 보였다. 직원용 비상구 같았다. 비상구 정도야 들어가도 되겠지. 아니면 도로 내려가거나, 적당한 데에서 바깥으로 나가도 되고. 오피스빌딩이면 어떡하지? 어쩌면 그냥 쇼핑몰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뭐 어때, 뭣하면 길 잃어버린 관광객 정도로 해 두면 되겠지. 틀린 말도 아니니.... 아,
부딪혔다. 고개를 드니 사람이 보였다. 모자를 쓴 남자였다. 바쁘게 걷고 있었던 듯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은 그대로인 채로, 저 쪽도 예상치 못한 부딪힘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보다 조금 위에 위치한 턱선이 지나치게 곱다고 생각했다. 눌러 쓴 모자의 캡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는 놀란 표정 속에서도 낮은 온도의 차분함이 물들어 있었다. 귀 뒤로 나온 머리카락은 익숙한 밝은 갈색.
설마. 다시 눈을 바라보았다. 이 낯설은 익숙함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에게, 내 컴퓨터 바탕화면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그에게.
"......"
"......"
짧은 침묵이 오갔다. 분명 그 역시 내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고 생각할텐데, 그런데도 소리를 지르지도, 울지도, 껴안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 나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난감한 모양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라보고 있다기보다, 처음 눈이 마주친 이후부터 고개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은 이 쪽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저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든 깔끔한 이성이 나에게도 옮겨오기를 바랐다. 서서히,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응어리지더니 다시 빠르게 녹으면서, 추운 겨울날의 알콜처럼 심장부터 손가락 끝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퍼져가는 것은 희미한 느낌을 넘어 점점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떻게 손 쓸 수도 없이 터져나오는 분노였다. 눈 앞에 두고서도 화면을 보는 것처럼 무기력한 나 자신에 대한, 그럴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사회적 위치에 대한, 살아오는 몇 년 동안 나를 괴롭혀왔던 죄책감을 당연히 모르는 그의 무지에 대한, 마지막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단순히 그에 대한. 그 감정의 원인은 알 수도 없었고 그것을 찾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가 달라지는 눈빛을 감지할까봐 두려워할 틈도 없이, 나는 솟구치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버티려고 애를 썼다. 나를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것이 소용돌이를 만들며 위협하는 그 급류에 떠내려 가 버릴 것 같았다. 하루종일 고장난 상태였던 경보등이 이제서야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취급주의' 상태다.
"......실례."
그는 그냥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멍하니 앞에 서 있는 나를 비켜 지나갔다. 등 뒤로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다급함이 몰려왔다. 그냥 그렇게 간다고? 지금 신이 한창 즐기고 있는 이 빌어먹을 장난이 이렇게 마무리될 리가 없잖아. 순간 눈에 들어온, 복도 한 켠에 있는 유난히 빨간 색의 소화기를 뽑아들고 몸을 돌렸다. 내 몇 년이 당신에겐 한 순간과 맞먹는다는 그런 지랄맞은 결론은 내고 싶지도 않아. 나는 할 말이 많아. 사실 아무 말도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할 말은 많아. 아니,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냐. 단지 할 말이 있을 뿐이야. 그래, 분명히 이 두 가진 다른 거야.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지금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런데,
"넌 왜 가니?"
그가 돌아봄과 동시에 소화기를 치켜들었다. 놀란 그가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조금 더 빨랐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내 팔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로 쓰러졌다. 덕분에 옷은 팔뚝 부분이 거칠게 찢겨버렸다. 말라가지고 힘은 세네, 하고 중얼거리며 기절한 그의 손에서 천 조각을 끄집어냈다.
"도로 붙일 수도 없겠네. 뭐, 이것도 기념인가."
