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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일로 詩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골드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무대인 피렌체의 상징인 두오모
"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언젠가 함께 올라가 주지 않겠어?" "언제?" " 먼 훗날 " " 먼 훗날 언제? " " 글쎄 한 십년 뒤쯤 " " 10년 뒤라 그럼 우린 30살이야. " " 21세기." " 우린 변해 있겠지. " " 우린 안변해." " 정말?" " 우린 변함없이 함께 있을거야." " 그럼 준세이 약속해줄래 내 서른 번째 생일날에 피런체 두오모에서." " 알았어,약속할게."
지금으로 부터 한 십오육년 전 베스트셀러였고 영화로서도 흥행에 성공한 [냉정과 열정사이-Between the calm and passion]중의 주인공 아오이와 준세이가 나눈 대사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다. 대학 1학년 때 단돈 10엔 때문에 인연이 되어 이들은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그들은 교정에서 뜨거운 첫키스를 나눈다. 첼로연습을 하다 때때로 곡의 연주가 막히는 한 음대생의 서툰 연습곡을 들으면서 ...
그러나 그들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그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아오이는 피렌체에서 현지 이태리 은행원인 마빈과 행복한 동거생활에 들어가 보석가게에서 일하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한다.
한편 준세이는 고미술품 복원사로 역시 피렌체에서 메미라는 일본인 여성과 동거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친구들로부터 아오이의 소식을 듣게 된다. 아오이를 만난 후 그는 아오이의 초청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아오이의 집에 가게 되는데 아오이의 남자 친구 마빈이 준세이의 할아버지 그림을 보여주며, 당신 할아버지 그림때문에 아오이로 부터 호감을 받아 이처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오이의 집을 방문해 아오이의 행복한 가정생활을 목격한 준세이는 그만 폭발하는 까닭모를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동거생활 중인 준세이의 애인 메미는 준세이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육탄공세를 벌이지만 준세이는 목석처럼 그녀를 대한다.
그러던 중 고미술품 복원 전문 슈트디오의 여선생은 제일 재능이 뛰어난 애제자인 준세이에 대해 사랑의 메세지를 보내지만, 준세이는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여선생은 준세이를 자기 화실로 불러 그를 모델로 사용한다. 전부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고 그는 몇번의 망설임끝에 옷을 벗고 부끄러운 부분만 타올로 가린채 여선생의 화폭속 모델이 된다. 그 후 여선생은 지난 1960년대 피렌체의 대홍수 때 흙탕물에 젖어 망가진 고대 명화 치콜리의 그림을 복원하라는 임무를 준세이한테 맡긴다. 슈트디오의 다른 직원들이 준세이를 질투한다. " 여선생과 잤느냐고?"
준세이가 아오이를 만나고 온 바로 그날 준세이는 경찰에 체포된다. 미술품 복원 슈트디오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여선생이 맡긴 치골리의 옛 명화가 갈기갈기 면도칼로 찢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트디오의 직원들은 묵묵부답인체 준세이는 경찰에 끌려간다. 준세이는 혐의를 벗지만, 이로 인해 슈트디오의 명성은 금이 갔고 그 여선생은 슈트디오의 문을 닫고 정처없는 장기 휴양을 떠난다. 직장을 갑자기 잃은 준세이는 동경으로 돌아간다.
동경에 돌아온 준세이는 아오이를 잊지 못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들의 첫사랑을 회상하는 장문의 편지를 아오이에게 보낸다. 준세이의 편지를 발견한 마빈은 아오이에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냐고 따진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아오이와 마빈은 서로 냉각기를 갖는게 좋겠다며 별거에 들어간다.
한편 준세이의 아버지는 고미술품 복원 일을 그만두고 귀국한 아들이 집안 대대로 내려온 화업의 맥을 잇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준세이는 첫사랑의 아오이가 자기의 아기를 임신했을 때 자궁내 사망하는 참담한 옛일이 떠오르고, 집안의 친척이 유산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아오이가 임신했는데 이제 두통거리가 사라졌다고 하는 말에 그 친척의 멱살을 잡고, 아오이는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사과하라고 분노하며 싸우는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다시 피렌체로 떠난다. 메달리는 메미에게 어렵사리 자기는 아오이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피렌체로 돌아 온 그는 놀라운 소식을 듣는다. 고미술품 복원 그 여선생이 권총 자살을 했고 슈트디오는 다시 문을 열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슈트디오의 한 일본인 친구는 일이 이렇게 됐으니 사실을 말한다며 그 꼴라지 작품은 너를 사랑하며 또 너의 재능을 시기한 그 여선생이 면도칼로 찢었다는 충격적인 말을 해준다. 그 때 모두 입을 다문것은 내 자신을 포함해서 슈투디오 직원들이 다 너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한편 마빈은 LA 본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아오이에게 비행기표를 보내며 자기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지만 아오이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자기는 준세이를 사랑하며, 준세이와 지킬 약속이 있다고...
