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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31-39
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눅 4:31-39 / 눅 4:31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막1:21-28] 예수께서는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되돌아가서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 설교하셨다. 32) 여기서도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인용하지 않고 그분 자신의 말로 확신 있게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있다가 예수께 소리 질렀다. 34) `나사렛 예수여! 우리를 이대로 놔두시오. 당신은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십니다.' 35) 예수께서는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 그리고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명령하셨다. 귀신은 군중이 지켜 보는 앞에서 그 사람을 내동댕이치더니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36)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이분의 말씀에는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기에 귀신까지도 복종하는가?' 하였다. 37) 예수께서 행하신 이 일은 화젯거리가 되어 그 온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38) [많은 사람을 고치시다;마8:14-17,막1:29-34]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마침 시몬의 장모는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제발 이 부인을 고쳐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애원하였다. 39) 예수께서 그 부인 곁에 서서 열병을 꾸짖자 곧 병이 떠나 체온이 정상으로 되돌아왔으며 그 부인은 일어나서 그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이곳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31-32)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이곳은 장차 갈릴리 지방의 전도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선입견이 없는 이곳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고 환영하였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은 나사렛 북동쪽에 떨어진 곳으로 예수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입니다(마 8장; 요 6:55-59).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이 그 가르침에 놀랐던 것은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체에 하나님의 권능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33-36)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귀신들린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완전히 지배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을 알고 두려움으로 떱니다(3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8). 이처럼 여인의 후손이 와서 그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세기의 예언과 같이(창 3:15), 예수님께서는 초림으로 마귀를 물리치시고 재림으로 마귀를 영원히 멸하실 것입니다.
열병을 고치신 예수님(38-39) 시몬의 장모가 걸린 열병은 팔레스틴에서 자주 발생하는 풍토병이며 급성 말라리아로 위험한 질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하심으로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있는 예수님의 치유는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시몬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오히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축복의 기회로 바뀌었습니다.
적용: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온전히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각종 은사는 무엇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까?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행동이다. -조지 헨리 루이스. 살다 보면 힘들고 슬프고 우울한 날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우울함과 하염없이 놀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울함은 자신을 저 밑은 곳으로 점점 데리고 갈 것입니다.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시다. 밀린 집안일을 하고 쇼핑을 하고 친구를 만납시다. 집에 돌아오면 완전히 지쳐 바로 쓰러져 잠들 정도로 몸을 움직입시다. 정말 바쁘다 보면 우울해 할 시간도 없습니다. 슬픔이 당신을 찾아와도 만나주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생활합시다. 우울함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면 사실은 별거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말씀대로 사는 축복
눅 4:31-37 / 이한규목사
< 높은 마음을 가지지 말라 >
어느 날 예수님이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와 안식일에 가르치셨다(31절). 가버나움은 나사렛 북동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갈릴리의 핵심 도시로서 예수님 초기 사역의 근거지였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과 관련된 말씀에서 ‘내려왔다’는 표현을 보면 깊은 감동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성도는 올라가는 삶의 전반전도 잘해야 하지만 올라간 후 내려오는 삶의 후반전도 잘해야 한다. 후반전까지 잘해서 승리한 것이 진짜 승리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낮은 영혼을 찾으셨기에 낮은 영혼을 외면하면 예수님을 만나기 힘들다. 늘 어두운 그늘을 살피고 하나님이 어느 때에 주신 감동을 따라 누군가를 도우라. 그런 손길들의 연대를 통해 세상은 점차 밝아진다. 물론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스스로 참여하되 남에게 참여하라고 강요하지는 말라.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이 중요하다. 내가 가진 것을 힘없는 의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놓을 때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임해주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깅림하신다는 표현은 하늘도 중요하지만 땅도 중요하다는 암시다. 성경은 위엣 것을 바라보라고 하지만 위엣 것만 바라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래도 살피라. 대기권에서는 위와 아래가 있지만 대기권보다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면 거기에서는 사실상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다. 인간적인 위계질서에서 위와 아래를 너무 구분하는 것은 아직도 영적인 수준이 낮은 증거다.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차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다 품어야 할 존재로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이 생긴다.
낮은 사람을 살피라는 말은 높은 사람을 무조건 욕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낮은 사람도 차별하지 말고 높은 사람도 차별하지 말라. 요즘 부자와 유명인이 잘못하면 언론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욕하면서 대중의 시선을 끌어 모아 독자 수를 늘리고 광고 수입을 늘린다. 그러나 부자 중에도 좋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어떤 부자는 자기 선행이 드러나면 남들이 냉소하거나 혹은 광고한다고 오해할까봐 은밀하게 선행을 한다. 보는 것만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라.
사람은 삶의 이면에서 얼마나 나쁜 일 혹은 좋은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쁜 일은 10개의 언론이 10배로 기사를 쓰지만 좋은 일은 대개 한 언론이 한번만 쓰고 끝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대한 나쁜 소문도 잘 걸러서 들으라. 남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내 모습을 보지 못하는 불의를 사람은 심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은밀히 좋은 일을 많이 하라. 사람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알아주신다. 그것이면 족하다.
낮은 사람도 차별하지 말고 높은 사람도 차별하지 말라. 부자나 유명인은 무조건 깎아내려도 좋다고 여기지 말라. 유명함이 짐이 될 때도 많다. 유명하면 보는 눈이 많아 아무래도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진다. 갑질 한 번 하면 무서운 여론재판을 받으니까 더 조심할 수밖에 없다. 나의 잘못보다 유명인의 잘못은 더 나쁜 것이란 생각도 바른 생각은 아니다. 비판 대상에도 차별을 두지 말라.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는 것도 차별이다. 그런 차별적인 높은 마음을 버리고 낮은 마음을 가져야 예수님이 그 마음에 찾아오신다.
< 말씀의 권세를 앞세우라 >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려면 말씀 친화적인 마음도 준비하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그 말씀이 권위가 있어서 놀랐다(31-32절). 그때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렀다(33절).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귀신에 의해 몸과 정신이 지배된 사람이다. 귀신이 죽은 사람의 영혼처럼 행세하는 것은 귀신의 속임수다.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귀신으로 변해 산 사람 속에 임한다는 귀신론도 비성경적이다.
