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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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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신 [1892.2.4~1978.9.28] 훈격 : 건국훈장 애국장 / 서훈년도 : 1993
공적개요 태평양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 ○국내에서 부인회, 간호대, 청년단 등 조직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비밀요원으로 활약 ○미국으로 건너가 애국부인회 총단장 등 역임
5월의 독립운동가 차경신(車敬信)선생 (1892.2.4 ~ 1978.9.28) ◈태평양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차경신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부인회, 간호대 및 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어학교 초대교장 및 대한애국부인단 총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모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각한 평등관을 정립하고, 민족대표 양전백 선생이 세운 보성여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였다. 졸업 후 명신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다시 정신여학교 사범과에서 수학한 선생은 이후 함남 영생학교, 진성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918년 선생은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평생의 동지인 김마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였던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 전문을 국내 반입할 것을 논의하고 부친의 사망을 구실로 국내로 들어왔다. 2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한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비밀장소인 백산상회에서 신한청년단 당수 서병호 등을 만나 여성 단체 조직을 계획하였고, 평북 선천에서 신한청년당 회원 50여 명을 모집하여 선천지역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활동에 주력하였다.
일제의 감시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선생은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으며, 1919년 11월 대한청년단연합회 총무로 평안도 지역에서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국내를 오가며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만주에서의 활동도 일본군의 토벌에 의해 유지를 할 수 없게 되자 상해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이 당시 모친 박신원이 일경에 체포되어 온 몸에 화상을 입는 참극을 당하게 되자 선생의 민족의식은 더욱 강하게 불타올랐다. 1920년 8월 보다 구체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상해로 온 선생은 도산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며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고, 대한민국회부인향촌회 등 국내 항일여성단체와 계속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집과 연락망 구축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상해 홍십자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김마리아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와 교회주일학교에서 주일공과를 맡았고, 샌프란시스코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어 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도 진력하였다. 1933년부터 39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각지에 지회를 확대 조직하고 임시정부 및 국내외 동포들의 구제사업에 힘썼으며, 이밖에도 도산 안창호와 연계 하에 국민회,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이렇듯 광복의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조달과 여성교육에 큰 몫을 담당했던 선생은 1978년 9월 2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여성들에게 정치의식, 자유민주주의 의식 등을 고양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쳐 자신이 삶의 주체이며 인
격체라는 것 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해방 이후 차별받는 여러 권리들을 주장하며 여성운동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차경신 선생(1892-1978)의 삶과 독립운동 - 태평양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 -
윤정란(숭실대)
차경신 선생은 1892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19세부터 54세까지 일제강점 36년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차경신에 대해 지금까지 역사적인 재조명이 많이 부족하였다. 그의 생애를 간단하게 소개하거나 동생 차경수가 회상하면서 쓴 글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재조명되지 않았던 차경신의 독립운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차경신선생은 어떻게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는가 선생은 기독교와 근대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녀는 1892년 미곡상을 하던 부친 차기원과 모친 박신원 사이에서 첫째 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기독교 교세가 가장 급속하게 성장했던 평북 선천지역 가물남이었다. 선천은 평북지역 뿐 아니라 전국에서 개신교가 가장 활발하게 성장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선생은 모친 박신원을 통해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박신원은 선교사 휘트모어(N.C. Whittemore)가 1897년 선천 가물남에 첫 방문했을 때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 기독교를 접한 박신원은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 때문이었다.
선비 박취호의 딸로서 삼대독자인 차기원과 혼인을 한 그는 홀로 된 시부를 모시며 살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다 딸만 여섯 낳은 그는 차씨 문중의 걱정거리가 되었으며,비웃음을 당했다. 이러한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그녀는 기독교를 만났던 것이다.
박신원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남녀평등관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았다. 이러한 남녀평등관은 종교적 개인주의에서 기인하였다. 즉 기독교 신앙에서 주장하는 구원은 교회나 사제가아니라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개인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며,모든 인간은 성별구분 없이 신과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십계명,기독교 문서 등을 통해 정직, 신용 그리고 근면과 절제 등을 기독교 윤리로 받아들이고 장차 이러한 기독교 윤리에 철저한 인간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교육을 받아야 장래에 희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박신원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도 전통적 유교관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결국 딸만 여섯을 낳았다. 부친 차기원은 박신원이 딸만 낳자 집을 떠나 황해도로 가버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박신원은 교회 일에 더욱 열심이었다. 1905년 차경신 선생의 나이 13세 되던 해에 박신원은 정용경과 함께 가물남에 교회를 세웠다.
차경신은 이러한 박신원을 통해 기독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박신원이 먼저 접한 기독교를 통해 기존의 유교적 여성관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자유와 자기 결정의 권리에 대한 신념을 배웠다.