지나가는 유명인을 붙잡다 찢은 옷자락을 가진 팬이야 있을지 몰라도, 유명인에게 찢긴 자기 옷자락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생각에 내가 얼마나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났다. 그냥 웃어버렸다. 오른쪽 팔이 욱신거렸다. 무거운 소화기를 급하게 내리치느라 팔목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인대가 늘어났는지, 찢긴 옷자락 위로 드러난 팔은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왼쪽 손으로 부어오르는 팔을 감싸며 그를 향해 몸을 숙였다. 인대에 무리가 갈 정도로 내리쳤는데 괜찮은 걸까. 코 끝에 손을 대 보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문득 머리를 다쳤을 때 피가 나오지 않으면 위험하다던 말이 떠올라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흐르는 피를 인식하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왠지 모를 비현실감에 상처를 만져 보자 역시 손바닥 가득 붉은 피가 묻어났다. 피가 난다고 좋은 건 아니잖아, 싶었지만 일단 안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막 잠든 듯이 눈을 감은 그를 보며 다행이네요, 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 문을 여는 쇳소리가 들리더니, 다음 순간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남자는 쓰러진 그를 끌어안으며 대뜸 반말로 물음을 던졌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원래가 자기 또래나 그 연하의 팬들을 만났을 때는 존대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내 바탕화면의 나머지 반을 차지하는 또 다른 그는. 그들은 듀엣이었다. 사카모토 케이이치와 다나카 토오루. 사적으로 같이 행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나는 얼마만큼 그들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알고는 있는 걸까?
"괜찮아? 눈 좀 떠 봐, 응?"
"아, 저기..."
역시 불화설은 헛소문이었나, 라고 멍하니 바라보다 급히 말을 꺼냈다. 당황하며 아이카타(일본에서 콤비로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자신의 파트너를 칭하는 말)를 끌어안고 흔들어대던 토오루가 내게 눈을 맞췄다. 불안에 흔들리는 동그란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 안타까운 표정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들었다. 내가 그랬다고 말하고 나면, 이 표정이 어떻게 바뀔까.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너는 괜찮아?"
"네?"
"팔, 다친 거 같은데."
토오루가 턱짓으로 내 오른쪽 팔을 가리켰다. 벌써 눈치를 챘는지,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말투를 듣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팔을 내려다보고, 잠깐 굳어있던 나는 다시 복도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형광등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하얀 빛을 내뿜었다. 신이시여, 당신 오늘 정말 한가한가 보네요.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았다.
케이이치의 손톱에 긁히면서 생긴 상처에 그가 흘린 피까지 손바닥에 묻으면서, 내 팔은 직접 소화기를 들고 내리쳤다기보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당한 듯한 상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곧 그럴 듯한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울먹이며 더듬더듬, 베틀에서 천을 짜내듯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시작했다.
"모르는, 모르는 남자가... 처음엔 짐을 좀 들어달라고 했는데, 여기로 데리고 와서, 가방을 뺏으려고 해서, 근데, 케이이치군이 저쪽에서 오다가, 마주쳐서, 그 남자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케이이치군은 아무 관계도 없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힐끗 본 케이이치는 여전히 기절한 채였다. 그래, 지금 정신 차리면 곤란해진다고. 내가 아무 죄 없는 선량한 관광객이 될 때까지만 그렇게 있어줘.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그 사람 얼굴은 봤어?"
"아뇨,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잘......"
"그런 사람은 조심해야지, 여자 혼자 있으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아니, 나한테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저기, 괜찮으면 나 좀 도와 줄 수 있겠어?"
토오루는 케이이치가 걱정되어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스미마셍-만 반복하며 울먹이는 나를 달래주었다. 그러고는 케이이치를 일으키며 도움을 청했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이며 토오루가 붙잡은 쪽 반대편으로 가 케이이치를 부축했다. 일으켜 세울 때 살짝 신음 소리가 나서, 깨어난 건 아닌가 긴장했지만 다행히 케이이치는 여전했다. 아픈 팔을 붙잡고, 어깨로는 축 늘어진 케이이치의 몸을 지탱해가며 주차장으로 나갔다. 한참을 더 걸어서, 아까의 눈에 익던 고급스러운 차 앞에 도착하자 토오루가 뒷문을 열었다. 함께 케이이치를 차 안으로 넣어주고 나자, 그럼, 하고 인사하는 나를 토오루가 붙잡았다.
"너도 같이 타. 병원, 가야 하잖아."
"아, 하지만...."
"괜찮으니까 그냥 타. 여기서 어떻게 걸어나가려고 그래."
나는 이쯤에서 퇴장하고 싶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기보다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지나친 팬서비스로 나에게 조금 더 활약할 기회를 주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괜찮아, 빨리 타."
원하신다면.
케이이치가 기절한 채 앉아 있는 뒷자석에 같이 올라탔다. 시동을 거는 토오루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흐뭇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막아가며, 가방을 열고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을 찾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여전히 연기를 해가면서.
