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1~16 /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1~13절 양들이 풀을 뜯고 있을 때 늑대나 이리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목자가 이리나 늑대와 싸우면 목숨이 위태할 수 있습니다.
이때 목자와 삯꾼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삯꾼은 삯을 위해서 목자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삯꾼은 삯이 목적이므로 자신의 손해가 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삯꾼은 자신에게 손해가 날 때는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목자는 목숨을 걸고 이리나 늑대와 싸웁니다.
목자는 자신의 생명보다 양들을 더 사랑합니다. 선한 목자는 목숨까지 희생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희생합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신뢰하는 것은 부모의 희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멋있는 말을 하는 자가 있지만 생명을 내어주는 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 부귀영화를 버리고 생명도 버리셨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버려야 합니다.
삯꾼은 자신의 목숨을 살고자 양들을 과감히 버리는 자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늑대요, 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공격하면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목숨을 버리는 길을 가십니다.
삯꾼과 목자를 구별하는 시험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목숨입니다. 양들이 위험에 빠질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선한 목자로 양을 살립니다.
아버지가 췌장암이 걸려서 죽는데 딸이 울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울지 못하게 하려고 전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며 딸을 위로합니다.
딸을 사랑하니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시간을 희생하고 돈을 희생하고 심지어 자존심까지 희생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14~15절 목자가 돈의 가치로 따지면 큰 값이 안 나가는 양을 위해서 어떻게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요? 가치를 계산해 보십시오. 손익계산을 해보십시오. 양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하찮은 양을 위해서 어떻게 목숨을 버립니까?
양은 얼마 후에 잡아먹을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러나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자가 양을 알기 때문입니다.
양을 안다는 것은 양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고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죄로 인하여 고통하는 것을 아십니다. 사랑은 아는 것과 일치합니다.
사랑은 손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유익이 되지 않자 출교를 시킵니다.
요즘 사람은 너무 계산에 빠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여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숨까지 버리며 양들을 사랑합니다. 인간은 사단의 이리, 질병의 늑대, 가난의 도둑, 죄의 사자, 죽음의 강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런 우리를 아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고자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과 사망에서 건지고자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16절은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우리에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유대인의 무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을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이방인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고자 하십니다.
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서 구원받을 날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세계 만민을 구원할 그날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교회 다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다녀도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회개하고 믿어야 구원받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 일을 도와주는 일을 목자로 세움 받은 주의 종들과 먼저 믿고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17~20절은 예수님의 목자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찾을 권세도 있다. 나는 이 계명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합니다.
19~21절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또다시 편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하거나 “그가 미쳤다. 너희가 왜 그 사람의 말을 듣느냐?”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귀신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