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을 헤매다가 간 설도인 혜명 스님
가을 햇살이 무척이나 찬란했다. 나는 붉게 물든 오대산 산길을 걸어서 상원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조갯골 입구를 지나 사고 앞 모퉁이 길 어디쯤인가를 가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 앞에서 웬 스님 한 분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올라가고 그는 산길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옷은 아예 풀을 하지 않은 광목옷에다가 떨어진 곳을 누덕누덕 기워 흡사 넝마 같았다. 집채만 하게 배가 부른 바랑을 짊어졌는데 겉을 보자기로 싸서 맵시를 내지도 않은 맨 바랑이었다. 이 스님이 설도인이다. 본래 법명은 혜명이고 설도인은 그의 별명이다. 가까운 도반들도 모두 설도인이라 불러서 그의 진짜 법명은 잘 모르고 있는 스님들이 많을 정도다.
이렇게 오대산 산길에서 스치듯이 만난 것이 내가 혜명 스님. 설도인을 만난 마지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암사에 살고 있는 가까운 도반으로부터 그가 산 고개를 넘다가 죽었으며, 나무꾼이 발견하고 알려와 이미 화장까지 치렀다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해 그 곳에서 스님이 되었다. 일찍 이생의 인연을 마감하고 열반에 들어갔으니까, 스님 노릇을 한 햇수도 불과 십 년을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는 당시 삼십대 초반이었을 것이고.
설도인이라는 별명은 얼마 전까지 지리산 화엄사 주지를 하시던 종원 님이 지은 것이다. 당시 종원 스님은 해인사 선원의 청중 소임을 몇 년 동안 계속하고 계셨는데. 그 때 머리가 허연 혜명 스님의 공부하는 태도가 이미 도인이라는 뜻으로 설도인이라고 했다고 한다. 설도인은 별명과 같이 보통 사람과는 달리 평소 행동에도 도인다운 데가 있었다. 특이한 기행을 잘 했다고 해야겠다.
그가 해인사에서 행자 생활을 할 때다. 공양주 소임을 보고 있었는데, 한 번은 말없이 사라져서 연 삼 일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행자 생활이 힘들어서 중도에 포기하고 떠났다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원 스님들이 백련암 뒤 환적대 어디쯤 등산을 하다가 그가 산 능선 바위 위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며칠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으며, 밤이면 이슬을 맞고 낮이면 햇빛을 그대로 받으면서 좌선삼매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온통 긴 여름날의 강한 햇빛을 받아 화상을 입고 부풀어 있었다.
이렇게 그는 행자 때부터 주위 사람들을 놀라가 하는 기행으로 도인 노릇을 했다. 스님이 된 뒤에도 가끔 며칠씩 보이지 않다가 슬며시 나타나고는 했는데 그 때는 그렇게 산 속에서 좌선삼매에 있다가 오는 경우였다. 나는 그의 해인사 선원에서 두 철인가를 같이 살았다. 그는 평소 말수가 적었다. 아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선원의 가풍에는 말을 되도록 적게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젊은 수좌들이란 큰스님의 눈을 피해 떠들고 장난질도 많이 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들이 장난치고 노는 방선 시간에도 명월당에 게시는 은사 스님 방에 가서 방 청소도 해드리고 말벗이 되어 드리기도 하는 등 효상좌 노릇을 했다.
뒤에 들은 말이지만 행자 시절 계를 받을 때가 되었는데, 사중에는 이미 그의 기행이 알려져 있는 터라 아무도 그를 상좌로 삼으려는 스님이 없었다고 한다. 평소 엉뚱하기까지 하고 말이 없고 어눌하게 보이는 그가 스님이 된 뒤에 어떤 말썽꾼이나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서였다. 그 때 뒷방에 외롭게 계신 노스님을 직접 찾아가서 상좌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한다. 그렇게 맺어진 은사 스님과의 인연 때문인지 그는 은사 스님을 지성으로 모셨다. .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와 같이 해인사 선원에서 살았어도 별로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우선 그의 어눌하고 바보같은 행동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그가 우리들 당시 해인사 대중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당시는 전국의 유수한 사찰이 국립공원 설치 문제로 정부와 대립하고 있을 때였다. 해인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장경각 이전 문제와 겹쳐 문화공보부와 대립하고 있었다.