이윽고 준세이는 피렌체 두오모에 오른다. 그 좁은 계단을 하나 하나 딛고서 오늘이 바로 아오이의 30회 생일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오이도 두오모에 올라 그들은 극적인 상봉을 한후 뜨거운 입맞춤을 나눈다. 이때 두오모의 종탑에서 땡땡 종이 울린다. 그들의 만남을 축복하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두오모에서 내려와 두오모 앞 공원으로 향한다. 그 공원에서 그들은 그들이 첫사랑의 키스를 나누었을 때 들은 그 첼로 곡을 다시 듣게 되는 기적을 맛본다. 더군다나 더 놀라운 일은 그 악단속의 첼로 연주자는 바로 자기들이 대학 1학년이었을 때 이 곡을 서툴게 연주하며 간혹가다 곡의 연주를 끊어먹던 바로 그 일본인 음대생이었다.
그들은 그날 밤 뜨거운 사랑을 지피고 아툳날 아침 다시 헤어지게 된다. 준세이는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오이는 냉정하게 자기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밀라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준세이는 두오모 공원 앞 그 일본인 첼로 악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듣게 된다. 사실은 아오이가 그 첼로곡을 연주해 달라고 지난 번 밀라노까지 이 일본인 악사를 찾아가 부탁한 이벤트였다는 사실을... 준세이는 아오이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열정이 자신의 가슴속 분화구에서 용암처럼 쿰틀대며 분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전율한다. 준세이는 허겁지겁 오토바이를 타고 피렌체 역으로 갔지만 아오이가 몸을 실은 밀라노행 기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때 역무원이 말한다. 지금 떠난 기차를 놓친 승객은 다음 유로스타를 타면 먼저 떠난 기차보다 15분 더 빨리 밀라노에 도착한다고
아오이는 밀라노 역에 도착하여 플레트홈을 걷다가 저 멀리 준세이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떼놓지 못하며 서서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준세이가 손짓한다. 어서 오라고..... 이로서 영화는 끝난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은 영화의 내용은 그리 큰 감명을 주지 못하는 통속적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소주병처럼... 그리고 첫사랑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법인데 애써 준세이와 아오이의 재결합을 기도한 인위적인 흔적도 엿보였다. 그렇지만 이 [냉정과 열정사이]가 영화로서 성공한 점은 감독이 그려놓은 탁월한 공간설정 능력이다.
내가 피렌체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는 분명 중세 도시의 모습이었다. 이 영화는 첨단의 미래도시 동경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에서 나온 고미술품 복원 전문 여선생의 독백이 피렌체라는 도시를 극명하게 조명해준다. " 피렌체는 도무지 희망이 없는 도시야. 해먹고 살수 있는 일이 없어. 그저 고미술품을 복원하는 것과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일밖에 없어. 피렌체에서 산다는 것은 과거에 얽매여 사는 일이야. " 준세이는 첨단 미래도시 동경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다시 과거의 도시 피렌체로 돌아와 아오이와의 첫사랑의 약속을 지키고자 두오모에 올라 그녀를 상봉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밀라노로 떠난다.
여기서 밀라노라는 도시에 대한 성격을 이해해야만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밀라노도 과거의 많은 유적을 갖고 있는 도시지만 피렌체처럼 그렇게 온 몸이 과거지향적인 도시가 아니다. 밀라노는 패션산업을 포함해 많은 첨단산업을 갖고 있는 미래지향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오이와 준세이의 사랑이야기에서 전개되는 미래지향적인 최첨단의 동경은 그들이 맺은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과거의 공간이었고,
과거지향적인 피렌체는 그들의 과거의 첫사랑이 결코 식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현실 인식의 공간이며,
과거와 첨단의 미래가 공존하는 밀라노는 참담하게 깨진 아오이와 준세이의 첫사랑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희망적인 새출발의 행군을 시작하는 축복받은 미래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서 다시 본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에 대한 소감이다.
