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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한여름이라지만, 여름의 어느 구석에서는 가을이 자라고 있다. 뜨겁던 여름을 한국에서 보내고, 미국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며칠을 앓았다. 그러면서, 내가 만난 사람들, 새롭게 공부하기로 한 분야들을 생각했다. 한국에서 좋은 점이라면 대형 서점에 나가서 잘 번역된 여러 나라의 책을 읽는 일인데, 새롭게 만나는 작가들고 있고, 잘 알던 작가의 또 다른 면을 만나는 때도 있어서 참 반갑다. 그것은 마치 오랜 친구에게서 내가 잘 모르는 면을 찾아내는 것 같은 새로움이다. 그렇게 보면 새로움이라는 것은 낯선 얼굴을 가졌다. 아주 오랜 익숙함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낯설음이라고 할까.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 페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리고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등의 멋진 이야기가 내 여름을 설레고, 새롭고 또 기쁘게 했다.
물론 내게 늘 새롭고 낯선 책은 성서다. 한번도 내게 성서는 똑같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의 논문지도 교수 중 한 분은, 도미니코회 수녀인데, 80이 넘었음에도 눈은 반짝반짝하다. 나에게 자기가 쓴 새로운 미스터리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데, 아브라함이 살해 당한 이야기다. 물론 미스터리물답게, 아들을 죽이려 했으며, 자신을 두 번이나 팔아넘겼던, 그리고 자기로 하여금 자기 종을 방에 들이도록 은근히 압력을 넣었던 아브라함을 용서할 수 없는 사라의 심정이 강조된다. 구약성서 학자가 쓰는 이야기라 아마 학문적으로도 하자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즐겁다. 우리는 은밀하게 다음 번 만남에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깊고 또 늘 새롭게 낯선 존재는 물론 하느님이시다. 내가 알았다 생각하면 또 새로운 그분의 모습을 알게 되니 말이다. 어릴 때 내가 알던 하느님, 누군가 내게 가르쳐 준 그런 하느님이 아닌, 늘 새롭게 만나지는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신앙은 그저 습관, 혹은 어떤 관념에 지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누군가 고집스럽게 그저 누군가가 나에게 가르쳐 준 하느님의 모습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면, 그건 신앙의 본질과 조금 먼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신비이신 하느님을 매일매일 우리는 찾아 나서야 한다. 그리고 개인 차원을 넘어서 순례하는 공동체인 우리 교회는 매일 매 순간 새로운 그분의 얼굴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시노달리티(함께 걷기)를 사는 교회를 생각하니, 언젠가 산책길에 만난 거미줄이 생각난다. 서로가 연결되고, 서로를 잘 알고, 또 함께 살아가는. 그런 교회를 조금씩 지치지 말고 만들어 가는 일이 21세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박정은
21세기에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일이 결국 시노달리티(함께 걷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8월 내내 미국 양성자들을 위한 '시노달리티'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데, 지난 3년 세상의 모든 교회가 다 함께 무언가를, 특히 듣는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 갑자기 놀랍고 새롭게 다가온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제 흥미를 잃었다고도 이야기하고, 여전히 교회는 성직자 중심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교회가, 이 시대에 맞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나에게는 놀랍게 다가온다. 특히 이번 시노드에 관련 문헌들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왔던 말은 “신앙감(sensus fedei)”으로 시노달리티에는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감각이 강조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저 사람은 감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감은 상식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신앙적인 방향이나 행동을 이해해 아는 것이다. 물론 신앙감은 내가 경험하는 공동체나 살아가는 세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나는 어떤 신앙감을 가지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시노드는 아마 신앙의 감각들을 모아 공동의 감각, 즉 콘센서스(consensus)를 이루어 낼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현재 10월에 있을 시노드(세계 주교회의)에서 다룰 열 가지 주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이미 정리가 되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고민해야 할 여러 주제에는, 미션을 지향하는 시노달 교회에서 사제나 수도자의 역할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논의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생각해 본다. 새롭게 제시되는 시노달 교회(Synodal Church)의 모델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 걸까 하고. 결국 교회의 모든 주체는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여야 한다. 그렇게 타인 안에 깃든 하늘나라를 새로운 눈과 맘으로 만나는 존재여야 한다. 사실 하늘나라 백성에게 있어, 중요한 일은 어떤 멋진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초라한 일을 어떻게 정성스럽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을 하더라도, 온 맘을 다해서 하라는 말. 빨래를 할 때도, 성당을 향해 걸어갈 때도, 매 순간 하느님을 생각하라고 배웠다. 마음을 높이라고 배웠었다.
늘 같은 바닷가지만, 우리 동네 바닷가에 해가 질 때면, 늘 낯설고 아름답다. 전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얼굴처럼. 그런 하느님의 얼굴을 찾아 나가고 싶다. ©박정은
지금 시노달리티를 공부하면서, 내가 언제나 마음 다해 해야 하는 작은 일이 무얼까 생각해 보니, 열심히 듣는 일이다. 시노달 교회가 경청의 교회라면, 살아가느라 힘든 이야기도 말없이 듣고, 슬픈 일에는 함께 슬퍼하는 그런 일일 것이다. 교리를 가르치고, 성서를 가르치되, 사람의 맘을 들으면서 그들에게서 먼저 배우는 사람일 것이다.
다만, 신앙인으로서 나의 발은 아주 굳건하게, 나에게 주어진 성소라는 터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글라라 성녀의 축일인 오늘은 하루 종일 성녀를 묵상하며 행복했다. 누가 무어라 하든, 가난한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당신의 성소를 누구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살아갔다는 점에서, 작은 사람들을 참으로 극진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겼던, 성녀를 묵상하느라 행복했다. 교회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을 썼다는 점에서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서 행간에 작은 자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배어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
이제 곧 시노드가 열리고 교황님은 이 4년 간의 여정을 정리하시겠지만, 결국 시노드에 있어 중요한 것은 대화와 경청의 교회를 만들어 가는 그 과정일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낯선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그 얼굴을, 듣고 맛들이는 일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교회는 경청을 사는 교회. 바닷가에 모인 이 새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모두 함께 모여 바다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박정은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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