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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아름다운 건설
각화사 고우(古愚)스님 대담 법문
고우(古愚) 스님(각화사 서암 주석)
1937년 성주 生. 25살 때 청암사 수도암에서 법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 관응스님, 고봉 스님, 혼해 스님으로부터 각각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을 수학. 축서사 김용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 각화사 태백선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각화사 서암에 주석하고 있다.
고우스님은 우리나라에서 최고 오지중 하나이자‘춘양목’으로도 널리 알려진 경북 춘양의 각화사 서암에 홀로 계신다. 태백산 각화사 서암 각화사는 태백산 정상에서 100리 정도 남으로 내려와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천혜의 수행 도량이다.
탄허스님이 와서 보고는 “五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국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도 이렇게는 만들기 어려운 명당”이라 극찬하였다.
지금 각화사 태백선원에는 30여 수좌들이 “15개월 15시간 가행정진 결사”정진을 하고 있다. 뙤약볕이 따가운 칠월 마지막 날 오후에 각화사를 찾은 일행은 법당 앞마당에서 운력하시는 수좌스님들을 보게 되었다. ‘그냥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데 이런 날 운력이라니, 역시 보통 스님들이 아니야.’ 이런 생각에 부처님께 3배 올리고 서암으로 곧장 올랐다. 큰절에서 왼쪽 산언저리를 끼고 15분가량 오르면 아늑한 곳에 자리한 서암이 있다. 암자라야 평판지붕에 한 20여 평 정도 되는 토굴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법당에 부처님이 여법히 모셔져 있으니 암자다. 마당이 제법되고 한곁엔 채전이 또 있으니 터가 꽤 넓다. 스님을 만나 뵙고 미리 준비해간 순서대로 질문을 드렸다.
○ 스님 먼저 출가 인연을 좀 들려 주시죠.
뭐 옛날이야기 그런 거 들어서 뭐 해요. 나 개인 이야기는 뭐 특별한 거 없어요. 공부 얘기나 합시다. 난 장좌불와나 용맹정진 그런 치열한 공부 경험도 별로 없어요. 내세울 게 없는 아주 평범한 중입니다. 청암사 수도암으로 출가했습니다.
조상들은 경북 성주에서 오래 사셨지만, 제 조부 대에 성주에 인접한 고령으로 이사하시어 거기에서 태어났죠. 1961년 25살에 폐병이 들어 절에 요양하러 왔다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처럼 발심 출가가 아니죠. 되도록 산 속 깊이 있는 절을 찾다보니, 청암사 위 수도암으로 출가하였어요. 출가 당시 수도암에는 제 은사가 되는 법희스님이 주지로 계셨습니다.
○ 강원에서 공부하신 얘기를 좀 해주시죠.
용주사에서 관응스님으로부터 기신론을 배웠고, 청암사에서 고봉스님에게 금강경을 수학하고 상주 남장사에서 혼해스님으로부터 다시 금강경과 원각경을 배운 후 선원으로 참선하러 갔습니다.
○ 사교를 마치고 곧 바로 선원으로 가셨다는데 첫 안거를 어디서 나셨는지요? ‘화두’는 누구에게 무엇을 받으셨는지, 같이 정진한 도반이나 당시 안거 분위기도 궁금합니다.
<금강경>을 공부하고 나서 참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나이 스물 아홉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묘관음사 선방으로 갔습니다. 관음사에는 향곡스님이 조실로 계셨죠. 수좌로는 활안스님, 기성스님이 같이 정진했어요. 활안스님은 그 전에 수도암에 기도하러 오셨을 때 알고 있어 무척 반가워하셨고 잘 해주셨습니다. 당시만 해도 선방은 보살님들하고 같이 앉았어요. 어간에는 스님들이 앉았죠. 화두는 향곡스님에게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닌 이것이 뭣꼬?”하는 화두를 받았습니다.
○ 1968~9년 봉암사에 가시어 선원을 재건하여 오늘의 봉암사 종립특별선원의 기틀을 마련하신 걸로 듣고 있습니다. 그 봉암사에 선원을 재건하신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문경 김용사 선원에서 열 명의 대중들이 부처님 당시와 같이 승가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결사 취지로 봉암사로 가게 되었어요. 원융살림을 하고 사중의 대소사를 서로 의논해서 결정하는 결사 도량을 만들기로 한 거예요. 지금은 백련암의 법련스님과 선원장하는 정광스님이 남아 계시네요. 교육원장 무비스님도 왔다 갔다 했죠. 첫 주지를 지금은 범어사 조실하시는 지유스님이 맡으셨습니다. 물론 실제 일은 제가 많이 했어요. 총무를 봤었으니까요. 처음 들어갔을 때는 대중방도 없어서 각방에서 각각 정진했어요. 40살 되는 해 범어사에서 한 철 살고 오니까 저에게 주지를 하라 해서 안 한다고 도망갔더니 대중들이 서류를 꾸며서 총무원의 임명장까지 끊어 놓았어요 (그때 주지 품신 서류를 갖추려고 어느 스님이 수행이력을 대충 만들어 올린 것이 지금의 엉터리 승적부가 되었다고 하심.) 하는 수 없이 주지를 맡게 되었죠. 주지 소임을 맡고는 대중이 한 데 모여 정진할 선원을 지을 궁리를 했습니다.