위대한 인류정신이 규현된 예술품이나 건축물 앞에 서면 대개 " 아!" 하는 짧은 소리의 감탄사를 내지르기 마련이다. 이 감탄의 소리는 의문을 내포한 의문감탄사를 뛰어넘어 영탄으로 이어지게 된다.
피렌체의 두오모와 종탑도 마찬가지였다. 한 눈에 봐도 정말 위대한 건축물 이었다. 설명이 필요없다. 나같은 사람이 설명을 한다면 그땐 이미 이 두오모 와 종탑의 품격이 손상될 수 밖에 없다.
두오모를 구경하기 전 이 산죠반니 세례당에 들렀다. 피렌체시의 수호성인 세례요한에게 바쳐진 이 세례당은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건물이 5세기에 기원을 둔 로마시대의 건축물이라는 점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와부의 대리석 양식은 11-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이곳에서 세례받은 저명인사 가운데 하나인 단테가 지적했듯이, 다른 건물들의 잔해에서 나온 재료들을 많이 활용해서 지어졌다는 점이다.
세례당 건물의 전체 모습을 볼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지만, 피렌체의 두오모 앞 노점에서 산 한글판 피렌체 역사 에술 민속 책자에서 이 세례당의 전모를 볼수 있었다. 건물의 지붕은 백색 팔각 지붕이었다. 우리나라의 성당은 대개 본당에서 세례를 받는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세례를 먼저 받지 않으면 본당 출입을 할수 없다고 한다.
로렌쪼 기베르티가 27년간(1425-1452)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세례당 출입문이다. 이 문이 완성된지 50년 후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 이라고 명령했을 정도로 아름답고 뛰어난 예술성을 간직한 문이었다.
산죠반니 세례당 앞에서 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완쪽이 KTX에서 만만 인연으로 내가 이태리 여행을 하게된 동기를 부여한 전남 도립대 김수인 교수이고, 오른쪽이 박연진 교수이다.
피렌체 두오모를 구경하기 위하여 상당 시간 줄을 서야만 했다. 배가 만삭인 짚시가 구걸을 했다. 그 만삭인 배를 어느 원우가 살짝 만져본 모양이다. 가짜란다. 이곳 피렌체의 짚시들은 구걸형이란다.
성당의 규모가 정말 엄청나다. 밀라노의 두오모와 별 차이가 없었다. 천정의 최후의 심판도 웅장했다. 몇번 디카의 샷터를 눌렀으나 두오모의 수호신이 나에게 사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비교도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한 20여번의 시도끝에 겨우 이 사진을 얻었다.
이 성당은 12세기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의 인구는 한 10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고 그중 가장 중요한, 길드(우리가 세계사에서 배운)인 양모공조합에 소속된 인원이 3만명 정도였고 이 양모조합에서 낸 성금으로 이 성당을 지었다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그 당시 양모공조합인 길드의 그 엄청난 상권과 자금력에 어찌 경탄과 존경을 표하지 않으리오. 이미 그 당시 이곳에서는 은행이 있었고, 메디치 가문은 정치 경제는 물론 전 유럽의 금융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니 우리로서는 할말이 없다.,
이러한 성당을 지금 새로 짓는다면 아마 수십억 내지 백억달러가 들지도 모른다. 이 큰 두오모(천정의 돔)을 지을 당시 로마시대의 기술이 맥이 끊겨 현상공모에 당선된 브르넬레스키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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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지하실에 내려갔다. 기념품 가게들이 있었다. 옛 성당의 지하실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피렌체 두오모의 돔을 완성한 브르넬레스키의 묘가 안치되어 있었다. 그분에게 삼가 묵념을 올렸다. 한동안 그의 묘를 완상하며 時空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空속에 속한 땅속의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돔은 영원하리라. 나는 현재 살아 있어 時의 인물이지만 왜소한 내가 그의 장인정신 앞에 과연 무슨 추념의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성당 구경을 마치고 나와 우리는 잠시 자유시간을 가졌다. 이 곳 노점에서 나는 피렌체란 영문 흰 이니셀 문자가 촘촘히 박힌 검은 모자와 한글판 피렌체의 역사. 에술. 민속및 모든 걸작품을 아우른 책자를 샀다. 모자를 살펴보니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명품의 나라인 이태리도 중국산이 없으면 일상 생활이 어렵다는 것이다. 모자값은 6유로였고 책은 8유로였다.
