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가 없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들은 프랑스 농민을 말한다. 그러나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동양은 서양에 의해 대변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허구이자 타자화되고 ‘은폐된 서양 자신’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했다.
사이드의 이런 문제 인식은 그보다 23년 전 발간된 프랑스의 사회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책 <슬픈 열대>에도 나타난다. 레비-스트로스가 1935년 남미 오지의 소수부족 지역을 여행하며 쓴 이 책은 서양에 의해 재단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있다. 서양은 곧 이성이자 정의이며 선이고 서양에 익숙지 않은 부족들의 문화는 야만으로 보는, 서구 중심주의의 허구를 탁월한 글솜씨로 풀어냈다. ‘야만 문화’ 탐구를 통해 문명의 허위를 벗겨낸 이 책은 이미 20세기 최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또 문화 비교 연구를 통해 문화의 배경에 작용하는 공통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문명과 야만을 구별할 것 없이, 특정한 문화는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어떤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현상을 지배하는 총체적인 실체가 따로 있다는 이른바 ‘구조주의’의 등장이다. ‘의심하는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했던 기존의 데카르트적 인식론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주체가 사실은 그 배후에 작용하는 어떤 구조의 산물이라고 할 때 ‘나’는 한낱 꼭두각시였다는 뜻이니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좌우되지 않는 구조가 결정한다면 인간의 주체성, 인간 의지, 인간의 해방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구조주의가 남긴 문제였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와 욕망의 중요성을 재발견한 포스트 모던, 탈구조주의, 해체론의 시대가 도래할 때 그의 구조주의는 역사가 될 운명이었다. 그가 지난 3일 100세라는 천수를 누린 뒤 세상과 작별했다. 그와 함께 구조주의는 떠났지만, 탈중심적 사유를 바탕에 둔 그의 인류학은 영원할 것이다. ‘동양’과 ‘야만’을 향한 서양과 문명의 오만한 시선에 대한 그의 고발은 너무 위대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여적) <이대근 논설위원>
댓글---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향년 100세로 잠들다. '야생의 사고' '슬픈 열대' '신화학' 1 '신화학' 2 가 번역돼 나왔고 3, 4권이 계속 나올 텐데 언제쯤일까. 석학이여, 고이 잠드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