봉암사는 신도도 별로 없는 도량이라 불사할 형편이 안 되는데, 하루는 쌍룡그룹의
그 이튿날 뭘 도와줄 것이 없나 해서 선방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그래 김회장이 선방을 짓는데 얼마면 되냐고 하길래 제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천 만원이면 되지 않겠냐고 그랬죠. 그 후에 천 만원을 보내왔어요. 그 돈으로 당시 봉암사에 가장 필요했던 선원을 52평으로 넓죽하게 지었어요. 그랬더니 다른 스님들이 불사한 것을 보고는 저런 건물을 어떻게 천 만원에 지을 수 있느냐고 2~3천만원은 들어야 한다고들 하데요. 이렇게 선원을 신축하고 한 데 모여 정진하게 되니 비로소 법도도 서고 정진 분위기가 갖춰졌습니다.
○ 서암스님의 가풍에 대해서도 스님께 듣고 정리하여 사료로 남기고 싶습니다.
서암스님은 ‘言行一致’하신 분입니다. 현대 교육을 받아 현대 감각이 있으셨고, 생활 법문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쉽게 법문을 들려 주셨죠, 유머 감각도 있으셔 아주 재미있었어요. 아주 자상하시고 누구에게 존대말을 하셨어요.
심지어 저인데도 하대를 안 하셨어요. <서장>을 많이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서암스님은 밥하고 반찬을 그렇게 잘 하셨어요. 어려서 일본에 유학하시고 혼자 자취를 많이 해보셔서 그런지 밥을 잘 하셨어요. 그땐 불 때서 밥을 지을 때니까 밥을 잘못하면 먹질 못했어요. 제가 밥 한다고 불 때면 저리 가라하고 손수 밥을 하셨어요. 당신이 전문가라고,
서암스님은 생활을 통해서 불교를 가르치셨어요.
농사짓고 밥하고 바느질 하면서도 공부를 하라고 가르치셨다. 생활을 통해서 온 몸으로 가르치신 거죠. 요즘은 그런 가풍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 각화사 동암에서 혼자 있을 때, 《육조단경》을 무심히 펼치다가 定慧不二品을 보고 어떤 경계를 체험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체험을 좀 들려 주시죠. 동암에서 혼자 공부할 때였죠.
《육조단경》 “정혜불이품”에 ‘정혜가 하나가 되더라도 非道다. 하나가 되어 통류해야 한다’라는 대목을 보다가 이해도 아니고 체험도 아닌 어떤 느낌이 왔어요. “百尺竿頭進一步”란 말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안목이 열렸다고나 할까요. 모든 존재 원리가 이해되었습니다. 이건 화두 타파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당시에는 ‘회광반조’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종 초기 수행법이죠. <서장>의 3분지 1정도는 회광반조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 이후에 서암으로 내려와 조사어록과 민족사의 깨달음총서 시리즈와 같은 불교교리서를 구해와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 말씀인 경전이나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종이 모두 한 말씀이고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깨치신 것이 “中道緣起”이고, 지금까지의 모든 불교사상들이 중도연기를 중심으로 교리를 풀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도 중도연기로 모든 불교 교학체계를 회통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진정한 체험을 하기 위해 다시 화두를 들었습니다. 깨침은 자기가 잘 압니다. 경계에 끄달리지 않아야 됩니다.
조주선사는 120세까지 사셨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오래 사셨느냐고 물으면, 스님은 너희들은 시간에 지배 받아 살았지만, 나는 시간을 지배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좋은 날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마조스님이 ‘어떤 것이 불법이냐 ?’고 물으면 한 대 갈기는 것이 깨치라는 겁니다. 그렇듯이 禪宗은 체험을 강조합니다. 선종은 眞妄과 凡聖을 나누지 않습니다. 本來成佛이고 사실의 세계를 말하는 겁니다.
○ 불교란 무엇입니까 ?
저는 그렇게 물으면 ‘양반이 왜 쌍놈이 되려고 노력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입니다. 부처님께선 깨치고 보니 有情.無情,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가 연기로 존재하고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했습니다. 그래서 ‘불교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흡사 청와대에 앉아서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것과 같은 겁니다. 옛 조사스님들께서 누가 와서 뭐라 물으면 두들겨 패고, 할, 방을 날리는 겁니다. 착각에서 깨어나라. 너 자신을 바로 보라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선종에서는 ‘본래성불’입니다.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습니다. 妄이다 眞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나누면 禪도 아니고 佛敎도 아닙니다. 본래 부처임을 깨치기 위해 화두 공부와 선문답을 하는 겁니다.
○ 부처님께서 ‘緣起’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연기’가 불교의 핵심 사상이라 하는데 ‘연기’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부처님께서 연기를 깨치시고 자주 말씀하시어 연기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연기란 결코 부처님께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시기 전에도 연기법은 있었고 부처님이 나신 뒤에도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법이 아니라 본래 있는 법이라 하셨죠.
연기도 후대에 와서 부파불교가 ‘법’연구를 활발히 하면서 해석이 18부파, 20부파로 나뉘어져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업감연기와 삼세양중인과설이 여기에서 나왔죠. 그래서 연기를 있다, 없다로 해석하게 되는 거죠. 이때 용수보살이 나와서 <중론>을 지어 부처님의 중도연기를 복귀시켰습니다. 대승의 핵심이 ‘중도연기’입니다.
<금강경>, <반야심경>의 핵심이 중도연기, 즉 공空입니다. 가령 ‘집’이란 것도 실상 집이란 실체가 없습니다. 목재와 벽돌 등 건축자재 하나하나의 조합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다 뜯어놓고 보면 모든 것의 조합이지 집이란 독립된 실체가 없는 거죠. 선종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연기를 가장 정확히 계승한 종파입니다. 부처님께서 깨친 법은 곧 연기고 여래입니다. 보편적 진리이고,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이에 위배되는 것은 허구이고, 허상입니다. 이를 철저히 깨는 것이 선종입니다.
