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사슴의 자태. 돈수 스님
고독이란 말, 그것을 올곧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 말이 그냥 좋게만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어디 한 곳 정 붙이고 살기가 싫어서 바랑 하나를 등에 업고 심심찮게 이 산 저 산 이 절 저 절을 찾아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전국 선원 안 가본 곳, 안 살아본 곳 없이 한 철씩 돌아가며 살았다. 그 때는 사는 곳마다 재미있고 즐거운 추억거리 하나씩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수많은 도우들을 만났고 또 그들과 사귀었다.
젊은 운수객들은 만나면 그 즉시 도반이 되었고 뜻이 통했으며 같이 행각을 떠나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깊이 있게 사귀는 것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룻밤 객실에서 녹차를 마시고 밤을 새워 정담을 나누면 금방 십년지기가 되었다. 그런 시절에 만난 스님이 돈수 스님이다. 우리는 우선 나이가 비슷했고 출가하여 스님이 된 시기도 비슷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때묻지 않은 청순한 구도의 순결이 있었다.
처음 돈수 스님을 만난 곳은 해인사 조사전이다. 현재의 선원은 옛 극락전 자리에 장경각 건물로 지은 멋없는 시멘트 한식 건물이지만, 그 때 해인총림 선원은 선열당, 퇴설당, 조사전 등으로 건물이 나누어져 있었다. 봄 해제 철이었다. 이른 봄이라 아직 가야산 자락에는 잔설이 남아 있었다. 나는 여름 한 철을 해안사에서 지내볼까 하고 방부(승려가 다른 절에 가서 잠시 기거하기를 원하는 일)를 들였는데 돈수 스님은 겨울을 자신의 본사인 해인사 선원에서 나고 여름은 다른 곳으로 갈까 하는 중이었다. 조사전 큰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따뜻한 방 기운 속에서 돈수 스님은 누더기를 깁고 있었다. 그 때 우리들에게는 누구의 누더기가 더 많이 떨어지고 더 잘 꿰맸는가 하는 것이 은근한 자랑이며 멋이기도 했다.
그는 썩 잘 생긴 미남에다가 아주 순한 눈과 이지적인 콧날을 지녔다. 마치 한 마리 산 사슴 같은 첫 인상이었다. 그리고 누더기를 깁고 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멋이 있어 구참의 티가 나고 옛 고승의 전기 어딘가에 나오는 모습 같이만 느껴져서 사뭇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그만 그에게 아주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이후 그와 나의 오랜 인연의 세월이 계속 지속되고 있다.
때묻지 않은 그의 곧은 성품, 진지한 구도의 열정, 우리는 그 때부터 의기가 투합해서 가야산 솔숲을 같이 산책하기도 하고 가끔은 신부락(해인사 아랫마을 이름) 어느 구석의 방에서 인생을 담론하고 도를 탐문했다. 옛 사람들, 이를테면 시인 문객을 호방하게 비평하고 희롱하기도 했다. 그 때 여름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했던 그는 해인사에서 눌러 앉아 나와 같이 지냈고 오대산으로, 다시 이 곳 저 곳 여러 군데를 같이 떠돌며 살았다.
특히 그와 나는 토굴 생활도 몇 번이나 같이 했다. 대개 수좌들은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토굴 생활을 같이 하기는 꺼리는 터이다. 그것은 단둘이 살다보면 자못 마음이 어긋나서 싸움질도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수 스님과 나는 토굴 생활이나 만행 길에서 죽이 잘 맞아 얼굴 한번 붉힌 일도 없었다.
내가 백양사 강원에서 잠시 경책을 읽고 있을 때다. 들리는 소문에 그가 내장사에 와 있다는 것이다. 내장사와 백양사는 산길로 2-3 십리 길이다. 대중처소의 규율상 임의대로 외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리운 마음이 가득해서 할 수 없이 나는 저녁 도량석(백양사는 아침과 저녁에 도량석을 한다. 나는 이때 소임이 도량석을 하는 종두였다)을 끝내고 몰래 빠져 나와 산길을 걸어 내장사까지 갔다. 그 때 그는 단식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라 기운이 탈진된 상태였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반가웠고 밤을 새워 청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달빛을 받으면서 새벽 산길을 되돌아왔다.
