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랴
(벚)꽃 지는 밤
꽃을 밟고
옛날을 다시 걸어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한하운(1919-1975) 시인의 ‘답화귀(꽃을 밟으며 돌아가다)’의 한 구절이다.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관료였지만 뜻하지 않게 찾아온 나병 때문에 좌절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아름다운 시를 여러 편 남겼다. ‘(벚)꽃 지는 밤에 돌아가고 싶다’는 글 속에서 그의 생사관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아무래도 일본 시를 빼고서 벚꽃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이교(1118-1190)는 ‘백조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절명시처럼 비장한 시를 남겼다. “원컨대 (벚)꽃나무 아래에서 봄날 죽고 싶구나.”
그는 헤이안(794-1185)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며 또한 승려로서 벚꽃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 시처럼 흩날리는 벚꽃 잎 속에서 죽어갔다는 전설을 남겼다. 열반 후 540년이 지난 어느 날 홍천사에 머물던 후학이 그의 묘를 발견했다. 무덤 둘레에 일천 그루 벚꽃나무를 심어 마음으로 조의를 했다. 이후 그 나무는 ‘서행스님의 벚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서행스님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꽃’이라고 하면 매화를 말했으나 그의 작품 이후 ‘꽃’은 벚꽃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후 ‘하나미(꽃구경)’는 앞글자를 생략해도 당연히 벚꽃놀이를 의미했다.
얼마 전 열반하신 ‘무소유’의 법정(1920-2010)스님도 만년의 길상사 법회에서 꽃을 포함한 많은 꽃들에 대한 찬사를 남겼다.
“매화는 반개(반쯤 핌) 했을 때, 벚꽃은 만개(완전히 핌) 했을 때, 복사꽃은 멀리서 봤을 때, 배꽃은 가까이서 봤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봄꽃을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내가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아름다운 꽃공양을 나에게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에 뿌려 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는 글을 열반송을 대신하여 이미 남긴 터였다. 그토록 사랑하시던 봄 서러움도 꽃이 됩니다‘라는 어느 거사님의 조사는 ’이 찬란한 봄날 꽃처럼 활짝 열리십시오‘라는 당신의 법문과 대구를 이루면서 삶과 죽음이 대비되어 큰 울림으로 닿아왔다. 무엇보다도 맨 앞의 제자가 안고 있던 ’비구법정‘이라는 단 네 글자의 위패문구에서 간결한 삶을 추구했던 당신의 꼬장꼬장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기존 위패들은 앞뒤로 붙은 고인에 대한 길다란 수식어 때문에 누가 죽었는지 위패 글만 보고 알아차리는데 한참 걸리는 것과 상당한 차별성을 보인 그 자체가 참으로 신선했다. 제자들에게 위패문구까지 정해주고 가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 관례가 된 ’각령‘이라는 말은 교학적으로 문법적으로 살펴봐도 ’토끼 뿔‘같이 말이 안 되는 표현이다. 습관적으로 사용해 온 것도 이번 기회에 다시 점검해 볼 일이다. 만약 꼭 호칭을 붙여야겠다면 ’진위‘라는 표현이 선종적으로 마땅할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그 기간은 짧고 이내 덧없이 져버린다. 생사를 가장 짧은 순간에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하는 화려한 꽃도 드물다. 그것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연유이다. 그야말로 무상을 찰나에 보여준다. 해골을 보고 ‘인생무상’을 공부하라는 관법보다는 훨씬 더 아름답고 운치 있는 수행법이다. 그런 까닭에 일휴
(1394-1481) 선사의 ‘봄마다 피는 벚꽃을 볼 때 생의 무상함을 아파하라’는 게송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만해(1879-1944) 스님은 겨울과 봄을 동시에 보면서 눈과 꽃을 함께 보는 통찰력으로 ‘견앵화유감(벚꽃을 본 느낌)’이라는 한시를 남겼다. 헛것인 줄 알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중생심까지 가감없이 솔직하게 드러낸 수작이라 하겠다.
지난 겨울 내린 눈이 꽃과 같더니
이 봄에는 꽃이 도리어 눈과 같구나
눈도 꽃도 참이 아니거늘
어째서 내 마음은 찢어지려고 하는고
작동설여화
금춘화여설
설화공비진
여하심욕렬
그래도 ‘바람 불어 벚꽃 잎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풍광을 즐기려 봄 길을 나서야겠다.
출처 ; 원철 스님 / 모두 함께 꽃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