그래서 할, 몽둥이 세례가 다반사인 거죠. 임제선사의 활발발한 선풍이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연기는 진리에 바탕 한 필연입니다. 어떤 목적에 의거한 이해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연기입니다. 연기는 삶의 목적이고 목적된 삶입니다.
○ 불교가 현세에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요?
과거, 현재, 미래도 초월하는 것이 부처님 법인데요. 중도연기로 세상을 살면 매일매일이 좋은 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적응하는 소극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그러면서도 때로는 잘못된 관습과 제도를 철저히 타파하는 적극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사성계급을 없애시고 평등을 실천하였고, 전쟁을 막기 위해 몸소 세 번이나 행동하셨죠. 잘못된 거에 대해선 철저한 개혁자였습니다.
요즘 말하는 편가르기 식의 물리적인 개혁이 아니라 평화적인 연민의 생각으로 개혁한 것이죠. 다 함께 더불어 잘사는 좋은 방향으로 바꿔나가려 한 것이죠.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좋은 개혁을 실천하신 거죠. 철저히 공동체에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개혁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불교를 흔히 인과법이라 하는데 ‘因果’란 무엇입니까 ?
因과 緣이 합合해서 果가 되는 거죠. 흔히 善因 善果, 惡因 惡果하지요. 인과 연이 다 연기입니다. 연기로 보면 실체가 없어서 선인 선과, 악인 악과도 초월해 있습니다. 즉 부처님 법, 곧 중도연기로 보면 선과 악을 초월한 절대선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실체가 없다는 눈으로 보면 절대선의 세계이죠. 이것이 생활이 되면 인과를 초월해서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이혼이 증가하고 계층간의 갈등도 극심해지고 있는데, 이것도 연기를 이해한다면 달라질 겁니다.
또 세계 모든 국가의 戰費를 합하면 굶어죽는 사람들을 모두 살리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런 것도 가치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내 안에서 그런 상대적인 것을 떠난 절대적인 선, 아름다움을 찾아야 합니다.
○ 敎團이란 무엇인가요 ?
오늘날 많은 불자와 국민들이 우리 종단의 갈등을 보고
종단과 스님들에 실망하는데
여기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하나요 ?
절대 선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차원으로 확산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승단이 그런 이념으로 모여 사는 곳입니다. ‘나’를 없애고‘無諍’의 삶을 사는 곳입니다. 이 지구상에 이처럼 고매한 이상과 장구한 역사를 가진 공동체는 승가공동체 말고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승가는 인류세계의 보배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것이죠. 본래 부처님께서 뜻하신 교단의 이상은 그런 것이었죠. 저는 이런 공동체 정신과 모델이 국가 경영이나 기업 경영의 모델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승가공동체 정신을 잘 연구해서 이를 사회와 세계에 확산시켜 나가면 대립, 갈등, 투쟁, 전쟁이 없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승가공동체인 우리 종단은
지금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교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죠. 밖에서 모든 것을 찾고 있습니다. 몸은 승단 안에 있어도 마음은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해관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니 갈등이 끊이질 않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측과 그것을 확보하려는 측이 갈리게 되고 서로 다투게 되는 거죠. 이것은 불교의 가치관, 즉 중도연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교가 아니죠.
그래서 우리 종단이 부끄럽게 된 거죠. 그런데 이것을 자꾸 가리고 없는 것처럼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이 요원해지잖아요. 문제의 치부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럴 때 문제의식이 싹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건강한 흐름도 나타날 것입니다.
제가 생각으로는 우리 스님들부터 일대 가치관 전환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밖으로 추구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권력, 물질,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경계에 끄달리는 것이다. 가치관을 바꾸자. 내 안에서 찾자. 부처님 법, 중도연기를 바로 알면 매일매일 좋은 날이고, 그 자리가 영원한 자유고 즐겁고 절대선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불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 승단이 변화하려면 우선 선거를 없애야 하고, 돈 선거가 없어져야 합니다. 지금과 같은 선거, 특히 돈으로 하는 선거는 정말 잘못된 겁니다. 승단 안에 본분 납자들의 모임인 선원 수좌회가 바른 가치관과 수행으로서 승단의 변화에 기여해야 하는데,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승가공동체 정신을 복원하는데 모범도 보이고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제방에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잘 사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흐름이 대세가 된다면 종단도 좋아질 겁니다.
○ 출가란 무엇인가요 ? 출-재가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스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출가와 재가 관계가 너무 높낮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은 안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건 아니죠. <금강경>에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보배로 보시하더라도 부처님의 연기를 이해하고 내면을 전환하여 매일매일 좋은 날로 만들고 진정으로 행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또 그것을 알고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 복이 더 많고 더 훌륭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승가의 개인 잘못 등이나 그런 것을 보지 말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동체, 승가 정신을, 불.법.승 삼보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될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매일매일 좋은 날로 살면 그 안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은 그 안에 무슨 상대 개념이 있겠습니까? 승가다, 재가다 이런 분별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대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승가를 개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 즉, 법의 실현자로 보라는 것입니다. 재가 입장에서도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가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의 보배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을 가져야 스스로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재가 자도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에 귀의해야 하는 거죠. 승가공동체가 그런 가치와 이념으로 존재하는바 그것을 삼보로 보고 귀의하자는 거죠.
그런데 재가자가 그것을 높이 보지 않으면 발 보리심을 내겠습니까? 자기 수행을 위해서도 필요한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三寶라고 붙입니다. 공동체가 삼보입니다. 보물 寶자를 붙였어요. 그만큼 보배로운 겁니다. 그 가치를 알면 그만큼 수행에도 도움이 되고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 불교의 바람직한 직업관이 있는지요 ? 오늘날 현대인의 대부분은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에는 상하 관계가 있고, 여러 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아 어려움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직장 생활을 잘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요.
