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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기황후 貢女 奇皇后
“모진 비바람에 쓸리고 할퀴어 마모된 돌멩이가 더욱 야물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35
황후의 마지막은 화려한 국상으로 치러졌다. 뭇 대신들은 그녀의 가는 길을 국상으로 치를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지만, 이 역시 황제의 뜻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황제를 살아있는 부처인 양 추앙했고, 그래도 마지막을 ‘황후’라는 이름으로 끝마친 그녀에게는 애도 대신 혀를 차는 씁쓸한 소리만을 전했을 뿐이었다. 상을 치르는 며칠이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비란 자에게는 가장 지옥 같은 날이 되었고, 그 며칠이 지난 뒤 그들 역시 사랑했던 딸과 귀애하던 누이의 곁으로 떠났다.
“폐, 폐하..! 이곳엔 아무도 없-”
“되었다. 잠시 들르러 온 것이니 소란 떨 것 없다.”
이젠 적막강산처럼 되어버린 황후궁 앞을 지키던 병사가, 갑작스레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조용한 말로 그를 타이른 황제가 무거운 표정으로 황후궁에 들어선다. 한숨이 절로 묻어나는 걸음에, 고운 정 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 말을 뼛속 깊이 절감하면서.
황후가 쓰던 방이, 그녀가 싸늘한 몸이 되어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나가야 했을 이 방이 서글픈 울음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을 잃은 방의 몇몇 가구들은 벌써 치워지고 그녀가 사용하던 집기들만 제자리를 잃고서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황제는 그녀가 항상 앉곤 했던 의자로 가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주저앉았다.
‘그런 법입니다. 태자전하. 정작 멀리 떠나보낸 뒤에는 슬픈 감정에 지배당해, 못해준 기억들이 더 많이 나는 법이지요.’
아버지를 잃은 후의 제가 아직 못해드린 것들이 너무도 많다며 울고 있을 때, 스승이었던 진평이 저를 달래며 해주었던 말이다. 그리고 과거의 그 말은 마법처럼 지금의 저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황후는 연제와 평부사에게 사지거열형이 내려졌음을 알고 이 방에서 음독하여 스스로를 끝냈다고 했다. 가여운 사람. 여염의 아내가 되었더라면 충분히 사랑받았을 사람인데. ‘황후’라는 거창한 이름 외엔 아무것도 준 것이 없었다. 파벌이나 당론을 떠나 인간적인 면모의 그 사람이라면 오래도록 우정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까지 황후답구려. 끝까지 그 속내를 내보이지도 않고 그리 급하게 떠날 필요가 있었소. 미안하단 말 한 마디 전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저는 폐하를.. 바라만보는 여인으로는 살지 못합니다.’
그 때에 이미 끝이 난 것일지도. 잠든 제 귀에 슬픈 듯 속삭여 준 그 음성이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황제는 고개를 숙여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저의 가장 큰 잘못은 그 사람을 그렇게 외롭도록 내버려 둔 일. 그것을 깨달으라고 이리도 홀연히 떠나버렸는지도 모른다. 깊은 한숨. 그리고 그리워하는 것은 오늘로 접어야지. 이 방을 나서는 순간 모두, 잊어야지.
그대로 잠시 굳은 듯 멈춰있던 황제는, 언제부턴가 제 어깨 위에 따뜻한 손길이 닿아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찬찬히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은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으로,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잘 될 거라고. 이제부터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고. 일순 황후의 얼굴인 양 착각했던 저를 탓하며 황제는 쓰게 미소 짓는다.
“잊을 뻔 했구나. 네가 있었음을.”
그의 손이, 어깨 위 은의 손을 포개었다. 살짝 숙인 고개로 흐릿하게 웃고 있었다. 만져지는 감촉만으로, 그가 은의 손등에 내려앉은 긴 상처를 쓰다듬었다.
“저는 조금씩 나아가는데, 폐하께선 자꾸 상처들을 하나씩 안게 되시는 것이 두렵습니다.”
“네가 낫게 해다오.”
“제게 그럴만한 힘이-”
“있고말고.”
포개어진 손으로 많은 감정들이 오가는 동안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고요함 가운데 살아있는 두 사람의 심장만이 서로를 향해 뛰고 있었다. 황제는 깊게,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훌훌 털어내듯이 의자에서 일어나 홀가분한 표정으로 은을 향해 섰다. 새로 시작해야 할 때다.
“이 적막한 궁을 모두 허물고, 아주 크고 화려한 궁을 새로 지을 것이다. 후대에도 오래도록 남을 최고의 궁을.”
