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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라트산 조망하며 가는 길 큰 산이 마시스이고, 작은 산은 시스라 불린다.
큰 산은 현재 터키에서 아크라다기라 부르며. 노아의 방주가 멈추었다고 알려진 아라라트산은 6,850m로 터키의 허가를 받아야만 올라갈 수 있다.
아라라트산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버지 같이 생각하는 산이다.
한때 동쪽 카스피해에서 서쪽의 지중해까지 넓은 땅을 가진 나라였지만 이후 많은 침략과 학살의 비극 속에서도 그들의 민족성이나 언어. 문자. 종교를 지켜온 강인한 정체성이 우리의 역사에서 많은 외침에도 지켜내고 성장해온 동질감에 마음 한쪽이 뭉클해온다.
하나의 역사라도 더 알리고픈 가이드 아르미네의 열정이 고스란히 내게 들어온다.
역사를 바로 알고 알리려는 그의 모습이 크게만 보인다.
*아라라트 산(왼쪽산이 시스, 오른쪽 큰 산이 마시스)
코비랍수도원은 4세기경 성 그레고리신부가 13년간 갇혀있던 지하 감옥 위에 세워진 교회로 대주교(성그레고리신부)가 투옥되었던 지하 감옥 안에는 작은 성전이 있고 위 천장에 작은 구멍 하나가 있어 그곳으로 신도들이 물과 음식을 넣어 주어 생활할 수 있었던 지하 감옥이 그대로 남아있어 직선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견학할 수 있었다.
코비랍수도원은 아르메니아 국교로서의 기독교가 탄생한곳이라 할 수 있다.
코비랍 이란 뜻은 깊은 지하 감옥이라 한다. 그곳에서 13년이란 긴 세월 동안 갇힌 것은 아랍계 귀족이었던 그레고리의 아버지는 당시 이슬람왕의 꼬임에 넘어가 아르메니아 왕과 왕비를 암살한다. 그로인해 자신과 가족은 아르메니아 인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아들 그레고리는 터기의 카파도키아 지방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여 아르메니아를 잊지 못하고 조국으로 돌아온 이 때의 왕이 부친께서 암살한 선대왕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였던 것이다.
당시 아르메니아는 토속신앙이 깊었고, 기독교는 신흥종교중 하나이다. 왕은 그레고리에게 이교도 신전에 헌화를 명했으나 독실한 기독교도 그레고리는 이를 거부하고 과거 악연으로 진노한 왕은 그레고리를 지하 감옥에 감금하여 모진 고문과 물도 음식도 주지 않은 채 가둬 버린다. 그 후 왕은 13년 동안 로마에서 건너온 수녀님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악행을 저지른다. 그래서인지 왕은 이름 모를 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데 어느 날 왕의 여동생의 꿈에 그레고리가 살아있으니 찾으라는 계시를 받는다.
13년이나 지나버린 긴 시간 반신반의 하며 악화되는 병세와 반복되는 꿈의 계시로 왕자를 코비랍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무탈한 그레고리를 발견하고 궁으로 데려오자 왕의 병은 씻은 듯이 낫는다.
이에 왕은 그레고리신부에게 세례는 받고, 국교를 기독교로 정한다.
*코비랍수도원
*코비랍숟원에서 아라라트 산 조망
*지하 감옥
유네스코문화유산인 가이얀 교회는 로마 기독교 수녀였던 흐립시메와 수녀원장 케인 그리고 이름 모를 수녀 36명이 마지막으로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피해 아르메니아로 도망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어 케인 원장수녀님이 처형된 곳에 성 그레고리 신부님께서 그 자리를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 교회로 추측되고 있다.
원장수녀님의 기개가 느껴지는 교회이다.
*가이얀교회 입구
*가운데 케인 수녀원장님과 흐립시매수녀님. 그리고 한분 수녀님
*그곳의 살구나무
세계최초의 교회건축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에이치아진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이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총본산이라 한다.
성 그레고리에 의해 건축된 대성당은 원래 이교도 신전을 해체한 후 기독교로 개종하였음을 상징하며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성당은 박물관과 아르메니아 정교회 신학교 등이 정문을 함께 사용하는 한 울타리 안에 있다. 박물관은 정교회의 성인들의 유품들로 301년 왕이 세례를 받고 그레고리신부님이 지은 교회이다.
*에이치아진성당 정문
* 성당내부는 공사중
*박물관에 있는 십자가 안에 보이는 노아의 방주 배조각
중식은 식당 내부를 그림으로 장식한 것과 화단 장식등 주인장의 마음이 전해온다.
거기에 써빙하는 젊은이들이 모두 농아인 인 듯 보인다.