어떤 것에 중독된 상태를 무조건 귀신 들린 상태로 여기지도 말라. 자기 의지가 있어서 중독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며 사투하는 것은 귀신 들린 것이 아니다. 중독된 것도 무조건 귀신 들린 것으로 여기고 “도박 귀신아! 술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라는 식으로 하는 것은 이단 교주가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자신을 의존시키면서 돈과 영혼을 빼앗으려는 광고와 선전 술책이다.
때로는 귀신 들린 상태가 병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흔하지는 않기에 병든 사람에게 무조건 “병마야! 물러가라.”라고 이단 교주의 습관적인 언어를 따라 하는 것도 잘못이다. 귀신 들리지 않았는데 무조건 귀신 들린 것처럼 여기면 귀신도 좋아하지만 이단 교주의 종교 영업이 쉬워진다. 그래서 이단 교주는 거의 예외 없이 귀신 얘기, 종말 얘기, 전쟁 얘기 등을 수시로 해서 영혼을 약화시킨 후 사로잡는다.
귀신 들린 상태가 미치거나 병으로 나타나는 것 외에 때로는 주술적인 신들린 상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본문의 귀신 들린 사람은 주술적인 형태로 귀신 들린 사람이었다. 그가 소리 질렀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34절).” 언뜻 보면 귀신 들린 자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 장면은 귀신도 예수님을 높이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귀신은 영혼을 사로잡으려고 전략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거나 높이기도 한다.
그때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의 칭송하는 말을 기뻐하지 않고 바로 귀신을 꾸짖으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곧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는데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35절). 이 장면을 통해 이단 교주를 비교적 쉽게 분별해낼 수 있다. 이단 교주는 ‘위대한 종, 능력의 종’이라고 하면 아주 좋아한다. 반면에 참된 리더는 그런 말이 들리면 오히려 잠잠하게 하고 자신을 감춘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면서 때리거나 흔들거나 주문을 외우는 등의 무속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즉시 귀신이 그에게서 나왔다. 그처럼 예수님이 말씀으로 간단히 귀신을 쫓아내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36절).” 그러면서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다(37절).
왜 사람들이 그토록 놀랐는가? 당시에 축귀자들은 대부분 주문을 외우거나 신비하게 보이는 주술적 행위로 악령 추방 의식을 행했는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간단히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최대 권위와 능력의 바탕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개정도 안 되는 기독교 헌법이다. 성경 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성령님이 계시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살려는 마음에 찾아오신다.
< 말씀대로 사는 축복 >
발터 벤야민이란 유대계 독일학자는 나치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국경수비대가 접근하자 숨죽인 채 지니고 있던 괴테 시집을 꺼내 읽었다. 그에게는 괴테의 시가 내적인 평안의 원천이었다. 다급한 문제를 만나면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으라. 그러면 어떤 위대한 시집보다 더 마음에 평안이 생긴다. 예전에 프랑스 군인들은 전쟁터에 갈 때 배낭에 파스칼의 <팡세>를 넣고 갔었다. 그만큼 마음에 평안을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의 많은 군인들의 배낭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가 있으면 한다.
<월새기> 사역이 5년 반이 되었다. 지난 6년간 종이 값도 조금씩 올랐고 이번에 활자를 키우면서 지면도 216페이지로 늘어났다. 그래도 후원금 한 권에 1,000원을 받는 것은 여전하다. 앞으로도 제가 천국 갈 때까지 후원금 1,000원만 받고도 계속 이 사역이 유지되게 해달라고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을 아뢰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많은 사람에게 평안의 원천으로 보이고 들려지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이다.
군대와 교정기관에 <월새기>를 매월 무상으로 보내는 <사랑나눔> 기증이 이번 달부터 드디어 10,075권으로 만 권이 넘게 되었다. 가난한 심령으로 지내는 군인들과 교정기관 수용자들이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영혼이 변화되고 새로운 비전을 품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기쁘다. 사람은 심은 대로 열매를 거두고 들은 대로 사랑을 받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지켜주고 도와주신다.
한 교단에서 신학대학원을 설립했다. 임시 신대원장으로 A 목사가 선임되었다. 그 후 신대원 체제 정비 과정에서 이사 및 강사 목사들마다 의견이 달랐고 그로 인해 신대원장이 많이 힘들어했다. 나중에 신대원이 커지면 신대원장이 총장이 될 가능성이 많았기에 그 자리를 은근히 원하는 이사와 교수들이 여러 의견으로 신대원장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잘 얘기해도 정치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어느 날 무수한 말 펀치로 마음고생이 심하던 신대원장에게 총회장이 말했다. “목사님! 지금은 정치가 소용이 없습니다. 목사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듣는 길을 택하세요. 앞으로 그들의 강의에 신대원장으로서 강의 파악을 한다는 명목으로 수업에 다 참석해서 힘써 들으면 그들의 마음이 호의적으로 변할 겁니다.” 그 말대로 신대원장이 강사 목사들의 모든 수업에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러자 점차 강사 목사들이 신대원장의 리더십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것은 그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길이다. 듣고 순종까지 하면 더욱 최고지만 그 전에 잘 듣는 것만으로도 큰 신임을 얻는다. 물론 아무 말이나 다 들을 수 없다. 이단 교주의 말을 들으면 죽음의 직통로가 열린다. 좋은 멘토를 잘 택하라. 그리고 택했으면 죽도록 잘 들으라. 그런 캐릭터를 체질화시키면 성공의 직통로가 열린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힘써 순종까지 하면 축복의 직통로가 열린다.