"이것 좀 받쳐줄래? 그 애한테."
"아, 네."
토오루가 뒤로 건네주는 수건을 받아 케이이치의 상처를 감쌌다. 잘생긴 이마 왼쪽으로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수건을 잡아주며 왼손으로는 계속해서 가방을 헤집었다. 아까 그걸 샀을 텐데.
"어디에서 왔어? 일본인은 아닌 것 같은데."
"아... 네, 관광 왔어요. 혼자 배낭여행 온 거라서, 너무 두리번거리다 보니 눈에 띄었나봐요."
찾았다. 가방 속에서 그것이 손가락 끝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혼자서 왔구나... 피, 아직도 많이 나와?"
"네, 아직...."
케이이치 쪽은 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보지 않아도 이미 흥건하게 젖어가는 수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못 잡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큰일이네, 이 시간엔 빨리 가기 힘들텐데. 어떡하지?"
"그러게요, 저도 일행이 있어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됐다.
"일행이라고? 방금 혼자서 왔다고 하지 않았어?"
"......라는 건 거짓말."
의아해하며 백미러로 뒤를 건너다 본 토오루의 표정이 굳었다. 급정지를 하는 바람에 케이이치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의 목이 내 손에 쥐어진 칼 앞까지 다가왔다가 다시 뒤로 제쳐졌다. 괴로운지 살짝 얼굴이 찌푸려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운전 조심해서 해야지, 토오루. 방금 아이카타 목이 꽤나 아슬아슬했거든."
"너 누구야."
"다시 출발해, 도로 위에 서 있어봐야 좋을 거 없잖아."
다시 케이이치의 목 위에 고정된 칼을 본 토오루는 아무 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창문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다. 진하게 썬팅된 창문은 풍경도 없이 적막했다. 바깥이 보고 싶었다. 지금 내가 깨어 있다는 걸 믿고 싶어서.
"원하는 게 뭐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은 창문 좀 내려줄래? 바깥이 보고 싶어."
강한 척 하는데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저지를 멍청한 짓을 오늘 하루에 다 해치우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안돼. 한참을 침묵하던 토오루는 말없이 창문을 조금 내려주었다. 이미 어둠이 내린 도쿄의 거리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나는 조금 억울했어."
토오루는 대답이 없었다. 케이이치의 목에 겨누어진 칼을 들어 그의 뺨 가까이에 가져갔다. 하지마, 라고 낮게 경고하는 토오루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나도 조심하고 있어. 이유없이 벨 생각은 없으니까."
"......억울하다는 건 무슨 뜻이야?"
뭐라고 말해야 할까. 케이이치와 마주쳤을 때와 같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의 몸서리치는 분노는 가라앉고 구름 가득한 밤하늘과 같은 막막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뭐라고 해야 할 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슬펐다. 나는 천천히, 떠오르는 단어들이 저절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을 꺼냈다.
"당신들은, 퍼즐,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이 퍼즐은, 공장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보이도록 찍어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는 사람 각자가 다시 만드는 거야. 공장에서 예쁘게 만들어낸 도안을 가지고, 그걸 보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시 꾸미는 거지. 때로는 너무 잘 만들어져서, 진짜 원래 공장에서 나온 도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릴 수도 있어. 게다가 처음부터 공장에서 만든 도안이라는 것도, 그 바탕이 된 모델 자체와는 조금씩 다른 데 말이야. 결국 모델과 같은 모양의, 진짜 퍼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갖고 있는 것도 그래. 모델과는ㅡ케이이치의 뺨을 칼등으로 한 번 쓸었다ㅡ다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모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 멋대로 만든 퍼즐에 그들을 끼워 넣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애초부터 제대로 맞출 수가 없는 거잖아, 이런 일방적인 상황에서는. 하지만 말야, 가끔은 질리기도 하는 거야. 이 내멋대로의 퍼즐을 끌어안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나한테 질리고 나면 그 다음엔 누구에게 화가 나는지 알아? 모델한테 화가 나는 거야. 넌 왜 내가 이런 걸 만들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하고."
"그게 우리 일이야."
라고, 케이이치의 입술이 움직였다. 끄응, 하며 눈썹을 찌푸린 그는 손을 뻗어 무릎 위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들어 상처를 감쌌다.