입구에는 정겨운 농기구를 벽에 걸어 놓았고, 우측 벽 한쪽에는 세계지도를 붙여놓고 색색의 구술 핀을 놓아 방문한 손님의 나라 지도 위에 꽂도록 한다.
나도 우리나라 대한민국지도위에 파란구술 핀 하나를 더 한다.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나라 지도위에 구술 핀이 많은 것을 보니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셨다는 증거이다.
닭고기볶음밥이 나왔다 그동안 먹어본 곡류 중 가장 우리입맛에 근접한 쌀 맛이다.
그곳에는 현지가이드의 아르미네 오빠의 작품도 판매되고 있다.
*식당정원길
*가이드 아르미네 오빠의 작품
*나의 근원
아름다운수녀님 흐립시매교회는 7세기 지어졌다. 36명의 수녀님 중 니노만 살아남았고 조지아로 가서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아르메니아에서는 말한다.
조지아에서는 그리 말하면 싫어한다.
조지아에서는 꿈에 성모가 십자가를 주어서 포도나무가지를 꺾어서 십자가를 만들었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한다.
그때 수녀님들이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수녀님들이 처형당한 자리에 세워진 교회들이므로 서로 가까이에 수도원들이 있다 한다.
미모의 흐립시매수녀님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두 번째 왕비를 맞이하기로 계획하고, 전국의 화가들에게 각지의 미인들의 초상화를 그려 올려 받치라 하였다.
화가들은 전국의 미녀의 초상화를 받쳤고, 그 중 수녀였던 흐립시메의 초상화는 출중하였다.
흐립시메의 초상화를 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곧 결혼식을 준비하라 하였으나 흐립시메는 이미 하느님께 헌신하였으므로 결혼할 수 없다 하여 수녀원장을 포함하여 36명은 로마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도망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그들은 아르메니아의 에치미아진으로 와서 수녀원을 다시 만들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아르메니아의 왕 트리다테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를 로마로 보내라 하였고, 트리다테스는 군대를 보내 흐립시메를 데려 오려 하였으나, 그녀는 끝까지 저항하였다.
수녀원 주위는 군대와, 그녀를 보려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는데, 결국 그녀는 거기서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흐립시매 교회에는 돌이 전시되어 있다. 수녀님이 돌로 처형을 당한 것으로 설명을 한다. 수녀님의 무덤에는 석관위에 수녀님의 이콘이 그려져 있다.
예쁜 수녀님의 얼굴이다.
유네스코 츠발트노츠 유적지는 왕이 성그레고리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장소로 둥근 모양 교회였는데 지진으로 붕괴되고 사진만 볼 수 있다.
교회는 십자여야 하기에 기둥으로 십자를 형성하였고 안에는 세례 받는 장소로 작은 물구덩이를 만들고 몇 계단을 놓아 계단으로 내려가서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식을 한 것이다.
벽에 새겨져있던 해시계가 전시되어 있는데 시계의 크기와 또 와이너리 크기로 보아 이수도원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사진으로 만 볼 수 있는 츠발트노츠 교회의 모습
* 세례식 장소인 우물
*와이너리
*벽에 있던 해시계
아르메니아대학살 추모공원 소련의 수국이었던 아르메니아 터기 동부에 많이 살던 아르메니아사람들을 터기 북부로 내몰아 물도 안주고 말려 죽인 것이다.
그것을 터키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제국은 러시아가 속한 연합국에 맞서기 위해 3국 동맹에 가담한다. 이에 러시아 접경의 아르메니아 혁명세력이 오스만제국을 공격하고 영국군이 영토를 점령해 오자, 오스만제국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으로 강제이주 시켰고, 이에 고의적인 추위와 굶주림에 질병 등으로 죽게 하거나 학살한 것이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오토만 제국 청년 투르크당 집권기 1915년부터 1917년까지 150만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고 추방당한 사건으로, 20세기 첫 대학살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터키는 오스만제국 때 한 짓이라는 것과 1차세계대전시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1915년 150만 명쯤 대학살되고 1918년 독립한 나라로 1922년, 1992년 3번의 독립을 이룬 나라이지만, 모든 것을 소련한테 허락을 받아야했으므로 50년 후에야 추모공원 허락받아 만들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아우로라상이 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가서 그녀나이 12살 정도에 부모님과 가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았던 시대를 책으로 쓰고, 그 책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연기도 하였지만 그녀는 그 후로 기억의 지갑을 꺼내야 하는 것이 아픔이기에 배우 생활을 그만둔 것으로 전한다. 추모공원에 그녀의 사진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고 있다. 슬픔을 가슴깊이 삼키고 있을 그녀의 마음을 우리는 얼마나 짐작할까?