기도 능력은 기도 소리가 크고 신비하고 멋지게 들리는 것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능력 있는 기도란 결국 응답 받는 기도다.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언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가? 기도하면서 기도 제목을 잘 아뢸 때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때다. 입보다 귀가 발달된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다. 소원도 말하면서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더 얻는다. 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예수님이 찾아오실 마음을 준비해서 더욱 큰 은혜를 얻어 누리는 복된 심령이 되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
눅 4장 31~44절 / 허남길목사
▣ 서 론 ▣
주 예수님께서 공생에를 사시면서 제일 많이 사역을 하신 지역이 갈릴리 지역이고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제일 많이 사역을 하신 곳이 본문에 가버나움이라는 지역이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시고 전도하시고 고치시고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셨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은혜 받으시고 믿는 축복된 시간 되시기를 바란다.
**31-32절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도 성경을 가르치고 교훈하고 많은 일을 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는 그 사람들과 무언가 다르다고 느낀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은 창조자이시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시다. 신적 권위를 가지신 분이다. 말씀을 들을 때 성경을 잘 깨닫게 하셨을 뿐만 아니고 말씀을 들을 때 힘이 나고 말씀이 증거 될 때 말씀을 앞에 모든 것이 순종을 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귀신이 떠나가기도 하고 병이 치료되기도 하고 사람이 변화되기도 하고 바람과 풍랑도 잠잠하게 되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는 이분의 말씀은 권세가 있다고 한 것이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는데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 자가 말씀을 증거하면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말씀이 이루어진다.
그 때 그 말씀이 권세가 있는 말이 되는 줄 믿는다.
우리의 말은 불신자의 말과 다르다.
너희가 어느 집에 가든지 복을 빌라고 했다. 성도가 기도하면 그 집에 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 집에 합당하지 않으면 복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요 합당하면 그 집에 복이 임할 것이라고 했다.
성도는 그냥 사람들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 인 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있다. 기도하며 흑암의 권세가 무너진다.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이 성취되고 이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에게 권세가 있는 이유는 잘 생겨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1. 예수님의 말씀과 기사
**33-36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 도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낫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니까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서 귀신을 명했더니 귀신이 떠나갔다. 온전케 된 것이다.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가로되...
마태복음에서는 귀신을 표현할 때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잘 하지 않는데 누가복음에는 귀신을 더러운 귀신이라고 표현을 자주 하고 있다. 누가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자는 이방인들이다.
우리나라에도 귀신을 섬기고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귀신을 섬기는 사람도 귀신이 악하고 더럽다는 생각이 없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좋은 귀신도 나오고 그런다.
그리고 옛날에 월드컵 경기할 때 응원단 이름이 붉은 악마이다. 외 이러는 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 속에 귀신이 악하고 더럽고 망하게 한다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귀신을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고 병들게 하고 멸망하게 하고 영원히 지옥가게 한다.
**요10:10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라고 했다.
제가 전도를 하면서 제사 지내고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런데 귀신이 온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알고 있다. 알면서 외 그렇게 하는가.. 귀신이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귀신은 다른 말로는 악령이다. 악하고 더러운 영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게 한다. 어떤 사람은 귀신 들리면 더러워 진다. 세수도 안 하고 옷도 이상하게 입고 더럽게 해 다니고 냄새도 나고... 혼자서 말도 하고... 그런데 혼자 말하는 것 같지만 자기는 혼자가 아니라 귀신과 대화를 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더러운 귀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제가 귀신에게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물어보았다.
귀신이 실지 않느냐고 하니까 아 싫다는 것이다. 저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귀신이 사람을 병들게 하고 고통을 주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멸망시키고 지옥가게 하는데 당연히 미워야 하는데 안 밉다는 것이다.
오래 귀신과 함께 있던 사람은 귀신과 친하다. 좋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귀신이 안 떠나가는 것이다. 귀신이 미워야 하는데... 그래서 누가는 복서를 쓸 때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다. 귀신은 악한 존재인 줄 아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독 생 하신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 대신 죽게 하시고 지옥 권세에서 해방되기를 원하고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감사와 기쁨이 있다.
왜 믿기만 하면 빛 가운데 거하게 되고 더러움이 물러가게 된다. 성령 충만하게 된다. 불신자들을 보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의 일이 전부 더럽다.
제사를 지내서 음식 찌꺼기를 집 앞에 두고... 하는 일이 전부 그렇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귀신을 많이 섬기고 할 때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삼 년 동안 그 무덤 옆에서 천막을 치고 있는데 씻지도 않고 수염도 안 깎고 지낸다. 생활 자체가 얼마나 더러운가 왜 그런가 그런 생각과 관습을 만들어서 자꾸 그 속에 빠지게 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우상 숭배하는 모든 나라가 그렇다.
우상숭배하고 귀신을 섬기면 섬길수록 생각도 더러워지고 그 삶이나 모든 것이 악하게 되고 망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이 들어갈수록 전부 회복이 된다. 빛 가운데 거하게 되고 그 안에는 밝음이 있고 기쁨과 참 평안이 있는 줄 믿는다.
그래서 본문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 한 것이다.
1)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간다.
**막16:15이하에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면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저와 여러분은 믿음이 별로 없지만 예수님을 전하고 영접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 인줄 믿는다.
◑예수님을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자 안 해본 사람은 성경에 귀신이 떠나가고 이런 것을 보면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해 놓았나 한다.
잘 안 믿어진다. 그리고 또 좋은 말씀만 해 놓지 왜 자꾸 귀신 이야기를 하느냐 한다.
실제로 귀신은 존재하고 그 귀신에게 고난 당한 사람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있다.
저도 목사가 되어서도 이것이 잘 안 믿어졌다. 그런데 복음 전한다고 전하다가 보니까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실제로 있었다. 그래서 제가 안 믿을 수 없었다.
◑제가 성경공부를 했던 어떤 자매는 밤마다 귀신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자매가 귀신과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그것이 진짜 있을 수 있겠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매는 귀신과 대화를 하다가 귀신이 목을 조르는데 죽을 것만 같더라는 것이다. 그 자매가 얼굴이 파리하고 공부도 잘 못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려면 검은 것이 앞에 왔다 갔다 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얼마나 착한지 모른다.
이 자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귀신이 떠나갔다. 귀신이 떠나갔는데 그 때 처음 이것이 진짜 임을 체험했다.