모친을 통해 알게 된 기독교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배운 차경신 선생이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은 양전백의 영향이 컸다. 모친 박신원은 당시 양전백 목사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선천북교회를 다녔다. 이 교회는 1896년 선천군 수청면 출신의 노효준과 1897년 선천읍 출신의 나병규가 평양을 여행하던 중 기독교를 접한 후 선천으로 돌아와 전도를 시작하면서 그 기초가 만들어졌다. 1897년 위대모,배위량 두 선교사가 양적으로 증가한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푼 후 1898년 봄 6백냥의 기금으로 선천읍 석장동의 기와집 30여 칸을 매입하여 새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양전백이 선천으로 이주한 것은 조사로 있던 1898년이었다. 1870년 평북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출생한 그는 1896년 위대모가 평북지역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그의 조사가 되었으며,1902년에는 선천북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07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양전백이 민족문제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은 이후였다. 그는 1892년 서당을 운영하던 중 의주 출신 김관근에 의해 기독교를 알게 되었으나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후 그가 기독교를 완전하게 받아들인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였다. 이 전쟁으로 그가 운영하던 서당은 크게 손실을 입었으며,이를 계기로 현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인들은 10배의 성장을 보였다. 이것은 동학운동의 좌절과 자본주의 열강의 한국침략이 가속화되자 많은 한국인들이 기독교에서 유일한 희망을 발견하고 정신적 공황상태를 극복하는 종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전백도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선교사 마펫(S. A. Moffett)을 찾아가 인생을 상담하고 1895년 세례를 받은 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후 기독교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그가 민족 문제에 대해 다시 깊이 있게 생각한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을 겪고 난 이후였다. 이 전쟁으로 평북지역에 있던 모든 교회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막사 혹은 마굿간으로 이용되거나 파괴되었다. 그는 약소민족으로서 겪어야 하는 불행한 역사적 체험을 직접 함으로써 민족의 생존과 독립에 대한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민족교육운동,신민회운동,3․1운동에 깊이 관여하면서 서북지역의 기독교 민족지도자로서 활동했다. 모친 박신원과 함께 선천북교회를 다니면서 차경신 선생은 이러한 양전백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민족의식을 지니게 된 차경신 선생이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그 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민족교육공간을 통한 민족적 인물들과의 교류였다. 그것은 보성여학교와 정신여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보성여학교는 차경신 선생의 나이 16세 되던 해에 입학한 학교였다. 이곳에서 그는 강기일,김성무,오순애,김신의,김강석 등을 만났다. 보성여학교는 1907년 선교사 휘트모어,로스(C. Ross),샤록스(A. M. Shaηocks),양전백,이성삼 등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그 해 10월 10일 선전 미동병원 부속건물인 제미신(A1m Jamision) 기념관을 임시교사로 하여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여선교사 체이스(L.M.Chasc)였다. 체이스는 1896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녀는 초기에 부산에서 여성 중심의 선교사업을 한 후 1898년에서 1899년까지 대구에서 여성전도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1년 평북 선천으로 옮겨와서 보성여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당시에는 사회,정치,문화적인 여성 차별의식 때문에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여자교육기관을 설립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의 여성교육은 기독교 선교회가 담당하였다. 한국 주재 각 선교회에서 한국 여성교육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차별받는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기독교화에 매우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1895년 북장로회 선교회 연차회의에서 "서울의 남자학교와 여자학교의 초등교육을 엄격한 종교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이 전체적인 의견이었다. 따라서 선교회측에서는 기독교화를 목적으로 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했지만 한국 여성은 이러한 교 육의 창을 이용하여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하였다.
보성여학교는 여선교사 체이스가 초대 교장으로 있었으나 양전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민족의식이 투철한 학교로 출발했다. 양전백은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겪으면서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교육을 통해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을 구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명신학교,신성중학교 등을 설립하고 여학교로서 보성여학교를 설립하는데 적극 노력했던 것이다.
차경신 선생이 이 학교에서 배운 교과목은 산술,성경,한문,작문,역사,지리,과학, 심리학,동식물학,윤리,성서지리 등이었다. 이러한 근대적인 교과목을 배우면서 다른 학우들과 민족의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고민하면서 차경신의 민족의식은 강화되었다.