연기를 이해하게 되면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합니다. 요즘 직장인 5명 가운데 4명은 자기 직장에 불만을 갖고 할 수 없이 다닌다는 통계가 나왔더군요. 그러니까 직장인의 80%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다닌다고 한다면 이건 참 불행한 삶이잖아요. 저는 그것을 보고 아! 직장인들이 일하면서 참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구나,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양주가 최고로 많이 팔린다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그러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모든 가치를 추구하면 ‘월급이 적다’, ‘승진이 안 된다’ 등 여러 가지 밖의 조건을 가치 기준으로 삼는 것이죠, 그런데 내면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지를 깨달을 겁니다. 그것은 부처님 당시에 똥 푸는 사람도 가치와 의미도 되찾게 해줬잖아요. 직업에는 천하고 귀한 것이 없습니다.
비교 안 하는 마음, 실체가 없다는 그 자리, 공이라는 그 자리를 이해하게 되면 첫째, 비교 안하거든요. 직업이 좋다, 나쁘다는 비교를 안 하게 됩니다. 실체가 없는 公心으로 일을 바라보면 그 일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사람 챙기고 대립하고 갈등하는 마음도 사라져 公心으로 서로 협조하고 타협하면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일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발견된 사람은 직장에서 자기하고 생각이 반대되는 사람도 증오의 대상이 아니고, 미움의 대상이 아니고,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나에게 불이익을 줘서 내가 화가 났다, 그러면 불이익을 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까지 내서 내가 나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더 억울해지는 거죠. 그래서 저 사람이 나에게 불이익을 주고 화나게 만들더라도, 나는 내가 보호를 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내야 합니다. 그게 인욕입니다. 참아서 인욕 하는 게 아니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인욕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호하느냐, ‘나’라는 실체가 없다, ‘아상.인상.중생상’이라는 실체가 없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면, 지금과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서로 승진하려고 애를 쓰고, 별 불법적인 수단을 다 동원해서 목적을 성취하고 상대를 꺾으려고 하는 무한경쟁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정말로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거죠.
그런데 자기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무한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무한향상을 하는 거죠. 그래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주위에서 인정받고 무한히 자기 발전하면서 貴賤, 高下를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가치도 인정하는 무한히 향상하여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무한 향상하는 사람이 많아야 좋은 직장이 되고, 좋은 사회가 되고, 훌륭한 국가가 된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기중도를 이해하는 것, 상대 개념에서 절대 행복으로 가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 색이 공이다 는 자리, 그 자리에 가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평등한 자리이기 때문에 비교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평등한 그 자리는 아무 의욕도 없고 허망하고 그런 자리가 아니라 비교하는 마음이 없어짐과 동시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주 밝은 지혜가 나옵니다. 밝은 지혜, 그래서 원시불교에선 지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광이 생겼다. 명이 생겼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지혜광명이 생겼다 한꺼번에 말해 버립니다.
智.慧.光.明 禪宗에서는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는 것은 개개인이 자기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대로 무한 향상하는 독립되고 자립해있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독립됨과 더불음이 원융무애하여 활발발하게 중도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禪도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에도 보편되어 있고 모든 일에도 보편되어 있어 시간도 공간도 초월해서 영원합니다.
○ 오늘날 한국불교계 불자들의 기복신앙에 대하여 비판적이신 데 그 문제점과 대안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기복신앙을 해서 그 기도가 성취가 됐다고 해도 그 행복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행복입니다. 행복과 불행이 계속 교차 반복되는 겁니다. 부처님이야말로 상대적인 행복은 다 가졌던 분 아닙니까? 그런데도 부처님은 그 왕자의 지위를 버렸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 행복을 찾으셨던 거죠. 절대 행복을 추구하려면 밖으로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해야 되는 겁니다. 안에서 가치를 찾게 되면 밖의 것도 다 수용하면서 절대 행복으로 가는 겁니다. 밖의 것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다 수용하면서 갈 수 있습니다. 그게 절대 행복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수달다장자가 있었습니다.
장자는 재산이 굉장히 많은 부자였는데 부처님께서 무상,무아,무소유를 강조하시니까 고민이 되어
부처님께 ‘재산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여쭈니까
부처님께선 ‘너는 더 가져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수달다는 한역하면 급고독(給孤獨)입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에게 보시를 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큰 것을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소유를 강조하셨다고 모든 것을 버리라고만 하신 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하는 절대 행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속되는 행복이니까 그것을 찾으라는 것이죠. 生老病死까지 진리로 보고 해탈할 수 있는 행복 말입니다.
○ 오늘날 현대인들이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첫째, 正見이 생겨야 합니다.
정견이 뭔가 하면 중도연기로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생긴 것을 말합니다. 팔정도(八正道)에서 정견이 맨 앞에 놓여 있습니다. 정견이 없으면 그 뒤 나머지는 하나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팔정도도 정견으로 시작해서 정견으로 끝난다고 봐야 합니다. 정견이 생겨야 연기에 대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중도연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선 부처님이 본 연기(緣起)관으로, 존재 원리를 보고 이해해야죠.
이해를 하고 그것이 좋은 줄 알고, 그것을 체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거든요. 부처님이나 선지식이 살아 계신 시대에는 사람이 모델 역할을 했죠.
부처님을 보고, 선지식을 보면
아 나도 저렇게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그런 선지식이 없는 시대에는
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법에 의지하려면 이해를 해야 되거든요,
사람 모델을 보고 하는 것도 이해는 이해입니다.
사람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어야겠다.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저렇게’ 가 바로 이해이죠.
이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법의 내용입니다.