◑사람은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는지 조금 지나니까 또 희미해지는 것이다. 진짜 귀신이 있느냐..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 그러니까 진짜구나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또 희미하게 되고 이것을 반복하면서 진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정말로 이 땅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이 있고 사람에게 역사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떠나가는 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정말로 믿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귀신이 떠나간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귀의 머리를 박살을 내 놓으셨다. 완전히 깨트려 놓았다.
제가 이 사실을 정말로 알고 나니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가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이제는 여러분을 통해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말을 안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저는 확실히 믿는다.
무엇을 믿는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이 보내신 왕으로 사단을 이기신 분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고 주인으로 영접하면 그 날로 끝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고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마귀와 싸우시는 분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도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누구 신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직접 귀신을 명하는데 귀신이 떠나 갈 수박에 없는 것이다.
왜 우리가 믿음이 이렇게 약한데도 이런 사건과 이런 말씀이 이루어 지고 있는 사실을 본다면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시는데 떠나가지 않겠냐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은 똑 같은 예수님이시지만 그 믿음대로 역사가 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만 그 사실을 정말로 안 믿고 모르면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대로...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별로 없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진 줄 믿는다.
2)열병이 떠나갔다.
**37-39절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누가라는 사람이 누가복음을 기록했는데 누가의 직업은 의사이다.
의사이기 때문에 다른 성경과 비교할 때 중한 열병이라고 표현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중한 열병에 걸린 시몬이 누구인가... 베드로이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고쳤는가.. 예수님께서 병을 꾸짖으시고 명령하셨다.
◑여러분들이 아플 때 병원에 가면 의사가 병을 꾸짖는가... 감기야 나가라... 하는가.. 감기 약을 지어준다. 맹장이 걸렸을 때는 맹장아 떨어져라.. 가 아니고 수술을 해서 잘라 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을 고치셨을 때는 치료하셨다고 하지 않고 명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누가는 의자인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중한 병을 고치신 것은 다른 의사와 같이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권세 있는 자가 명령하신 것 같이 창조자가 명령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니까 그 병이 떠나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보통 의사와 같이 고치시는 분이 아니시고 병을 명령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창1장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 하셨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걸어 나오라고 하니까 살아 걸어 나왔다.
풍랑을 명령하니까 풍랑이 잠잠하게 된 줄 믿는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그 분을 영접할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이다.
◑이번 주에 제가 어디에 강의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은 얼마나 엄청나고 놀라운 축복이고 사건이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 세상에 오신 사건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세계에서 영원한 세계로 가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유한한 인간 속에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신 사건이 구원이다.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너무너무 감격하고 감사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을 감사하였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을 한 것이다.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이유는 저와 여러분 속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줄 믿는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가 받은 복이다.
사람들 보기에는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속에는 그 분이 계시는 줄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병을 치료하셨다고 하지 않고 명령하셨다고 하고 있다.
**39절에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과 표적과 치유가 일어남을 믿는다.
사도행전에 보면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언젠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듯이 어떤 분이 제게 전화가 왔다.
테이프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부부가 다 교수님이었다.
그런데 갈등이 많았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중에 현실과 사실이 다르다는 말에 굉장히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현실이 자기는 다 사실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말씀이 사실임을 믿게 되고 그것을 믿고 기도하니까 내게 행복이 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이런 중한 병에 걸렸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님이 교회를 잘 섬기고 충성한 사람인데 암3기라는 것이다. 아파서 가보니까 완전히 말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돌아가시게 된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 나라가면 안식한다니까 이해가 되는데 왜 일평생 교회를 섬겼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을 주느냐는 것이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데 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하셔야지... 그런데 좀 지난 후 다시 전화가 와서 하나님이 전능 하 시다는 데 나는 그 능력을 인도 받고 정말로 체험하고 싶은데 제가 어려움이 있고 힘들고 핍박이 오고 어떤 고통이 있더라도 진짜로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전능 하 시다는 사실을 나는 체험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님 마음에 진짜 중심을 가지고 기도해보라고 했다.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인도 받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 기도해 보라고 했더니 이 분이 진짜 기도를 했다.
◑사람이 순박하고 좋았다.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기쁜 일이 있는데 어머니의 암이 나았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암이 나았는데 만약에 의사가 오진을 했으면 검사한 것이 없어야 하는데 검사한 것이 다 있다는 것이다.
검사한 것이 다 있는데 이것을 틀림없이 하나님이 치료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머니 병 낳는 것도 기쁘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내 기도에 응답하신 다는 것이 정말 기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는 말이 저는 하나님의 인도라는 말을 사실은 몰랐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셨냐고 물으니 서울에 가면 삼성 의료원이라고 큰 병원이 있는데 거기서 검사를 다 했는데 너무 신기하다는 것이다.
유명한 의사 만나서 검사 받으려면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기하게 가는 곳마다 다 예비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인도라는 말을 알았다는 것이다.
◑후에 어머님이 제가 강의하는 곳에 오셔서 늘 들으셨다.
제가 확인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러면 어떤 분은 우리는 왜 안 되고 아프냐고 하면 그것은 주님께 물으시기 바란다.
엘리야 시대에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왜 하필 사렙다 과부가 은혜를 받았는가... 그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뜻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볼 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많이 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초대교회 당시 거울은 지금과 같이 잘 보이고 큰 거울이 아니다.
동 거울이다. 옛날에 놋그릇 닦으면 얼굴이 보이듯이 보이는 거울이다.
그리고 동 거울 앞에는 립스틱을 아무리 잘 발라도 표가 잘 안 난다. 이것이 옛날 거울이다. 요즘은 유리 뒤에다가 수은을 발라서 너무 잘 보여서 실망한다.
어떤 사람은 안경을 안 낀다고 한다. 왜 너무 잘 보여서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는 희미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어떨 때는 잘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고 우리를 향한 축복된 계획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축복됨을 믿고 그분의 완전하심을 믿는 것이 성도이다.