처음 이 학교에 입학한 여학생 수는 30명 안팎이었으나 1910년 l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는 차경신을 포함해 강기일,김성무,오순애,김신의,김강석 등 6명에 불과했다. 함께 졸업한 강기일은 여성교육운동,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김성무,오순애,김강석 등은 명신유치원,영덕여학교 등을 설립한 여성교육운동가들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들과 함께 보성여학교와 선천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층 더 민족에 대한 문제를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차경신 선생은 졸업 후 명신학교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명신학교는 1903년 평북 강계읍에 설립된 장로교계통의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는 민족교육운동의 산실이었으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강계 만세 시위운동의 주역을 담당한 곳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던 차경신 선생이 민족운동단체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정신여학교 진학이었다. 1914년 4년간의 명신학교 교사생활을 청산한 차경신 선생은 정신여학교 사범과에 입학하여 1년 만에 1회로 졸업하였다. 당시 함께 졸업한 학생은 김성매,김영도,박정희 등이었다.
이 학교는 입학을 하면 반드시 기숙사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학생이라도 정신여학교에 입학하면 기숙사 생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아침등교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으며 학교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는 것이 일과였다. 귀가 허가로 집에를 가든지 혹은 시내 외출을 할 때 반드시 보모가 데리고 다녔으며,지방에 있는 학생들이 귀성을 하기 위해 정거장에 나가면 보모가 서울역까지 함께 갔다.
1909년 겨울 이웃학교인 경신학교 크리스마스 축하행사에 정신여학교생 60여 명이 보모의 인솔로 구경을 갔다가 모두 3일간의 정학처분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학교 당국에서는 여성들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엄금하였지만, 집을 떠나 같은 또래간의 공동체 생활은 한국여학생들에게 여성과 민족에 대한 의식을 싹트게 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규율 하에 학교를 다니면서 차경신 선생은 미래 민족을 위한 사업을 구상하였다.
정신여학교는 또한 많은 애국적인 여성들을 배출한 학교였다.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차경신 선생의 민족에 대한 의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차경신 선생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마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차경신은 정신여학교에 재학 시 김마리아를 만나지 못했다. 이 학교 졸업생이자 교사였던 김마리아는 차경신 선생이 정신여학교에 진학할 당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1913년 광주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다 정신여학교로 옮겨 온 그는 교장으로 있던 루이스(Lcwis,Margo Lcc)의 권유로 1914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김마리아는 재직 중에 항상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던 인물이었다. 민족의식에 투철한 김마리아를 차경신 선생은 정신여학교에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차경신 선생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 많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차경신 선생이 김마리아를 만나게 된 것은 일본에서 유학을 할 때였다.
차경신 선생은 정신여학교 졸업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지 않고 잠시 교사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졸업 후 간 곳이 함남 영생학교였다. 이 학교는 관북지방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 1903년 캐나다 장로회 내한선교사 맥레(D. M. MacRac)의 부인 서더랜드(E. F. Suthcrland)와 매컬리(L. H. McCully)에 의해 설립되었다. 차경신은 이곳에서 l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다 1916년 원산 진성여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이 학교는 1904년 함남 원산시 명석동에 설립된 장로계 초등교육기관으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푸트(W. R. Foot) 와 럽(A. F. Robh)에 의해 설립된 학교였다. 이곳에서 교육에 종사하다 좀 더 교육을 받아서 민족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차경신은 1918년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차경신 선생은 이러한 민족교육공간을 통해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여러 학우들 그리고 교사들을 만나면서 민족에 대한 의식이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민족운동에 직접 나서기에는 아직도 자신의 배움이 모자란다고 차경신 선생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감하기도 전에 차경신 선생은 김마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민족운동가로서의 삶은 김마리아로 인해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차경신 선생의 국내, 중국,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 국내에서의 활동 차경신 선생의 독립운동은 신한청년단과 관계를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그 동안 미래의 독립을 위해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였으나,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실천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계기가 된 것은 김마리아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1919년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재학 중이었을 때 김마리아가 차경신 선생을 찾아왔다. 김마리아는 차경신 선생보다 일찍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1915년부터 김마리아는 동경에 유학중인 남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춘원 이광수를 비롯한 김도연,백관수,서춘,최팔용 등이 민족의 장래를 논의하던 모임이었다. 1919년 1월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국 학생 600여 명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 김마리아도 1918년 백관수,송계백의 권유를 받고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모임의 주도로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유학생학우회 총회란 명목으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때 황애덕,정자영,현덕신,유병순,나혜석,노영근,성목진 등이 참석하였으나 김마리아와 차경신은 이 자리에 없었다.
2․8독립선언서 발표 당시만 해도 차경신 선생은 유학생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모두 김마리아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1919년 일본 여자 친목회에서 차경신 선생을 대표로 선출하여 3·1만세운동을 위해 국내로 들여보내려 하였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 후 김마리아가 1919년 요코하마에 있는 차경신 선생을 방문하여 2․8독립선언서 전문 국내 반입 계획을 의논하였다. 김마리아는 동경유학생 대표로,차경신 선생은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로 밀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2월 차경신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국내에서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는 기도 제목으로 1주일 동안 새벽기도회를 가졌다.