추모공원의 좌측에 세워진 벽면에도 학살이 자행된 많은 지역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매년 4월 24일을 기념일로 정하여 희생자들을 기리며 올리는 꽃송이를 가이드의 핸드폰으로 올해 기념일에 찍은 사진을 보니 꽃 무덤을 이루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관심과 기억은 그들이 사랑하는 조국과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가 현지가이드 아르미네의 해설과 안내에서 우리가 일본에 당했던 과거와 지금 현실이 닮은 것 같아 감정 이입에 더욱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돈다.
국력은 힘이고 저 아르메니아인의 아팠던 과거를 더 많이 전달하고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이 나라를 하나로 만든다는 추모공원의 탑 모습처럼 멀지 않아 이루어 낼 것 같다.
우리도 뭉쳐야 한다는 것을 통감케 하는 시간이었고 그들을 향해 우리는 다함께 묵념을 올린다.
*추모공원의 탑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고 여인들의 얼굴에 강제로 문신을 새겨 놓았다
* 아우로라
아르메니아에서 꼬냑이 유명하다고 주어 듣고 갔기에 기대를 가지고 따가운 햇살을 막으며 와이너리 박물관이 함께 있는 브랜디-와인-보드카를 만드는 공장에 도착한다.
먼저 와인 1944년산으로 2500-3000불 한다는 포도주를 전 회원 한 모금씩 맛을 본다. 술맛을 모르는 나도 향이 코앞으로 올수록 초코렛향으로 전해지고 아주 조금의 한 모금 목 넘김 또한 부드럽다는 고가에 세뇌된 생각인가 싶기도 하다.
포도주통 저장고는 조지아의 도자기와는 다르게 아르메니아는 오크통을 이용하여 지하토굴에 보관 되는데 원래 옛 왕궁이었던 곳을 구 소련 때 공장으로 사용한 곳으로 성벽을 이용하여 통의 팽창이 증폭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나무기둥들을 가로 질러 놓았다.
옆 건물에는 아르메니아에서 유명하다는 꼬냑회사로 5년산과 10년산 브랜디의 시음을 하는데 술을 못 마시는 내게는 향으로도 취하는 듯하다.
조지아에서 가이드가 와인에 대해 버스에서 이야기한 생각이 난다.
빈티지(숙성도)를 따지는 이유는 그해 작황이라는 것이다. 샤또는 그것이 맞다. 나머지는 포도를 구입하여 만드는 혼합이라 상관없다는 것이다.
유통기일 또한 병입 3년이란다. 나는 병에서도 오래만 되면 좋은 것으로 알고 집에 아껴둔 좋은 것이라고 아님 고가라고 또 누구누구가 준 의미 있는 것이라고, 종류가 특별하다고 장식으로 채워두는 등 그 모든 것들이 맛을 잃어 가이드 말에 의하면 버려야 한다는 와인을 고이 간직한 판국이다.
조지아사람들은 막걸리처럼 마시는 와인을 우리나라는 고급술처럼 나 또한 생각하였고 마신다.
숙취가 없는 와인이 좋은 와인이라 하는데 초자인 나는 달달한 와인이 좋다.
코르크마개로 막은 와인도 옛날 마개 없을 때는 막았지만 지금은 잘 만드는 좋은 기술이 발전했기에 삭기도하고 잘라지기도 하는 코르크가 꼭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전문가의 말을 전해준다.
하지만 프랑스는 아직도 쓰고 있지만, 현실적인 독일은 돌리는 마개를 쓴단다.
들어오면서 보이던 외관보다는 안쪽에는 아주 넓은 마을이 형성되어 예쁜 집과 말끔하게 조성된 정원과 조경이 와이너리에서 보았던 성벽이 증명하듯 옛 왕궁의 규모가 짐작된다.
넓은 정원에 공장과 시음장소에서 판매장으로 옮기는 발걸음은 정말 강한 햇살 내리쬐는 하루이다 보니 빛줄기는 살을 찌르고 내놓은 팔은 붉게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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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식은 중국식당으로 갔는데 그동안의 여행음식 중 가장 우리의 음식 맛이다.
옆 나라 음식이라 입에 맞는다고 누군가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 화교들이 많이 있어 중국음식을 쉽게 접한 까닭에 입이 익숙하니 편안한가 보다.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볶음 3가지에 버섯과 각종야채의 볶은 음식과 야채와 호밀 무침 같은 맛에 버섯스프가 담백하게 맛을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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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을 자면 귀국준비를 위한 짐을 싼다.
일상으로 복귀해서도 이곳에서의 설렘과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