...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겠느냐.”
은이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은의 양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그 땐 네가, 이 궁의 주인이 되어다오.”
기다렸다. 이 말과 이 순간을. 함박웃음과 함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붕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은이 가만히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뭔가 말을 하려 입을 열면, 모든 것이 꿈으로 허무하게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두려움마저 드는 행복감에 가만히 눈을 감는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다시 시작할 테다. 여기 이 자리에, 필요하다면 그 무엇이라도 밟고 일어서 보일테다.
//貢女 奇皇后//
황제궁 앞에서 고 환관과 진 대인이 마주쳤다. 고 환관이 그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대인 덕분이었습니다.”
“이 늙은이는 자네가 쥐어준 각본대로 움직였을 뿐이지.”
“또한 폐하의 의중이셨다는 것도 알아주십시오.”
“자, 이제 폐하의 다음 행보는 무엇인가. 뭐든 좋겠지만 말일세, 가장 중요한 황후의 입후에 관한 일은 이번 ‘지원’을 임명하신 것처럼 독단하시진 말아 달라 말씀드려주시게.”
“하하, 재상들이 그 일을 폐하의 독단이라고들 합니까.”
“아니랄 수도 없지.”
고 환관은 진 대인의 말 속에서 뼈를 찾아냈다. 그것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재상들이 갑자기 나타난 우겸의 존재에 대해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음이며, 다른 한 가지는 진 대인이 수일 내로 황제를 찾아가 하루 빨리 황후를 맞이하라고 종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재상들의 의견이기도 할 터였다.
진 대인은 이제 새로운 맞수가 되어버렸다. 원의 권력 3체제에서 연제가 떨어져 나가는 과정에서, 진 대인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연제를 밀어내는 이득을 보았다. 그리고 황제 편에서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았다. 무엇이 강점이고 약점인지 모두 알아버린 것이다. 아직 황제와 진 대인 둘의 양립체제가 확실하지 않은 지금, 단 하나 희망을 걸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황후를 내세워 다시 권력을 3체제로 분할시키는 것이다. 황제, 황후, 진 대인으로 나뉜 권력이라면, 게다가 새로 등극하게 될 황후가 은이라면, 원의 패권은 온전히 황실이 장악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폐하를 수행할 자를 손수 고르신 것을 독단이라 하기도 어렵지요. 그 점, 재상들에게 잘 전달하여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게. 그들이 뭐라던, 나는 폐하의 사람일세. 아니 그런가. 하하!”
“그럼 이제부터의 대인의 행보는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야 지금과 다를 것이 있겠나. 지금처럼 싸움 구경이나 하면서, 남은 딸내미 출가나 시키는 게 일이지.”
“아직 출가 못하신 따님이 있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한 몫 거들어야겠습니다.”
“막내 녀석이라 품에서 내어주기 싫어 끼고 있었던 게지. 자네는 신경 쓸 것 없다네. 안 그래도 맘에 쏙 드는 혼처를 찾았으니 말일세.”
“그렇습니까.”
“혼사가 정해지면 내 크게 한 턱 냄세. 그럼 수고하시게!”
막내딸 이야기에 신이라도 났는지 가벼운 걸음으로 멀어지는 진 대인의 뒷모습을 고 환관은 한참 바라보았다. 가죽을 벗겨 안을 들여다 본데도 그 속을 모를 사람. 진 대인은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근하며 걸음을 뗐다.
//貢女 奇皇后//
“궁인 ‘은’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느냐.”
갑작스레 불러 세워진 언주는 제게 방금 던져진 질문조차 깨끗이 잊고 말았다. 말간 얼굴, 정직한 목소리, 저를 내려다보는 투영한 눈동자를 가진 시원스런 이목구비의 얼굴에 잠시 말을 잃었다고 해야 옳았다. 말끔한 관복 차림. 그러나 제가 여태껏 황성안의 생활을 하는 동안은 전혀 본 적 없는 얼굴에 어느 정도 의구심도 들었다. 언주는 반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반걸음 정도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예. 실례지만, 뉘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난-”
“무례인 줄 알지만, 모르는 분께 함부로 궁인의 거취를 알려드리기가 무엇하여-”
...
“‘지원 나으리’라고 깍듯이 예를 차리거라. 너로서는 평생가야 한번 만나기도 어려울 높으신 분에게 무례를 범하고 있느니라.”