사람을 보고 이해하든지, 법을 보고 이해하든지,
그렇게 이해한 것이 正見인데,
정견을 세우면 가치관이 바뀌는 거죠.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면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살면 불이익 받고 바보 취급 받고 왕따 당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은 정견이 안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불교 이해는 오해입니다.
정견을 바로 갖춘 사람은 지혜로우니까 눈 앞에 이익을 보는 게 아니라 멀리 보고 널리 보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행위 하는 것입니다.
개인도 이익 되고 남에게도 이익 되니 모두에게 이익 되는 거죠. 그것이 확대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없이 정말로 인간답게 가치롭게 살게 되는 거죠.
그런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하면 정말 잘 살 수 있을 거고, 그 집단에서 얼마든지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이익 받는다, 바보 취급 당한다고 걱정하는 것은 정견도 안 갖춘 사람이 지레 짐작으로 억측을 해서 무조건 착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희생하는 게 불교라고 잘못 생각하는 거죠. 불교는 절대 그게 아닙니다. 불교는 어찌 보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겁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또 남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걸 말하는 것이지 뭘 희생하고 그러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은 착하게 사는 게 희생한다, 손해 본다고 자꾸 생각하니까 불교를 오해하는 겁니다. 바로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
그래서 정견을 세워서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 참선이란 무엇인가요?
참선을 이야기 하려면 오늘 하루 종일 이야기해야 되지만, 예를 들어 봅시다. ‘무엇이 불법입니까?’ ‘마른 똥 막대기다.’ 그러면 똥 막대기라고 일러줘서 그 사람이 깨달았다. 그럼 똥 막대기라 일러준 선지식이 있고, 깨달은 사람이 있잖아요. 이 두 사람이 뭐와 같은가 하면 백옥 같은 맨 살을 긁어서 상처를 낸 것과 같다. 즉, 똥 막대기라 일러준 선사도 괜히 백옥 같은 맨 살을 긁어서 상처를 만든 것과 같고 물어서 깨닫는 사람도 그와 같다. 그게 禪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양반이 쌍놈 되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이 일구(一句)의 세계는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어 진리라 하고 삶이고 사실이고 본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는 참선은 즉, 맨 살을 긁어서 깨닫는 세계, 제 이구(二句)의 세계인데요. 제 이구의 세계에서도 순간적으로 깨치는 사람이 있고,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순간에 깨치는 사람은 선사가 베푸는 방편에 바로 계 합하는 영리한 사람입니다. 똥 막대기라 하는 데서 탁 깨쳐버립니다. 상 근기죠. 그건 의심하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긴 시간이 걸리는 사람은 그게 안되니까
‘이게 뭐지?’하고 의심하기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선사가 똥 막대기라 했을 때 의심하라 해서 준 것이냐 하면
절대 그게 아니거든요. 바로 깨치라고 준겁니다.
그러니까 조사 입장에서 부득이 해서 그것도 둔하게 깨달아 가는 길이 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절대 의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흔히 화두는 의심하기 위해서 정신통일 하기 위해서
참구한다 그런 사람은 참선 근처도 못간 사람입니다.
분명히 동기가 다릅니다.
결국 의심하기 위한 의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 화두란 무엇인가요?
화두가 바로 그거 아닙니까. 한자로 화두(話頭)는 말할 화(話)자고 어조사 두(頭)입니다. 그냥 말에 대한 가치를 나타내는 추상명사입니다. 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고칙(古則)이라고도 하죠. 어떤 사람들은 화두와 공안을 다르다고 구별하는 모양인데 묻는 곳에 답이 있고, 답하는 곳에 물음이 있으니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른 똥 막대기다’, ‘뜰 앞의 잣 나무다’ 하는 것은 깨치라고 말한(話) 것뿐이에요.
우리가 일상에 쓰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죠. 있다 없다, 너다 나다, 가다 오다, 좋다 나쁘다. 그런데 ‘뜰 앞의 잣 나무다’ ‘똥 막대기다’ 하는 말은 상대적인 말을 초월한 절대적인 말이거든요, 그게 진짜 백이 말입니다. 그 절대적인 말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그대로 깨달으면 됩니다. 공안도 공과 사를 초월한 공(公), 고칙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고(古), 화두도 있다 없다 를 초월한 말(話)입니다. 모두 같은 소리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깨달으면 됩니다.
그런데 깨치라고 제시하는데 못 깨치니까,
하는 수 없이 의심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도 둔근기들에게는 깨치게 하는 방법이니까
그냥 놔두는 거죠
. 의심하라고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놔두면 또 잘못 될까 봐 <禪要>에서는
‘숙맥(菽麥)도 모르고 노 낭(奴郞)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 고 했어요.
콩하고 보리도 못 가르는 놈,
신랑하고 종을 못 가리는 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것은 쑥 맥도 모르고 노 낭도 모르는 놈이
하는 짓이다.
그러니 禪宗은 철저히 상대 개념을 벗어나서
절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행동하고 말하는 겁니다.
쑥 맥도 모르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최 상승 공부를 하고 있고 최고 근기다 하면 그 분상 의식구조에서는 목과 어깨에 깁스하게 되죠. 그런 스님과 신도가 많이 있잖아요.
폼으로 공부하기 위한 공부,
의심하기 위한 의심을 하면 되겠습니까 ? 안됩니다.
순간 깨침과 참구 깨침도 방편입니다.
이건 손가락 불교입니다.
절대 그 자리에서 보면, 한 방망이 감이지만,
상대적인 말이 아니고 절대적인 말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자꾸 비워가고 놓고 쉬는 공부입니다.
물에 비친 달을 건지듯이 말입니다.