"케이이치 괜찮은 거야?"
토오루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운전중이잖아, 괜찮으니까 앞이나 봐. 케이이치가 잠긴 목소리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도의 눈물이 고이던 토오루가 알고 있어, 라고 퉁명스레 대답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자연스러운 공기 속에서, 나는 내가 이길 수 없을 것을 느꼈다. 오른팔이 새삼스럽게 욱신거렸다. 눈을 도로 감고서 편안하게 등을 기대는 케이이치를 보며, 나는 천천히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았다. 백미러로 뒷자석을 들여다 본 토오루는 아무 말 없이 차의 속도를 높였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여전히 낯설었다. 바깥의 소음이 조금씩 들어왔다 사라지는 속에서 케이이치가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모델은 말야, 퍼즐이 자신과 다르게 나온다고 해서 화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런 퍼즐을 만드는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야. 그게 우리 직업인 거야. 슬플 때도 웃을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기분을 멋대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우릴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만의 퍼즐을 만들 권리가 있어. 그 퍼즐 때문에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고, 웃을 일이 늘어난다면 우린 그걸로 만족하는 거야. 아무도 진짜를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도 않아. 오히려 누군가 진짜를 가지고 있다면 더 기분 나쁠 거야. 나는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상대방은 나를 다 알고 있다면 말야."
내가 아무리 센 척 해봤자 그는 10년은 더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자연스럽게 달래듯이 조곤조곤해지는 그의 말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보다가는 또 지나가는 여자애한테 머리를 맞을지도 몰라요, 라고 속으로만 비꼬아 주었다.
"상대방은 계속해서 더 알고 싶어할텐데. 당신이 기분나빠한다 해도."
"......하지만 결국 알지 못하잖아?"
"위험한 발언 아냐? 이 정도로 소란을 피운 장본인 앞에서."
이미 관심없다는 듯 무심한 말투로 내뱉자 등 뒤로 케이이치의 시선이 느껴졌다. 쳐다보지 말라고, 지금도 충분히 쪽팔리니까. 썬팅된 창문에 비치는 내 얼굴을 마주할까봐 필사적으로 창 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케이이치는 어쨌든 그렇게 알아달라고, 중얼거렸다. 글쎄, 여러분이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해요, 라니. 시상식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이잖아. 이미지에 둘러싸여버린 실체, 그것에 닿지 못하는 본질적인 불만족을 토로하는 이에게 답하기엔 너무 흔한 말이었다. 어쩔 수가 없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창 밖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경찰서로 보이는 건물이 눈 앞에서 서서히 뒤로 밀려가고 있었다.
"경찰서, 지나쳤어."
앞에 앉은 토오루를 향해 말하자 백미러로 그의 눈이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병원이 먼저야."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조용히 가라앉는 공기를 깨고, 토오루가 물었다.
"여행 중인 건 사실이야?"
"응, 오늘이 첫날. 아직 호텔에 체크인도 안한 파릇파릇한 관광객이랄까."
하, 하고 낮은 헛웃음이 옆에서 들렸지만 모른 척 했다. 나도 이러려고 여기까지 공짜 티켓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고. 정신차리고 보니 여기까지 와 있는데 어떡하겠어. 다시금 나를 여기까지 인도한 우연과 무모함에 욕을 퍼붓다가, 문득 토오루가 무어라 묻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응?"
"호텔, 어디냐고. 데려다 줄 테니까."
하. 이번엔 내가 웃을 차례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나올 셈인지 묻고 싶었다. 팬서비스가 지나치다니까, 처음부터.
"이메-지."
이미지, 라는 단어를 내뱉고 난 후, 토오루의 동그란 눈과 백미러를 통해 마주쳤다. 물음이 담긴 눈동자를 향해 눈 한 번 깜박일 새도 없이 쏘아붙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이미지대로 행동할 거야? 진짜 날 데려다주고 싶어? 아니잖아. 지금이라도 당장 문 밖으로 차내고 싶지 않아?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서로 속 편할 것 같은데. 어때, 지금 그렇게 하자. 나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 아님, 이대로 그냥 못 놔주겠으면 경찰서로 가. 병원부터 갔다와도 돼, 도망 안 가고 여기 그대로 앉아있을 테니까. 어때? 그게 아님 당한 만큼 똑같이 해주고 싶어? 어디, 그럼 소화기부터 있어야겠네. 그건 구하기 힘들텐데, 어쩌지? 아까 거기로 다시 돌아갈까? 케이이치도 깨어났으니까 곧바로 병원으로 안 가도 큰 일은 없을 거...."