그는 준수한 생김새와 어울리게 타고난 예술가의 자질이 있었다. 그래서 서예도 했고, 그림도 고준한 경지까지 이르렀다. 한때는 턱수염도 기르고 가야금, 법금 등을 즐겨 다루었는데 흡사 옛 신선의 풍류 같기도 헸다. 나는 옛 도연명의 줄 없는 가야금을 생각하면서 그의 가야금을 듣곤 했다.
한 번은 강진 백련사 나한전에 나한님 한 분이 없어졌다. 주지 스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예불을 모시러 주지 스님이 나한전에 들어갔더니 없어진 나한님이 제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도 신기해서 아침 공양시간에 대중에게 이야기했더니. 돈수 스님이 밤 사이에 조성해다 놓은 것이라고 하더란다.
돈수 스님의 말인즉 부목(절에서 나무를 하는 일꾼)이 나무를 쪼개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나무토막 하나가 나한님을 조성하기에 딱 알맞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방으로 가져와 끌로 쪼아 그 날 밤으로 나한님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 시간은 자신도 의식할 수 없는 무아지경이었다고 한다.
근자 몇 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항상 풍문으로만 통도사 영축총림에서 입승을 하고 있다느니, 경주 어디에서 토굴 생활을 하고 있다느니 그 동안 연마한 그림 솜씨가 상당 수준 상승했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차 서울 인사동 초입에서 그의 사제되는 돈오 스님을 만났다. 자연 돈수 스님의 안부를 물어보니 안동 봉정사 지족암에 있다고 한다. 나는 이튿날로 봉정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실로 오랜만에 도반을 만난다는 마음으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지족암에 도착하니 오후 3시였다. 겨울의 산중 해는 벌써 산마루 노송 가지에 걸려 있었다. 암주 스님을 찾아 뵙고 이내 돈수 스님을 찾았다. 그러나 암주 스님은 돈수 스님이 지족암에 안 산다고 했다. 아무래도 의심쩍어 나와 돈수 스님의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고 천 리나 되는 먼 길을 찾아왔다고 했다. 돈수 스님의 사형인 암주 스님은 그때서야 웃으면서 지난 봄부터 저쪽 구석에 시멘트 벽돌(일명 부르크)로 어설픈 집 한 채를 짓고 무문관 수행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주지 스님의 안내를 받아 그 무문관이란 곳을 둘러보니 흡사 시골 농가의 헛간채 같이만 보였다. 지붕 높이도 키 한 질이 미쳐 못될 듯하고, 평수도 4-5평이나 되는가. 입구 쪽은 대나무 울타리를 높이 쳐 놓았고, 집 자체를 아예 출입문이 없게 지었다. 울타리 너머는 창문도 보이지 않으니 어디로 숨을 쉬는지 답답하기조차 했다. 식량은 어디로 넣어주는지? 암주 스님의 말씀으로는 일주일에 한번씩 된장하고 쌀을 조금씩 넣어 준다고 한다. 쌀을 넣어 준 곳에 쌀이 없어지면 살아 있는 것으로 알라고 처음부터 약속했다 한다. 도대체 저 좁고 답답한 공간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을 어떻게 견디어 내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요즘은 옛날 스님들 같은 공부인이 없다고 많은 사람들의 한탄하는 소리를 흔히 듣는다. 하지만 보라.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생사를 건 수도자 스님이 있지 않는가. 옛날 경허 스님. 또는 효봉 스님이 이렇게 공부를 하셨다고 했다.
처음 도반을 만나겠다고 부푼 가슴을 안고 급하게 내려왔던 심정은 어디로 가고 그저 그 헛간채 같이만 느껴지는 무문관 앞에서 숙연한 마음으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암주 스님이 쉬었다 가라고 말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벌써 해는 산마루를 넘어섰고 늦겨울 산의 바람은 계곡의 눈 위를 스쳐온 탓인지 칼날같이 매섭기만 했다 혼자 쓸쓸히 소나무 숲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상현달이 노송 가지 위에 걸려 있었다 .
해지자 상현달이 노송 가지에 걸렸는데 산그늘 남은 잔설에 칼날 같은 바람부네.
이 암자에 도를 닦는 운수납자는 문 닫고 들어앉아 삼계를 뛰어 넘는구나.
도반, 얼마나 친숙한 말인가. 어줍잖은 솜씨로 도반에게 이 게송을 드린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