중간에 끼어들어 우겸을 대신 소개한 것은 고 환관의 목소리였다. 엄한 훈계 같기도 하고, 어쩌면 농을 하는 것 같기도 한 어투에 고개를 드니, 고 환관이 제 눈앞의 ‘지원’이라는 사람과 제법 친근하게 눈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언주는 그제야 엊그제 궁인들의 수다 가운데 흘려들었었던 소문을 기억해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자, 지원께서 이 맹랑한 것에게 벌을 주시지요.”
“농은 그만 하십시오.”
사과를 건네는 언주와, 그 앞에서 우겸을 골리려는 듯 농을 거는 고 환관, 그리고 우겸이 손을 내저으며 난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던 언주는 목례를 한 뒤 조용히 비켜났고 먼발치에서 우겸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는 사라졌다.
“그 아이, 조금 전 황후궁 쪽으로 가는 것을 본 듯하니 그리로 가보시게.”
“황후궁을 어째서-”
“글쎄. 그 아이에겐 여러모로 연이 깊은 곳이 아니겠는가.”
고 환관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먼저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우겸은 고 환관의 말에 따라 황후궁으로 향했다. 황성 안은 역시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 화려한 궁이라면 어디인지를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겸은 저 앞, 우뚝 솟아있는 황후궁의 지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생면부지의 처음 보는 궁인들이, 저를 향해 형식적인 목례를 건넨다. 그리고 우겸은 어색한 기색 없이 그런 그들을 지나쳤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황성에 머물렀던 사람처럼. 그를 모르는 다른 이들조차 그렇게 여길 정도였다.
황후궁이 가까운 어느 모퉁이를 돌아선 우겸이 드디어, 황후궁을 나서는 은의 모습을 발견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인 은의 모습을.
“아뇨, 폐하. 그 정자와 함께 고양이도 이 궁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인걸요.”
“하하. 그 녀석이 어지간히 네게 굄을 받고 있구나.”
저도 모르게 멈춰서긴 했으나, 몸을 숨기진 않았다. 그러나 함께인 두 사람은 그런 우겸을 모른 체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다. 은은 햇살같이 밝은 얼굴로 아이처럼 재잘거리며, 마치 제게 그랬던 것처럼 황제의 곁에서 발을 맞춰 걷고 있었다. 그의 곁에 나란히. 수줍게 볼을 밝히기도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기도 하면서.
모두 예상하고 각오했던 일이어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큼은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뭘 그렇게 놀랄 일이라고 목석처럼 굳어졌던 저를 상기하며 우겸은 피식, 웃어버렸다.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려다 다시 뒤돌아본다. 그리고는 안심했다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간다. 은의 머리를 여전히 장식하고 있는 붉은 매화를 떠올리면서.
첫댓글 황제랑 은이랑 되면 우겸이는????????????
황제를 연민하되 우겸이를 잊어서는 안되는니라~~~~~~~~~~~~~~~~~~~~~~!!!!!!!!!!!!!!!!!!!!!!!!!!!!!!!!!!!!!!!!
은이에게 붉은 매화 장식은 아직 황제께서 주신 선물이지요? 음.. 갈수록 기억이 가물가물해 다시 한번 복습이라도 해야할 듯 싶네요;; 아, 그리고 진대인이 말한 혼처가.. 혹시 우겸은 아니겠지요??
황제와 은이 잘 되면 좋겠지만.. 음.. ㅠ 우겸이도 가엾구.. 복잡하네요 ㅎㅎ
필요하다면 그 무엇이든 밟고 일어서 보일테다. 왠지 제 심정과 비슷하네요 ㅎㅎ . 황제만 바라보다 져버린 황후를 그래도 황제가 잠시라도 떠올리며 슬퍼해주니 다행인가요, 자 그 다음 제 가슴앓이 대상은 우겸이 될테지요ㅜㅜ
우겸이가조금은안쓰럽네요 ㅜ ㅜ
황제와 은에게 서로는 무엇일까요...?
은에게 황제는 아직 연민에 머물러 있을까요
아니면 모르는 사이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섰을까요?
황제에게 은은 순수한 연모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어느 정도의 계산이 가미된 삶의 위안정도?
그렇다면 우겸과 은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황제와 은 그리고 우겸의 관계가 안타깝게만 보여서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네요ㅠㅠ
은이가 이제황후가 되는일만 남은거같군요 ㅋㅋㅋ아 우겸이가 불쌍하긴하지만 우리에겐 언주도 잇자나요♡으하하 은♥황제 언주♥우겸 이커플밀어?ㅋㅋㅋㅋㅋ [힘드실때는 응석부려두 대셔염 언제든 받아드릴준비가 대어잇답니다!! 제가슴은 은근히 넓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