믿음이 적을수록 왜 하나님이 이럴까... 이해가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는가.. 내일 일도 모르는 머리로 어떻게 전능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는가.. 그래서 믿으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믿는 것이다.
◑이 교수 부부가 지금은 캐나다에 가 있는데 들리는 말로는 성경 말씀이 맡다 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데 전도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와서 말씀을 듣고 변화되고 한다는 것이다.
한 이년 후에 돌아온다고 한다. 지금도 때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있는 자가 예수 이름으로 치료되어진다는 말은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3)각색 병 귀신들린 사람들을 해질 때 대리고 왔다.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기에 보면 이제는 각색 병 들린 자 귀신 들린 자 들을 대리고 왔다.
언제 왔는가 해질 때 왔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언제 데리고 가는가 아침에 데리고갈 것이다. 그런데 왜 유대인은 해질 때 대리고 왔는가 하면 유대인의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이 아니고 저녁부터 아침까지이다.
안식일이 언제 시작되는가 하면 금요일 날 해질 때 토요일 날 해질 때 끝이 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주일 아침부터 저녁에 끝이 난다. 우리와 시간의 개념이 다른 것이다. 안식일이 지난 후에 데리고 왔다는 뜻이다.
◑서 마산 교회 황삼수 목사님을 모셔서 여전도회 헌신예배들 드렸는데 예배를 다 드린 후에 목사님에게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더니 어디를 가냐고 하시면서 오늘은 주일인데..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께 밥을 준비 못해서 그렇다고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린 후에 웃으면서 목사님 안식일은 해지면 끝이라고 말씀드렸다.
다음에는 강사 목사님 오시면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3남 전도 회가 작년에 점심시간에 밥 먹으면서 친교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하지 말라고 했다. 법이 천지인데 밥 식당에서 먹고 방에서 친교를 하라고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로 주일날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2. 예수는 그리스도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이심을 앎이더라... 라고 하셨다.
1)34절에 보니까 당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라고 했다
2)41절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41절에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귀신들이 알았다고 했다.
**약2:19에 귀신이 하나님을 안다고 했다.
귀신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 신앙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이다.
성도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영광돌리는 자인 줄 믿는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을 했는가..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구약에는 여호와... 야훼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부 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있는데 이것은 세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다. 한 분인데 위 격이 삼위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법칙은 우리의 생각으로 안 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아무것도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있었더라... 이것이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 과학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때 그것을 알고 믿게 되고 발견하게 되는 줄 믿는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안 되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원래부터 한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요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니... 이 말은 말씀이 성부 하나님과 다른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같다는 말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 다른데 같다는 말이다.
성령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 다른데 같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아버지 어머니사이에서 나셔서 훌륭하기 때문에 그리스가 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 오기 전에 아들 하나님으로 계시다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그는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했다.
육신 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이 더 빨리 태어났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해 먼저 계신다고 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질문을 하셨다. 그리스도는 누구의 후손으로 오시는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다윗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향해 주께서 나의 발 등 상이 되기까지 다윗이 그리스도를 후손인데 주라고 했느냐고 물으니 바리새인들이 말을 할 수 없었다.
◑육신으로 볼 때는 다윗의 후손이지만 그는 먼저 계신 분이시다. 오시기 전에 먼저 계신 분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 땅에 오셔서 훌륭해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 아니다. 석가나 공자는 훌륭하기 때문에 저 사람을 믿으면 구원받겠다고 해서 딸아 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심을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귀신이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이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 육신으로는 사람과 비슷하다. 사람들 보기에는 요셉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이다. 자랄 때 보니까 목수를 했다. 육신으로 볼 때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구분이 안 된다.
그런데 이 나사렛예수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 이 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똑 같은 말은 아니지만 저나 여러분이나 사실은 여러분들이 더 잘 생기고 돈도 많고 똑똑하고... 그런데 우리 교회 와 있는 성도 중에는 사람들 중에 목사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한다.
아무 남자에게 가서 목사냐고 하면 안 된다. 목사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외모로는 표가 나지 않는다. 머리를 보면 표가 안 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설교하고 축도 하는 것을 보니까 저 사람이 목사인 줄 아는 것이다.
만약에 제가 여러분 자리에 앉아 있고 장로님이나 집사님이 축도를 하면 그 분이 목사인 것이다.
◑육신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다른 점이 없다. 그런데 그 분이 하시는 일을 보니까 권세를 보니까 그 분을 통해 일어나는 일을 보니까 그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는가... 인간이 구원을 받고 흑 암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하는데 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이다.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고 그 권세를 알아야 세상을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아무나 믿으면 되는가 안 되는가... 안 된다.
◑이 분을 알아야 모든 인간들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자꾸 성경에 이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하나님과 통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를 잘 모르기 때문에 부처 앞에 가서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 실패를 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돌이 그리스도인 줄 믿고 빌고 있고 물보고 빌고 사람을 보고 빌고... 전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려고 보내신 그리스도가 있다. 그 분이 누구인가 나사렛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가는가 어떻게 병이 낳고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이 변화되고 성령으로 마음속에 계실 수 있겠는가.. 성령으로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힘이 나고 깨달아 지고 기도하면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이다.
예수 영접하는 순간 참 평안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말은 지금 살아 계신다는 말이고 이 말은 그 분은 죽으셨을 뿐만 아니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성령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같이 보이지만 사람이면서 죄는 없으시다.
처녀의 몸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분은 나사렛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행4:12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다.
온 우주가운데 예수님 왜에 구원의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제가 여러 군데를 다녀보았는데 참 감사했다. 아프리카를 가도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흑인들이 얼마나 검은가... 그런데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고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거꾸로 얼마나 하얀지... 그런데 그 사람들도 역시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일본 사람, 중국 사람 할 것 없이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미국 사람이 버터를 먹어도 예수 믿어야 구원받고 한국 사람 청국장 먹어도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다녀보니까 왜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으로 가라고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어떤 민족에게도 하나님은 구원 얻을 이름을 한 분밖에 주시지 않으셨다. 예수님뿐인 것이다.