토오루가 갑자기 급정지를 하는 바람에 뒷자석에 앉은 둘의 몸이 거칠게 앞으로 쏠렸다. 토오루, 뭐하는... 이라고 케이이치가 외친 것과 안전벨트를 푼 토오루가 몸을 돌려 나와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귀가 쨍- 하고 울렸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꺾이고 난 지 한참 후에야, 나는 토오루에게 뺨을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호텔, 어디냐고."
하하, 이번엔 진짜 웃음이 나왔지만 뺨이 너무 아파 입꼬리를 올릴 수 없었다. 썬팅된 까만 창문으로 아직 어린 여자애가 비쳤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눈을 감아 삼키면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뽑아버리지 못하는 데 울컥하면서, 나는 호텔 이름을 댔다. 토오루는 한참을 더 그대로 있더니 이윽고 몸을 돌려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후 얼굴로 느껴지는 찬바람에 천천히 눈을 떴다. 창문이 완전히 열려 있었다. 앞좌석을 바라보고는, 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으면서 창틀에 몸을 기댔다. 도쿄의 바람은 시원했다. 토오루가 케이이치를 불렀다.
"저기, 케이이치, "
"어, 괜찮아. 먼저 가자."
"...응."
차는 부드럽게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항 근처까지 가야 할 텐데. 아무 말 않고 그저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이제 만족해요? 하늘은 아무 말도 없었고, 도시의 하늘에 띄엄띄엄 뜬 별들만 반짝였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아까부터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던 것을 작게 중얼거렸다.
"흉터, 남을까."
등 뒤로 부스럭하고, 케이이치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 마냥 그의 표정이, 시선이 그대로 보였다. 여전히 고요하게, 차분한 눈길. 내가 딱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이 두 사람의 눈빛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때리지를 말든가."
"걱정된다고 안 했어."
"센 척 하긴. 꼬맹이 주제에."
꼬맹이한테 맞은 주제에, 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꿀꺽 삼켰다. 농담을 주고 받을 처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 쪽에서 나를 봐준다고 해도 잘못한 건 사라지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라고 몇 번을 고개를 숙여도 모자란 인간이 그저 편하게 대해준다고 해서 거기에 기대버리는 건 뻔뻔한 짓이다. 창틀 위에 포개어 얹은 팔에 고개를 기댔다. 피곤하다. 이제 그만 퇴장하고 싶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이 두 사람의 인생에서 내가 출연한 쥐꼬리만한 분량을 깔끔하게 편집해버리고 싶었다. 기억하는 건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차가 멈췄다.
"여기야?"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위를 올려다 보았다. 여행사 직원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이름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민 고개를 도로 집어넣었다. 가방을 챙기려고 하는데 케이이치가 그와 나 사이에 놓여있던 칼을 먼저 집어들었다. 토오루가 말했다.
"그건 두고 가."
"안돼, 선물로 산 거란 말야."
"누구한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는 토오루에게 엄마, 라고 대답하자, 고개를 갸웃하며 칼을 들여다 본 케이이치가 손잡이에 매달린 키티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자, 하고 칼을 건네받자마자 재빨리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서 잠깐 멈춰 서 있다가, 결국 꾸벅, 하는 인사는 하지 않은 채 그냥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출발하는 차 소리를 들으면서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프론트에 대고 이름을 말하자 몇 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나를 둘러싸고 소동이 벌어졌다. 왼쪽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한 호텔 직원이 무슨 일을 당했냐고 호들갑스럽게 물어왔다. 귀찮아서 고개를 흔들며 되물었다.
"여기서 가까운 데에 병원이 있나요?"
"네?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아뇨, 그냥요. 가깝나요?"
"아, 예... 근처에 하나가 있긴 한데..."
"다행이네요."
"네?"
빨리 가야 할 텐데. 이미 보이지도 않는 차를 눈으로 쫓듯 멀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호텔 밖은 이제 완전한 밤이 찾아와 있었다.
