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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대하 5:11-14
출 처| 박봉수목사
참된 종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우선 참된 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페루에 가 보니까 잉카시대에도 종교가 중심이었습니다. 잉카 시대의 사람들은 태양신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콘돌 곧 독수리, 퓨마 그리고 뱀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신전에는 온통 이런 신들의 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출 20:3-5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참된 종교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깁니다. 그 어떤 우상도 만들지 않습니다. 그 어떤 우상 앞에 절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참된 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잉카시대에 종교는 신 앞에 제물을 바치는 것이 종교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태양신전의 구조입니다. 동지나 하지와 같은 태양과 관련된 특별한 날을 정해놓고, 이런 날들에만 태양 빛이 신전 깊은 제단에 들어올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이런 날들에 태양이 뜨는 방향과 태양의 높이를 정확하게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산에 따라서 빛이 들어오도록 창을 만들고 빛의 통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 년에 정해진 몇 시간에만 태양 빛이 제단에 비치게 만든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제단에 제물을 바칩니다. 태양 빛이 제물에 비취게 해 놓고 태양신이 임하여 제물을 취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요 4:24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참된 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체험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역사 속에 종교가 없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종교들이 참된 종교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만든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보다는 인간이 만든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참된 종교를 믿으려고 힘써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참된 종교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신을 섬긴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고 그저 종교의식을 행하는 일에만 몰입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참된 종교를 믿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결코 우상을 섬긴다든지 하나님 아닌 다른 그 어떤 존재를 신으로 받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단지 하나의 의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된 종교를 세우려는 몸부림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우선 솔로몬이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합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서 새로 지은 성전에 말씀의 돌 판이 담긴 언약궤를 모셔옵니다. 지성소 안에 안치합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온 백성이 찬양을 드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들 중에 영광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참된 종교가 세워지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반드시 지켜가야 할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대하 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왕위를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결심했다는 말입니다.
성전 건축을 결심하고 난 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선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두로 왕 후람의 도움을 청합니다. 최선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고자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습니다. 준비가 완료된 뒤에 또한 최선을 다해서 성전 건축에 임했습니다. 대하 3-4장을 보면 세심한 곳까지 정성을 다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는 솔로몬의 태도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봉헌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번 페루 사역의 하이라이트는 이틀 간의 신앙 컨퍼런스였습니다.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장로교 교회들 십여 교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목회자들, 사모들, 장로 집사들, 교회학교 교사들, 청년들 150여명이 모였습니다.
이틀 동안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 집회에 이르도록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일정이 이어졌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집회가 모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틀간 휴가를 냈습니다. 어떤 청년들은 1년에 단 한 차례 휴가를 이 모임을 위해 냈습니다. 여러 교회 교인들이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2시간 넘어 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돌아갔다가 다음 날 다시 올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잠을 자야했습니다. 숙소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깔개를 깔고 담요를 덮고 잠을 자야했습니다.
매끼 함께 밥을 해 먹었는데 식기도 모자라고 식사할 자리도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고 길게 줄을 섰고 오래 기다려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강의나 설교를 듣는 자세가 얼마나 진지했는지 모릅니다. 통역하는 선교사님 말씀이 자기도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집회에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역을 통해서 말씀이 전달 됐지만 마치 스펀지처럼 말씀이 그들의 심령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임했고, 치유의 역사도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저들의 최선을 다하는 자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선 성수주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주일을 포함해서 연휴가 며칠 이어지면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많은 교인들이 성수주일을 범할 것을 걱정해서입니다. 주일출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실제로 연휴를 즐기기 위해 성수주일을 범하며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는 교인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한 교회생활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하는 하던 분들이 쉬고 있습니다. 철야 기도하던 사람들이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던 교회 봉사도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헌금하던 사람들이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대하 5장은 성전건축이 완료된 후에 솔로몬이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솔로몬이 최선을 다해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낼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언약궤를 성전에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솔로몬은 다윗 성 시온에 모셔두었던 언약궤를 새로 지은 성전으로 모셔 들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성대하게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언약궤를 성전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언약궤를 성전 안에 가장 거룩한 자리 지성소 안에 안치했습니다.
여기서 언약궤란 무엇입니까?
10절에 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두 돌판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궤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전을 아름답고 멋있게 지었어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전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다른 모든 종교의 신전 중심 곧 지성소에는 사람들이 만든 신상 곧 우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에는 신상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전을 건물만 세워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상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안치하게 된 것입니다.
언약궤가 없는 성전은 왕이 없는 왕궁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그 말씀을 경청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페루 집회에서 말씀의 능력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 특강 시간이었습니다. 무엇을 강의할까 기도하던 중에 말씀 묵상 훈련을 시켜야겠다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했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훈련을 시키기로 했습니다.
첫 시간 강의를 했고, 두 번째 시간에 워크샵으로 실제 말씀 묵상을 진행했습니다. 말씀을 읽게 하고, 내게 주시는 말씀을 찾아 반복해서 되뇌이게 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게 하고, 그리고 하늘의 은혜를 누리게 했습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도중 말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능력을 덧입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훈련에 참여했던 여자 분이 찾아 오셔서 감격해서 제게 고백했습니다. 자기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이렇게 놀라운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이 변호사신데 최근에 예수 믿으면서 선교사님들에게 법적으로 큰 도움을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No Bible No Breakfast!" 모두가 그렇게 하겠다고 손을 들고 일어섰습니다. 저들이 말씀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솔로몬이 아름답게 성전을 지었어도 그 안에 언약궤가 없으면 아직 제대로 된 성전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순종하며 사실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가 풍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 13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제단 동쪽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백 이십 명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솔로몬이 새로 지은 성전에 언약궤를 안치할 때 백성들이 뜨겁게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마음 가득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본문 13, 1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 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가 성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진심어린 감사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교회 음악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찬양의 기능을 대체로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드림의 기능입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기능을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드리는 찬양을 기뻐 받으십니다.
둘째, 만남의 기능입니다.
찬양하는 사람들과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찬양 가운데서 영적인 만남을 경험케 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찬양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찬양드리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셋째, 변화의 기능입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이 찬양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변화를 경험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실제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찬양을 드리면서 많은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번 페루 집회 안에서 저도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페루 교인들은 모이면 주로 하는 것이 찬양이었습니다. 예배 시간 절반은 찬양을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절반은 말씀을 듣고 나머지 시간 교제와 광고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은 대부분 한국교회와 미국교회가 부르는 CCM곡 들을 번역해 놓은 것들이었습니다. 악보도 없이 OHP로 비쳐지는 가사만 가지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두드러진 특징은 찬양 부르는 내내 모두가 서서 찬양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도 결코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뜨겁게 찬양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몇몇 노인은 찬양을 부르는 도중에 춤을 추고 또 손을 흔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말 기쁨으로 찬양을 불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적 임재를 잃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찬양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그저 형식적으로 부르고, 감동도 기쁨도 없이 찬양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쁨이 있는 찬양, 감사가 있는 찬양, 감동이 있는 찬양이 살아나야 합니다. 찬양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의 임재를 나타내 보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