○ 그러면 일반인들이 직장에서 업무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수행할 수 있습니까? 업무를 정상적으로 하면서도 화두를 들 수도 있다는 것인지요?
처음 화두 공부를 할 땐 나라는 주관과 일이라는 객관이 많이 벌어져 있으니 어렵겠죠. 그런데 자꾸 공부를 하면 나와 일이 하나가 되듯이 일과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일하면서도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불교 삼매(三昧)의 특색입니다. 다른 종교는 삼매에 들면 모든 행위가 정지가 됩니다. 심지어 모든 생리 작용도 정지가 되지만, 불교 삼매는 모든 행위를 하면서도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게 왜 가능하느냐 하면, 우리가 성성적적(惺惺寂寂) 공부를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적적(寂寂) 공부만 하면 그게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의 삼매는 오직 불교만의 삼매이고 바로 우리 존재 원리가 그렇게 적적성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최근에 ‘看話禪의 위기’ ‘선지식(善知識)의 부재’ ‘중생과 유리된 참선수행’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스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병(病)의 근본 원인은 利己心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에서 모든 문제가 파생됩니다. 어느 시대든 형태만 다를 뿐이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고(苦)는 이기심에서 생깁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윤리도덕이 강조되던 시대라서 조금 완화되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없어져 버린 자본주의사회에서 더 병이 깊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현대인들의 잘못된 삶에서 오는 위기, 전쟁도 다 이기심 때문에 일어나는 거잖아요. 이런 문제의 원인을 알아서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을 우리가 내놓을 수 있다면 간화선의 위기가 올 턱이 없죠.
그러면 禪이란 것이 필요에 의해서 특정인이 선택해서 하는 것이냐. 그게 아닙니다. 禪이란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에 보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필수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해해야 되고 수행하는 삶을 살아서 자기 안에 평온을 찾고, 세상도 평화롭고 평등하여 각자 자기 삶의 가치도 알고 즐겁게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특정인이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위기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간화선에 위기가 왔다면 누가 먼저 책임져야 하느냐, 일차적으로 스님들이 책임져야 하겠죠. 스님들이 그런 가치관을 이해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서약하고 사는 승가의 일원이니까요. 불교(禪)를 전문으로 하겠다는 스님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생활화하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은 더 알 수 없는 것이겠죠. 이것은 우리가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간화선의 위기란 것을 특정 계층이 잘했다, 잘못했다 이런 차원을 떠나서 전체의 입장에서 봐야 됩니다.
선이란 모든 존재에 보편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 계층의 위기가 아니고, 인류 전체의 위기로 보아야 합니다. 계층 갈등, 이데올로기 갈등, 종교 갈등, 인종 갈등, 민족 갈등 등 모든 갈등을 보편된 존재원리인 선의 입장에서 서로서로 인정하고 ‘다(多)가 하나(一)고 하나(一)가 다(多)’라는 것을 스님들이 가르쳐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간화선 만의 위기가 아니라 전 인류의 위기라고 나는 봅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우선 승가가 가치관을 전환하여 그 전환된 가치관을 추구하는 승가공동체로 복원하고 정말 수행과 교화의 본 분사에 일로 매진하는 아름다운 수행공동체를 통하여 인류에 이익을 주는 모범을 보여 주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설득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님들부터 가치관을 전환하여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니 정말 좋다, 이 길이 평화롭고 행복한 길이다 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 근래 우리의 전통 수행법 이외에도 남방의 전통 수행법인 위빠사나가 많이 보급되어 확산되고 있습니다. 간화선 입장에서 위빠사나 수행 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선종 조사선의 특성은 부처와 중생을 나누지 않는데, 위빠사나는 진(眞)과 망(妄)이 있고 부처와 중생을 나눕니다.
禪宗은 철저히 진리에 입각해서 수행체계를 만든 겁니다.
달이 있고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이 있는데
선종은 달에 의거한 종파이고,
손가락에 의거해서 만든 것이 위빠사나라는 것이죠.
선종은 상대를 초월한 절대 자리에서 하는 수행 법이고,
남방 수행 법은 상대적인 입장에서 부처다 중생이다,
진이다 망이다 등으로 상대적인 입장에서 하는 수행 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수행하는 방법의 차이로만 보면 안됩니다.
선은 절대에서 하는 것이고,
남방 수행은 상대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선은 최상승선이라고 합니다만,
절대 자리에서 보면 자타(自他), 우열(愚劣), 귀천(貴賤)이
없는 최 상승이 보편되어 있기 때문에 최 상승입니다.
그러나 적적성성 성성적적으로 적과 성을 함께 쌍수 한다는데 동일한 점이 있으나 깨달음에서는 위빠사나는 점진(漸進)적인데 선종은 돈오(頓悟)적입니다.
이 말도 또 부정하는 것이 조사선(祖師禪)입니다.
○ 근래 일반인 사이에 수행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 확산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 뿐 만아니라 불자들도 간화선, 위빠사나, 아봐타, 동사섭, 마음수련 등 다양한 수행법 사이의 관계나 우열에 대해서 답답해 합니다. 전통 선의 입장에서 한 번 정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양 쪽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 동안 그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물질이나 과학 등이 발전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다가 그 물질과 부, 과학 발달 등이 더 인류를 불안하게 하고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다.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니까 밖으로 행복을 추구하던 것에서 내면의 성찰로 돌아오고 있는 게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것을 쫓아가고 있으니 참 한심하죠. 그래서 서양사람들이 물질이나 밖으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 뭔가 해결할 수 없는 건 가하고 동양 종교와 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도 계속 불안하고 경제 위기, 전쟁 위기도 날로 가중되니까 뭔가 행복의 조건을 내면 세계에서 찾게 되는 거죠. 어떻게 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을까 하고 수행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절대 행복의 길, 정법(正法)으로 바로 가야 되는데 그런 흐름에 편승해서 호구책을 삼는 나쁜 흐름도 나오게 되는 겁니다. 수행이 상품화되는 겁니다. 말이 안되죠. 그런 나쁜 흐름에 빠진 피해자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신흥종교만이 문제가 아니라 기성종교도 그런 흐름이 없지 않아요, 그게 문제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은 수행 방법의 대단한 혼란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선택을 잘 해야 됩니다.