또 어딘가로 사라질까봐 예민하게 구는 호텔 직원들과, 수시로 확인 전화가 걸려오는 여행사에 시달리며 일정대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소식을 접하고 나서 잔뜩 불안해했던 가족과 친구들에게 한참을 또 시달리고 나서야 일은 마무리되었다. 일상은 다시 예전처럼 밋밋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 들어가 본 그들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케이이치가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부상으로 상처를 입어 당분간 휴식에 들어간다는 공지가 떠 있었다. 그 후 몇 주 동안은 가십지나 신문에서 어느 쇼핑몰 주차장에서 두 사람이 신원불명의 사람과 함께 목격되었다느니, 사실은 케이이치가 괴한에게 습격당해 얼굴에 방송이 불가능할 정도의 손상을 입었다느니 하는 기사가 여러 번 실렸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 달 후, 다시 활동을 재개한 그들이 가요 프로그램의 녹화를 끝냈다는 소식이 들렸고, 몇 주 후 그 프로그램의 방송일이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집으로 도착한 첫 날 외에는 컴퓨터나 tv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은 채 아르바이트에만 매달렸다. 가끔 같은 팬인 친구가 문자를 통해 간간히 전해주는 소식도 답장도 하지 않은 채 외면했다. 혼자 멍하니 집에 있을 때, 정말 내가 그런 걸까, 하고 의심스러워질 때마다 주방을 돌아보면 벽에 걸린 키티 손잡이의 칼이ㅡ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막상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ㅡ얄밉게 빛났다. 그들의 한 달만의 녹화가 방영된 날 밤, 잠에 들지 못한 채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결국은 벌떡 일어나 어쩔 수 없는 내 모습에 고개를 흔들며 방송 영상을 다운받기 시작했다.
-네, 이번엔 한 달만에 활동을 재개한...
박수 소리 속에 등장한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걸어나와 자리에 앉는다. 클로즈업되는 케이이치의 얼굴은... 깨끗했다.
-케이이치,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던데.
-네, 혼자서 바보짓을 좀 했죠.
-평소에도 구르는 건 많이 하지 않았어?
-그게, 연기랑 실제는 역시 다르더라구요.
빙글빙글 웃어가며 칸사이 사투리로 물어대는 사회자의 말에 대답하는 케이이치의 옆에서 토오루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들으니까 얼굴이 엉망이 됐다던데, 역시 그렇구만..
-멀쩡하잖아요!
하하하.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웃다가 움찔했다. 내가 웃어도 되는 건가.
-흉터도 안 남고 깨끗하게 나았다구요, 이거.
케이이치가 앞머리를 들어올리며 사회자에게 투덜거리자 천천히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 다행이네, 라고 맞장구치는 사회자의 목소리 너머로 토오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면이 아니라구요, 이건 진짜.
이건 진짜, 라고 말하며 토오루가 손가락으로 케이이치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뭐하는 거야, 너.
-CG도 아니라구요, 이거. 진짜 사카모토 케이이치니까.
케이이치가 토오루의 손가락을 피하며 웃었다. 다시 투샷으로 잡힌 두 사람. 토오루가 사회자를 보며 말한다.
-그러니까 계단도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순간 놀라 영상을 정지시켰다. 토오루의 손자국은 물론 붓기까지 말끔하게 가라앉은 왼쪽 뺨이 새삼스럽게 화끈거려 와 조심스레 손으로 감싸며 다시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뭔 소리야? 계단이 걱정하다니.
-왕자님 용안에 상처를 냈으니 계단도 걱정이 많았을 거 아녜요.
-이 녀석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사회자의 말에도 상관없이 응응, 하며 케이이치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말했다.
-진짜 깨끗하게 나았으니까.
다시 영상을 정지시키자 방 안에는 침묵이 가득하고, 의자 위에 다리를 모으고 쭈그려 앉은 내 모습만이 덩그러니 숨쉬는 피사체로 남아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뭔가가 떠오를 듯 하다가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채 사라졌다. 안개는 점점 짙어지다가, 몸 속 가득히 습기를 채워올리기 시작했다. 습기는 방울방울 뭉쳐가며 점점 무거워졌다. 무거운 물방울들은 발 끝에서부터 천천히 차올라 머리 끝에서 찰랑거렸다. 한계다. 결국, 후욱, 하고 숨을 들이키고서,
첫댓글 이, 이건 충격과 공포를 겸비한 괴물작! 잘 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