땅 끝까지 가야할 이유.. 만민에게 가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구주를 한 분밖에 안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3. 전도
그리스도가 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만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를 온 땅에 전하기를 원하신다.
**42절에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어쩌면 우리와 똑 같은지.. 우리는 은혜 되면 가지말고 우리끼리만 있자 고 하는데... 은혜 받을수록 끼리끼리 있지 말고 구원받기로 준비된 사람을 향해 나가서 복음을 전하시기 바란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제가 말씀을 전하니까 어디 안가고 우리만 계속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복음 전하는 문을 여시면 가야 하는 것이다.
어떨 때는 이주나 삼 주 빠지면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하는데... 가야 한다.
**4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으시고 병자를 치유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병을 낳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진정한 목적이다.
우리가 가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가고 병도 낳고 다 필요하다.
그런데 정말 궁극적인 목적은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또 다시 복음을 전하는 일꾼과 제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전정한 뜻인 줄 믿는다.
**44절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그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마28:18-20에
1)너희는... 한 사람이 아니고 너희는 이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너희는...
2)가서... 모든 삶에 현장에
3)제자를 삼아... 교회에서만 훈련하지 말고 가서 현장 속에 제자 삼는 것인 줄 믿는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예수님 왜에는 구주가 없다고 복음을 전하는데 한 사람이 아무리 잘 해도 한 개가 온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진짜로 믿는 제자들이 곳곳에서 세워져야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인 줄 믿는다.
◑제 동기 목사님 중에 한 분이 작은 교회를 하고 계신데 이분을 만났는데 이 분이 말하기를 자기는 수천 수만의 교회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왜 안 부러운가 했더니 이 분이 체육인 선교를 하는데 태권도 선교사들을 훈련을 많이 시키고 신학교를 다니게 해서 전 세계에 보내 놓았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이 분의 제자가 없는 곳이 없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자녀도 태권도를 시키라는 것이다.
왜 유학 보내려면 돈도 없는데 태권도를 오 단 정도 하면 어디든지 사범으로 너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계 사람들이 태권도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한국에서 왔다면 겁을 낸다. 왜 태권도를 다 하는가 해서..
◑태권도는 다른 나라에 가면 왕들 자녀들 고관들이 주로 배운다.
그러다 보니 관원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거기서 영접하고 선교를 하는데 애로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 제자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서 선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큼 전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 제자들을 깔아 놓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아 라고 하셨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국 전 세계에 복음 전하는 제자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예배만 드리고 밥 먹고 주일날 또 오고... 이것만 계속하면 구원은 받지만 전도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복음 전하는 제자로 일어나야 한다. 학교, 지역, 병원, 사업장, 직장에 이렇게 되어야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다.
◑그 곳곳에서 세례를 줘서 교회 화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건물이 없었다. 안 보이는 집... 중국에 많이 있다. 집이 교회인데 가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를 불러서 날마다 대리고 다니시고 날마다 공동체 삶에서 말씀을 듣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전도하게 하고 이렇게 계속했는데 이것이 삶이다.
예수님은 제자훈련을 강의만 하고 돌려보내신 것이 아니고 삶을 같이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로 만드는데 있어서 훈련을 하지 않고 삶을 사셨다.
왜 그런가 영적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알려 하면 성령이 임제 하셔서 말씀이 성취되고 이루어지고 능력이 나타남을 봐야 실제로 되는 것이다.
삶이 되어지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고 듣고만 있어서 필요하지만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을 키워보면 딸은 엄마를 닮고 아들은 아빠를 닮는다.
어떤 엄마는 딸이 자기를 닮았다고 속상해 한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닮는 것이다.
같이 살아서 그런 것이다. 이것을 제자 훈련이라고 한다.
제자는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예수님께서 날마다 제자들과 같이 사시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현장에 말씀을 증거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누가 이것을 했는가.. 제자들이다.
날마다 성전에서 집에서 모였다. 날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을 나누고 떡을 때며 교재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더니 믿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똑 같은 현상이 이 제자들을 통해 일어났다.
이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집이나 직장이나 현장 속에서 같이 사는 공동체가 있는데 같이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같이 기도하고 사랑하고 나누고 복음 전하고 양육할 때 거기서 제자가 자꾸 일어나는 것이다.
◑진짜 제자를 전 세계에서 모아서 훈련해서 보내면 세계 복음 화는 안 되는 것이다.
언제 다 모아서 하는가.. 그 현장에서 제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을 때 한국에 오고 러시아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에서 놓고 가면 전 세계에 번식이 안 된다.
그 곳에서 그냥 나아야 한다.
제자는 그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번식되고 일어나야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작은 현장에 공동체가 곳곳에 퍼져나가면서 그 속에서 제자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중국은 전도하면 잡아가서 표가 안 난다.
여기서 소수가 모여 있는데 자꾸 번식이 되어서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이 확실하지 않고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들은 잘 안 일어난다.
그런데 중국에 가서 이것을 설명을 했더니 죄송하지만 여러분 보다 훨씬 더 잘 이해를 하는 것이다.
왜 모양이 비슷해서이다. 그래서 그 속에서 자꾸 번식이 되어져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하신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모든 공동체 속에 주인은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전도이고 이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자녀 되고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이 주의 뜻이고 교회를 세운 목적이요 저와 여러분이 살아야 될 목적인 줄 믿는다.