수행이 상품화되는 게 제일 문제입니다.
정법(正法)도 상품화하면 사법(邪法)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하죠.
불교 수행은 쌓고 얻기 위해 하는 게 아니고
자기를 버리고 비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것이 최고 중요합니다.
그게 철저히 되려면 유형무형의 모든 존재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알아야 합니다.
정견(正見)을 갖추고 발심(發心)해서 바른 수행을 해야 합니다.
○ 강정진거사란 분이 <영원한 대자유인>이란 수행지침서를 냈는데 여기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지요?
사람 개인에 대한 이야기니까 조심스럽고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걱정스러운데요, 작년 여름에 누가 책을 가져와 대강 읽어 보았어요. 새로 개정판이 나왔다니 어떻게 바꿨는지 모르지만, 작년 여름에 본 걸로는 그건 아닙니다. 조사선은 부처와 중생을 나누지 않는데 그 책은 시종일관 철저히 구별을 하고 있고, 방편과 법의 구별도 못하고 있습니다. 거사 본인이 깨쳤다고 하는데 그 깨침도 불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어요. 깨침은 꿈을 깬 것 같고 구름이 걷히고 햇빛 보는 것과 같이 분명해야 합니다.
또 깨침을 인가 받았다는 밀양 표충사 암자의 노스님이란 분은 저도 뵌 적이 있는데 그 분이 인가할 그런 경지는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수행법도 깨달음도 방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사선에서는 그런 설명은 발도 붙일 수 없겠지요. 그런 면에서 뭐 별로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제도가 발전하면서 개인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자포자기하여 자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경쟁 위주의 삶이 질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불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
앞서도 말씀 드렸듯이 ‘무한향상(無限向上)’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견(正見)을 세우고 발심(發心)하면 자기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경쟁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으니까 그냥 즐겁고 열심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무한향상이 가능하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자기 일 자체가 굉장히 즐겁겠죠. ‘무한경쟁(無限競爭)’하는 그런 삶은 잘못된 삶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입장에서 삶을 사는 게 아니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삶을 사는 거죠. 상대가 있으니까 계속 대립, 갈등, 투쟁이 끝나지 않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관으로 정견을 세워서 발심하면 그런 상대적인 삶이 아니고 절대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상대를 초월한 절대적인 삶을 살면 상대와 경쟁하는 게 아니라 남도 도움이 되고 자기도 덕이 되는 그런 절대 향상으로 가는 삶이 됩니다. 그런 삶을 살면 거기에서 가치와 의미가 깨달아집니다. 거기에는 일체의 대립이나 갈등, 투쟁이란 게 뭔지 모르게 됩니다. 설사 그게 있다 하더라도 적대감을 갖거나 누굴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게 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더라도 그런 원인을 제공하는 사건이나 원인을 연민으로 보죠. 연민으로 보면 나의 감정도 순화되고 정서도 안정되어 자기 정화가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증오심, 적대감 이런 게 나오면 자기 존재 원리를 파괴하고 학대하고 구박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상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문제이지.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경계를 없애지 않고 자기를 없애는 입장에서 삶을 살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는 그대로 두고 경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 경계를 없애려면 한 두 개 입니까?
경계가 하루에도 천 개, 만개나 될 텐데
그걸 없애려면 지쳐서 자기가 죽게 됩니다.
그걸 그대로 두고 자기만 없애면 다 없어지잖아요.
이런 삶은 생사(生死)도 초월해서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될 것입니다.
○ 한국사회가 갈등이 심화되고 북한과 미국의 전쟁 가능성도 날로 높아지는 등 어려운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이런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신다면? 개인의 문제는 가치관을 바로 잡아 해결하면 되는데 사회제도적인 문제, 즉 계층간의 문제,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이 가능한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견(正見)을 세우고 발심(發心)해서 무한향상(無限向上)의 입장에서 사회의 모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지요. 그러고 때로는 미련하게 안 되는 걸 자꾸 밀어붙여서 더 대립 하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도 지혜가 없는 거죠. 때로는 참고 적응할 줄도 알고 강약도 조정해갈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북한 핵 문제 같은 것도 적대감으로 대하는 게 아니고 하나된 입장에서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거죠. 대량 살상무기를 만들고 잘못하면 한반도를 파괴하는 동족을 말살할 수 있는 미련한 길로 가고 있잖아요.
그 방법이 적대감이나 대립하는 입장에서 자꾸 하다 보면 그런 문제가 더 심화되어 정말 대량 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므로 우리의 시각이 고쳐져야 됩니다. 하나된 입장에서 평등한 입장에서 또 적대감을 안 가진 입장에서 증오심 없이 연민의 정으로 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이 바른 길로 가도록 해야 되는데 그러면 무한정 그렇게 유화적으로 해야 하는 거냐 무한정 유화정책만 사용해서 가능하겠나? 그러면 부처님은 그렇게 유화정책만 썼느냐? 부처님도 유화적으로 하시면서, 또 한편으로 위엄으로 대하는 방편을 사용하셨어요.