하루는 산중 스님들이 모두 궁현당에 모여 대중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모두들 의견이 분분했다 결사반대를 해야 한다느니 정부가 하는 일이니 우리가 아무리 그래봐야 막을 수 없다느니,,, 결국 주지 스님 이하 사중의 소임자 스님들의 의견을 따라 반대해야 소용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 때 설도인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 앞으로 나갔다. 그의 손에는 하얀 종이 한 장과 칼이 들려 있었다. 일순간 방안은 긴장감이 돌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폭포수가 쏟아지듯 열변을 토했다.
“우리들 옛 선사들은 해인사를 천년 동안 지켜왔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역경과 수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수난과 역경 속에서 도장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스님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들 수 백 명의 대중이 장경각 이전 문제 하나를 막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해인사 해동제일 도량을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것을 혈서로써 맹세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천천히 칼을 높이 쳐들었다. 칼을 내려쳐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려는 결연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스님들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나 그의 손을 잡고 칼을 빼앗으며 말렸다. 동시에 박수가 우레같이 터져나오고,,,
물론 다행히 혈서까지는 쓰지 않았지만 대중이 일치단결하여 장경각 이전을 막겠다고 결의를 한 것이다. 평소 자기 의견을 말하는 일이 없었고 특히 대중 앞에서는 한번도 말하는 일이 없던 그가 유창한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중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는 명연설가였던 점이 그저 놀라왔을 뿐이다.
뒷날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그 때 나와 오대산 산길에서 헤어지고 그 해 겨울 몇 군데 선원을 더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그의 입방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두 그의 특이한 기행이 부담이 되어서 였을 것이다. 결국 결재날도 지났고 차가운 겨울이 왔다. 그 때까지도 한철 살 곳을 찾아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도절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봉암사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도 수좌가 결재 중에 돌아다닌다고 역시 방부를 거절당했다. 주머니에는 노자가 떨어진 지도 오래 되었다 바람은 차고 몹시 추웠다. 그는 눈 덮인 산길을 걸어서 가리라고 마음먹고 화양계곡 쪽 고갯길을 넘었을 것이다. 그 쪽은 법주사를 갈 수 있고 공림사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이 지쳤을까,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미 세연이 다한 것을 알았을까. 산 고개 늙은 소나무 아래에 있는 바위 위에 조용히 정좌한 채로 열반에 들었다. 며칠 후에 지나가던 나무꾼이 그의 죽음을 발견했다 먼 곳에서도 죽음을 알아보라고 바랑과 옷을 나뭇가지 위에 걸어놓아 그것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삼각산 도선사에서 행자 생활을 할 때던가. 어느 노스님이 내게 율무 염주 하나를 주면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옛날 납자들은 목에 율무 염주 하나를 걸고 다녔다. 산길을 가다가 지쳐서 죽으면 시체는 썩고 그곳에 목에 걸고 있던 염주가 싹이 터 율무가 된다. 본시 율무는 목에 걸고 다니다가 육십 년 내지 칠십 년이 지나도 싹이 트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은 산길을 가다가 율무가 무성하게 자라있는 것을 보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반야심경을 읽고 지나가는 것이란다.”
운수납자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언젠가 나는 생각 중에 이런 시 하나를 지은 적이 있다.
석장이나 하나 짚고서 눈이사 먼 하늘에 담아 수목 우거져 새 우는 곳이면 내 어디든지 가리. 가다가다 머리틸은 희어지고 내 힘 다하면 어느 양지바른 두렁 밑이라도 앉아 내 마지막 종을 울려야지.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