승리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
눅 4:31~37 / 이병권목사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제일 처음으로 소개되는 예수님의 이적입니다. 특별히 두 번에 걸쳐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저는 이 두 번의 반응에 따라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32절과 36절에 나오는 두 반응은 기본적으로 같은 반응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놀라는 것입니다. 32절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놀랍니다. 그리고 36절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서 놀랍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그 능력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사람들의 놀라는 반응이 두 번에 걸쳐서 표현되지만 놀라는 이유는 결국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말씀!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에 대해서 살펴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지난 누가복음 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31절에 “내려오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가버나움은 나사렛보다 더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은 언덕지대에 있었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의 도시입니다. 가버나움은 나사렛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3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갈릴리 북부 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농업과 어업이 번성했으며, 다른 지역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대가 가버나움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각 지역으로부터 여러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 계시는 동안에 본부와 같은 곳으로, 중심이 되었던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32) 회당에서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용한 단어는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왕이나 재판관의 주권적인 결정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 말씀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동일한 사건을 두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백성들이 놀랐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동안 들어왔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던 것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유대교의 전승에 근거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보통 유명한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그 랍비들의 견해를 가지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칠 때마다 랍비들의 말을 가지고, 그 권위를 세웠습니다. 안식일마다 사람들은 이런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아무개 랍비가 말한 바에 의하면….” “이것에 대해서 아무개 랍비는 말하기를…” 이런 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위임받은 권위였습니다. 앞선 랍비들의 권위를 가지고 와서, 그것에 따라 가르쳤던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과제를 낼 때, 그 과제가 통과되게 하려면, 제가 쓴 글에 대해서 항상 그 근거를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권위 있는 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 출처를 밝혀서,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제가 하는 말이 힘이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근거 없이 말하면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어떤 내용을 전달할 때, 꼭 그 분야의 전문가가 나와서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 합니다. 제 딸들이 뭔가를 할 때 자주 내세우는 말이 있습니다. “아빠가 해도 된다고 했어”, “엄마가 먹어도 된대” 자기보다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의 힘을 빌려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정당함을 밝히는 것!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주 그러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하라고 그러셨어요”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를 빌려와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웁니다.
당시 서기관들이 그런 방식으로 백성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찾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떤 랍비들도 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직접 다루시며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어떻게 다른지 마태복음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5:21-2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7-28)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5:31-32)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5:33-3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5:38-39)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3-44)
계속 반복되는 것이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권위가 아닌,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록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8-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뒷받침해 줄 아무런 권위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을 세우기 위한 누군가의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자로서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구약의 참 뜻을 알려주셨기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성경의 저자가 말하듯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들어왔었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놀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또 놀라게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듣고 놀랐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등장은 아주 요란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겁니다. 누가는 이 사람에 대해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귀신에게 속박되어 있습니다. 사악한 힘이 이 사람에게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당의 모든 사람들이 이 귀신 들린 사람을 주목하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숨죽이며 지켜봤을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께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자신이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임재는 귀신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통해 공의가 실현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겪게 될 일을 생각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감을 느끼며 어찌할 수 없는 압박감 속에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34절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질문은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당신은 우리를 간섭하십니까?” “왜 당신은 우리를 괴롭게 하십니까?” 그래서 이 말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상투적인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그 이유를 스스로 말합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귀신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고 있는 이 분은 악한 세력을 모두 멸하시고, 그들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모든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통치하실 분이십니다. 귀신이 한 이 말은 예수님의 권위를 제시함은 물론이고, 자신도 예수님의 권위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줍니다.
이에 덧붙여서 귀신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귀신을 통해, 귀신 들린 사람의 입술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지금까지 다양한 대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해서 증거 했습니다. 천사들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로, 그리고 지금은 귀신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칭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와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아론(시 106:16)에게,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 엘리사(왕하 4:9)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그것을 알게 합니다. 이사야에 예언된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의 성취됨을 선포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8)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성령이 임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지니고 있는 분,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분,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영적인 존재에 의해 지배를 받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누구입니까? 더러운 영을 지닌 자와 거룩한 영을 지닌 자입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붙들린 사람과 거룩한 성령이 임한 예수님이 대조됩니다. 누가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회당에서 벌어진 사건, 이 양극단에서 대조되는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제가 여러분의 집에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가서 갑자기 지금 집에서 나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타당한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제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니라, 만약에 대통령이 와서 지금 당장 집에서 나오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의 반응이 다르겠죠? 그 사람이 가지는 권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나오라 말씀하시자 귀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귀신이 떠나갑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면서 시끄럽게 했던 귀신이 예수님의 권위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명령하셨고 귀신은 순종했습니다. 귀신이 떠나가자 귀신 들렸던 사람은 즉각적으로 회복됩니다.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갔고 그 사람은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악한 세력은 패했고 귀신 들렸던 사람은 안전하게 보호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한 세력을 이깁니다. 악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승리하십니다.
이것은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선포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19)
주의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귀신에게 매인, 포로 된 자에게 예수님은 자유를 허락하십니다. 누가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으로 소개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이사야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본 사람들은 놀라며 이렇게 서로 말합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능력을 본 사람은 놀람을 감추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악한 세력이 그 말씀에 굴복하는 것을 눈으로 봅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또 다시 예수님의 권위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악한 세력을 압도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많은 가르침을 들어 왔습니다. 여러 선생으로부터 들어왔었는데, 지금 이 분은 다릅니다. 이 분에게는 다른 선생에게는 없는 권위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능력이, 그러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회당에서 가르쳤던 사람들은 악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분은 악에게 명령하고, 악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서 그 말씀에 권위와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위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그 결정을 성취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 일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곧바로 “그 근처 사방에” 퍼져 나갑니다. ‘그 근처 사방은’ 갈릴리 지역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역의 모든 곳으로 퍼져 갔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에 대한 소문은,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또한, 한편으로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안식일 규정에 대한 논쟁거리를 만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적은 예수님의 이적 사역의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누가복음에서 계속 이러한 이적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러 측면에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기대가 되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이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에, 사실 이런 이적들을 읽어도 별로 놀랍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당에서 이 광경을 직접 봤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 회당에 같이 있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자! 