시뇨리아 광장을 찾아 나섰다. 13세기에 세운 피렌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란다. 이 광장의 명칭은 시뇨리아라고 불린 공화국 정부 청사로 사용된 궁전에서 유래한다. 현재 피렌체 시청으로 이용되고 있다하니. 피렌체 시청 공무원들이 부러워졌다. 조상들이 8백년전에 세운 궁전에서 근무하니 그들의 프라이드가 얼마나 대단할거며 시민들을 위한 마음도 정성이 가득할거고, 근무할 때도 경건히 옷깃을 여미고 일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뇨리아 광장은 사실상 옥외 박물관이나 다름없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포함하여 아마 백점도 넘은 중세 르네쌍스시대의 조각상들이 참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전나의 모습이다.
두오모 박물관을 포함하여 현재 시청으로 사용되는 이 시뇨리아 궁전뒤로 박물관이 부지기수였고, 관람객들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건만, 우린 그럴 시간이 없었다. 25분의 자유시간에 난 원우들과 함께 지척에 있는 베끼오 다리를 보러 갔다.
까까(개똥)를 조심해 가면서 골목길로 접어들다 이 과일가게에서 여러 과일을 원우들이 사서 먹어보았지만, 포도를 제외하곤 사과나 배등 과일의 맛이 우리 농산물보담 훨씬 뒤처졌다. 역시 우리나라의 농산물이 세계 최고 수준에 속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베끼오 다리를 걸어보았다. 인산인해다. 다리위 가게들은 금은방이었으나 옛날엔 푸주간의 거리였다고 한다. 1500년대에 피렌체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문에 의해 요즘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세공업자들의 상점가가 되었다.
호화로운 금은방 가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나 무척 바가지를 씌운다는 소문이 무성하단다. 저 멀리 강을 건너오는 카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아르노강의 모습도 설명 이상이지 설명 이하가 아니었다.
이 독특한 다리는 아르노강의 폭이 가장 좁은 곳에 놓여 있단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이 다리는 1944년 나찌의 교량 파괴를 피한 유일한 다리이기도 하고, 아르노강의 잦은 범람때문에 1345년에 세워진 이 돌다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니, 오! 베끼노 다리여! 너 또한 영물이로다.
여기서 피렌체 이야기를 끝내려고 하니 좀 아쉬운 생각이 들어 내가 산 피렌체 책자에서 스캔을 뜬 우르비노의 비너스상을 싣는다. 내가 이 이 작품의 예술성을 논한다거나 설명을 한다는 것은 작품에 대한 모독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미켈란젤로가 이 피에타상을 조각하였을 때에 그는 거의 80세의 노인이었다. 이 작품은 자신의 장례비였고, 따라서 그는 모자를 쓴 니코데모의 모습에 자신의 자화상을 각인하였다. 오른쪽 성 처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거의 지어져 있다.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은 축 늘어져 어머니와 니코데모가 간신히 붙들고 있다.
대리석 왼쪽 부분에 불만을 품은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없애버리려고 그 부분을 미완성 상태로 놔뒀는데 훗날 티베리오 칼카니가 막델레나를 조각해 놓았다. (이상 한글판 피렌체 역사 예술 민속 책자의 설명문을 옮겨 적음)
피렌체 구경을 두루 마치고 우린 이태리 식당에서 다시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기 전 잠간 면세점에 들렀는데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 중에 일본인과 한국인들도 많았다. 혁대 하나에 100유로다. 물론 품질은 좋았다. 이 면세점에서 살만한 물건은 가죽제품이라는데, 여성용 핸드북은 밀라노보담 쌌지만 그래도 500유로가 넘는 게 보통이었다. 썬글라스도 최하 200유로였다. 밀라노처럼 아이쇼핑이 그리 즐겁지 않았다 .<끝>
2009.7.13 골드리버
다음 이야기/ 이태리 외인의 본고장 토스카나 지방의 끼안티 와인어리를 찾아서(2009.6.23) -이태리 여행기 제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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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기를 이렇게 상세히 연재하기 위하여 밤잠을 설쳤을 골드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근 한간 메리며 돈 한푼 안생기는 이 글을 다 쓰고나니 후련했답니다.
위 건축물이나 조각품이 역사 공부할때 많이 본 모습으로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로마문명의 진수이네요.
그들이 남긴 인류의 문화유산이 참으로 경외로움 그 자체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