서산, 사명 스님도 살상하는 전쟁에 참여 하셨잖아요. 그러면 그게 자비가 아니냐? 그것도 자비입니다. 가령 서산, 사명 스님과
아프리카에서 슈바이쳐박사가 어떤 아이가 잘못하니까 머리에 꿀밤을 한 대 주니까 관광객이 그걸 보고 폭력을 썼다고 성자가 아니라고 했다는데 그 분이 정말로 아이가 미워서 폭력을 썼겠습니까 사랑과 자비를 바탕으로 한 겁니다. 그러니까 같은 전쟁이라도 연민과 자비가 바탕이 되어서 한 거 하고 상대 개념에서 적아를 나누어 적대감과 증오심으로 한 거는 내용이 다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렇게도 할 수 있는 거죠.
사회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때, 계층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령 정부가 정책을 잘못하고 독재를 한다고 할 때 그걸 적개심으로 증오심으로 하면 안되겠죠. 하나된 입장에서 평등한 시각에서 연민으로 대해야 합니다. 자비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불교는 무조건 순응하고 적응하고 유화적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는데 그것만이 불교가 아닙니다. 또 어떻게 보면 불교가 늘 정권에 협조적이었죠.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때 그 때 상황에 따라서 강 온을 쓰되 바탕은 자비로 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는 그때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자비로 연민으로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도 당시 인도의 사성계급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완전히 혁명하셨잖아요.
인간사회에는 개인 업(嶪)도 있지만,
공동 업도 있고 시대 업도 있습니다.
가끔 개인 업도 보지만 공업을 보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공업(共業)은
집단 이기심(利己心)이 제일 문제입니다.
흔히 지역 갈등, 계층 갈등, 남북 갈등 등으로 나타나는 데
본질적으로는 집단 이기심, 개인 이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한은 국가가 발전할 수도 없고
사회가 안정될 수도 없고 그러니까 혼란은 계속되는 겁니다.
집단 이기심을 공동 이익을 위하는 의식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지혜를 개발해서 대처해야죠.
흔히 불교를 ‘비폭력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데 비폭력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게 비폭력이 아닙니다. 자비(慈悲)로 하는 게 비폭력입니다. 밖의 모양이 아니고 그 정신 즉 공(空), 무아(無我)의 정신이 중요하죠. 일체 차별이 떠난 그 자리, 평등한 자리, 그 정신이거든요. 그러면 거기에는 상대가 없는 자리잖아요. 상대가 없으니까 공허하고 허무한 자리가 아니고 그 상대가 없는 그 자리가 공동의 이익을 위하는 공동체의식의 그 자리입니다. 나도 잘 되고 남도 잘되는 그런 지혜가 거기서 나옵니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 꼭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스님 그런데 만약 부시대통령이 이라크와 전쟁하면서 자비로 하는 거라고 선전하면서 전쟁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자비를 이용하면 더 나쁜 사람이죠. 지금 부시는 그런 거는 아니잖아요. 부시는 테러를 힘으로 대응하겠다는 거죠. 예를 들어 나한테 테러라는 불이익을 주니 나는 그 테러라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 그 사람들과 그 집단을 없애야겠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상대편이 불이익을 준다고 같이 대항하는 거잖아요. 같이 대항하고 싸우는 것은
남이 나를 화나게 했다고 나도 같이 화를 내게 되면
그것도 결국은 자기를 학대하고 구박하는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을 나는
그게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데올로기 갈등, 종교 갈등, 인종 갈등, 민족 갈등 이런 것이
모두 상대적인 입장에서 사는 삶에서 나오는 거죠.
흑인이다 백인다, 기독교다 이슬람이다 이런 상대적인 삶은
모두
우리가 말하는 절대적인 삶의 입장이라면
자비와 연민으로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이 <법회와 설법>이 주지스님들께서 주로 보십니다. 주지스님들께 한 말씀해주신다면?
그러니까 상대 세계가 아니라 절대 세계로 가서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지배 받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매일매일 좋은 날을 만드는 길은
참선만 있는 게 아닙니다.
봉사를 통해서도 됩니다.
육조스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육조스님이 출가 전에 당신 어머님에게 극진한 봉사를 하시다가 출가하여 대중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시면서 밤 중에 오조 홍인스님 방에서 결국 <금강경> 구절을 듣고 깨치신 거잖아요. 육조스님이 참선만 하셔서 깨친 게 절대 아닙니다.
봉사가 자기희생이 절대 아닙니다.
봉사란 첫째 자기 한테 봉사하는 것이고
신도한테 봉사하고 대중한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절대 세계로 가는 겁니다.
그걸 뒷받침하고 있는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불교 공부는 전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쌓는 것이 행복인 줄 아는데,
그건 상대적인 행복으로 가는 거고, 불교에서 말하는 비우는 무아(無我)의 행복은 행, 불행이 교차하는 행복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행복입니다.
절대적인 행복으로 가는 길인 봉사는 희생이 아닙니다.
남에 대한 봉사가 자기에 대한 봉사입니다.
자기에 대한 봉사가 남을 위한 봉사입니다.
결국 참선도 자기와 남에게 함께 봉사하는 수행입니다.
첫댓글 승가를 개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 즉, 법의 실현자로 보라는 것입니다. 재가 입장에서도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가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의 보배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을 가져야 스스로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재가 자도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에 귀의해야 하는 거죠.
봉사란 첫째 자기 한테 봉사하는 것이고 신도한테 봉사하고 대중한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절대 세계로 가는 겁니다.
‘무한향상(無限向上)’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정견(正見)을 세우고 발심(發心)하면 자기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경쟁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으니까 그냥 즐겁고 열심히 하게 되는 겁니다. - 본문중에서 발췌
많은 공부하고 갑니다.. 그간에 궁금증이 좀 풀린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 주신 어질이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