상상해봅니다. 여러분이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유대인입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말씀을 듣기 위해 갑니다. 그런데 그날은 한 젊은 선생이 와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근데 들어보니 “와! 정말 놀랍습니다.” 그 가르침이 다릅니다. 권위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칩니다.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명령대로 귀신이 순종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능력을 보면, 누구든 그 권위에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은 절대적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세력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권위와 능력은 악한 세력에 매여 있는 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며, 잡힌 자들에게 은혜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그 악한 세력으로부터 포로 된 자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직접 귀신을 들린 자를 치유하심으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권위를 인정하며, 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악한 세력은 나름의 권위를 가지고 세상을 흔들며 힘을 떨치고 있습니다. 악하고 타락한 세상을 보면, 그들의 힘이 정말 강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다보면, 때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권위가 대단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끔 그런 경험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 돈 많은 사람들이 더 권위가 있는 것 같고,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그 모든 권위는 예수님 손 안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까지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모두 굴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누구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치 회당 안에서 예수님을 봤던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본 사람입니다. 비록 실제로 눈으로 예수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분의 권위와 능력을 우리의 구원과 삶을 통해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목하며 그 권위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까? 계속 고집을 부리며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서, 그 권위대로 말씀하고 행하는 분이심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그 선포하신 말씀대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악한 영들, 우리를 끈질기게 잡아 붙들고, 괴롭히는 죄들, 그것에서 참된 자유를 선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에게, 그분의 권위 앞에 참으로 엎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권위의 말씀
누가복음 4:31-39
[34절]은 회당에 있던 귀신들린 자가 그리스도께 대해 불평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고백하는 장면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신들린 자가 가진 남다른 지식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귀신을 따르는 자는 특징은 지식만을 자랑한 다는 것입니다. 귀신에 매인 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를 지식적으로 알지라도 주 예수를 믿거나 따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4: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주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축출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꾸짖어 이르시되”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귀신들린 자를 귀신의 매임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귀신보다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이며(마태 12:29). 주님은 만유의 주요 절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 아담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2]에 사단을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단이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 지금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핸드폰과 게임에 빠져 사는 것도 사단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사단은 정치 경제 문화을 이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미움과 불안 두려움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소망을 둘 곳 없는 어둠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인류는 사단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주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어둠의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시고 영생의 소망을 가져다 주신 분이 있으니,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를 멸하심으로 자신의 택한 백성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사단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 그러나 이는 너무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현실의 삶 속에서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나온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장모를 모시고 함께 살았는데 당시의 풍습은 부부가 결혼하면 부모의 곁을 떠나 가까이 독립하여 사는 것이었는데, 그의 집이 가난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의 장모는 중한 열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나와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왜 베드로는 스스로 예수께 나가 “저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고쳐주시지요” 라고 말하지 못한 것입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처지를 주님 앞에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자신의 누추한 집에 들어오신 주님 앞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입장(立场)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보고, 안식일에 예수님께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여기에서 ‘꾸짖다’ 라는 의미로 쓰인 ‘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ω )’ 는 사람을 향한 질책(rebuke)을 의미하는 말인데, 이를 주님은 거친 갈릴리 바다의 바람과 물결을 꾸짖는 데도 쓰셨습니다.[마태 8:26] 우리 주님은 만유의 창조자이며 주재이십니다.
○ 장모의 열병을 고치는 이 기사는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데,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병자의 손을 잡아일으킨 결과 열병이 떠난 것으로 기록하여 (마 8:15)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다정하신 모습을 보여주지만. 누가복음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누가는 신체적 접촉은 언급하지 않은 채, 열병을 꾸짖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는 예수의 신적 권능과 ‘말씀의 권세’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예수의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32절) 했고, 사람들이 “이 어떠한 말씀인고”(36절) 라고 하는 반응을 기록하여 ‘예수의 말씀의 권세’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의 말씀’이라 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한 기도와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정의를 잃어버린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모스에게 두개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메뚜기 재앙과 불 재앙의 환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북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다시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돌이켜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의 이 기도를 들으시고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양치는 목자로 살았던 아모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멈추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주님은 우리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주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야고보 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대적하면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명령함으로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고,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를 사용하여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 그러나 사람의 말과 세상의 환경, 나의 처지와 자존심, 나쁜 습관들, 좁은 생각들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방해합니다. ○ 세상 만물이 주의 것이고 주께서 주시기도 하시고 가져가시시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무엇이 있다고 우쭐댈 것도 없고 없다고 낙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생각과 주장이 강하여 주의 뜻을 거역할까 두렵습니다.
◉ 지난 수요일은 만 93세 되신 아버지의 생신날이었습니다. 전날 형과 전화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부여에 가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가 오락가락하는 정도로 여겨져 비가 오면 박물관에 있다가 비가 오지 않는 시간에 야외를 보려 하였지만 예상외로 비가 계속하여 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전 10시 서산 아버지에게 갔을 때 형은 “비 오는데 어디 가려느냐. 아버지를 힘들게 하면 안된다” 하며 계속하여 제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먼저 비를 맞지 않는 박물관에 먼저 갔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비가 오니 박물관 가까이 있는 한식부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제일 중요한 점심 식사 시간을 고급뷔페도 아니고 일반식당의 뷔페이니 어떠하였겠습니까? 이것이 그날 제일 속상했습니다. 좋은 식당을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는 부담으로 가까이 일반식당에서 아버지 생신날 점심을 한 것이 지금도 속상합니다.
○ 우리는 때때로 나의 한계, 나의 자존심이 중요해서, 아니면 사람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더 좋은 선물을 거부하고 “이 정도면 됐다.” 멈출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마음, 믿음을 갖고 늘 “주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나와 함께 하신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 구하는대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반드시 내가 구한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염려와 많은 생각으로 일을 그릇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호크마주석
=====4: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요 6:55-59).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 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내려오사 -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여준다.
가르치시매(* , 엔 디다스콘) -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종일 쉴틈없이 진행되었음알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 늦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4:32
권세가 있음이러라 - 마가복음 평행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4:33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 )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 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34
아(* , 에아) -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단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사단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4:35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구령을 거듭내리신(마 8:4;막 1:34)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가 육신상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 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넘어뜨리고...상하지 아니한지라 -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들이지 않은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4:36
다 놀라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 )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추방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 뿐으로 오히려 또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4:37
소문이...퍼지니라(* , 여세포류에토 에코스) -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 )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4:38
시몬의 장모 -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은 베드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중한 열병 -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차증해준다.
붙들린지라(* , 쉬네코메네) -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네코'(* )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열병을 꾸짖으신대 -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 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