국내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관부연락선을 타야 했는데 일경들이 부두에서 까다롭게 검문 검색을 했으므로 위험한 모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때마침 차경신 선생 부친의 사망으로 이를 구실로 김마리아와 함께 국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시 차경신 선생은 1년만 더 수학하면 졸업할 수 있었지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부터 차경신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삶을 살았다. 차경신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미농지에 베껴서 국내로 들어왔다. 1919년 2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백산상회를 찾아갔다. 이곳은 안희제가 1914·5년경 해외를 출입하는 민족운동가나 학생들이 비밀리에 모여 연락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비밀장소였다.
다시 두 사람은 대구로 가서 서병호와 김순애를 만났다. 당시 대구에도 백산상회 지점이 설치되어 있어 아마 이곳에서 만난 것으로 보인다. 서병호는 김마리아의 큰 고모부였으며,김순애는 작은 고모였고 작은 고모부가 김규식이었다. 서병호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1919년 l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당수로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차경신 선생은 당시 독립운동의 주역을 담당하던 인물들과 교류할 수 있었으며 신한청년단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곳에서 차경신 선생과 모인 사람들은 민족운동을 위한 여성 단체 조직을 의논하였다.
이를 위해 김마리아와 김순애는 광주로 가고 차경신은 영천으로 가서 자금을 모집한 후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 그는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를 만나 여성계의 일을 의논하고 함태영을 만나 3월 l일 만세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차경신 선생에게 선천지역 독립운동을 맡겼다. 먼저 차경신 선생은 평양으로 가서 김경희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의논하였다. 김경희는 평양 출신으로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 근무 하면서 1913년 여성 비밀결사단체인 송죽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3·1만세운동 당시 평양에서 기독교 여성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하다 일경의 추격을 피해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후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다시 평양으로 온 그는 비밀결사 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활동하다 1919년 사망하였다. 이러한 민족운동 경력을 가진 김경희와 만나 의논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선천으로 갔다.
선천에 도착한 차경신 선생은 신한청년당 회원 50여 명을 모집하고 독립 정신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선천 신생학교,보성여학교,선천읍교회 지도자들과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만드는 일을 논의하였다. 3·1만세운동 당일에는 보성여학교 교사 황기성,졸업 동기 김강석,강기일,오순애,재학생 차진희,정구한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모친 박신원과 함께 선천지역 만세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고향인 가물남에 머물면서 어머니와 함께 평안도 일대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으는 일과 간호대를 조직하기 위해 봉대,가위,홍전 등을 마련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내에 있던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일에 진력하였다. 당시에 조직된 많은 항일여성운동단체들의 주요 활동도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차경신 선생도 상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이러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2. 중국에서의 활동 차경신 선생이 신한청년단과 관계를 맺은 이후 상해 임시정부와 계속 연계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상해임시정부에 차경신 선생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교통차장으로 있던 동생 차경순의 남편 선우혁, 이광수,안창호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있던 도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도산과 차경신 선생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 차경신 선생이 도산을 만난 것은 김마리아 때문이었다. 김마리아는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만났는데,이곳에서 안창호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차경신은 안창호와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도산은 차경신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힘들어할 때마다 편지를 보내어 위로했다. 차경신 선생에게 인정이 많고 근면하며 진실하고 너그럽다는 칭찬을 하면서 우리 민족이 그녀를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어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도산과의 친밀한 관계는 부인 이혜련과의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이혜련을 차경신 선생은 어머니라 부르며 도산의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보내곤 하였다. 그러고 나중에 미주에서 박재형과 결혼할 때 이혜련이 차경신 선생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해임시정부 요인들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둘째는 상해 임시정부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 헌장 3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함’, 5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유함’이라고 선포하여 남녀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똑같은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밝혔다.
임시정부가 이렇게 표방한 것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여성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19년의 3·1만세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일어났을 때 각 지역마다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남녀의 협력을 통한 독립운동과 국가건설,한국의 행복,일본의 행복,세계의 행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힘을 남성들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서 남녀평등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에 많은 항일여성운동단체가 조직되어 임시정부의 일을 적극 지원하였다.
국내에서 임시정부의 일을 하던 차경신 선생은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동생 차경수와 함께 만주로 떠났다. 1919년 11월 대한청년단연합회가 만주에서 결성되었을 때 차경신 선생은 총무로 활약하였다. 대한청년단 연합회는 1919년 4월 남만주 안동현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의 후신이었다.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총재 안병찬이 1919년 8월 체포된 후 병보석으로 탈출하여 김승만,김시점 등과 함께 1919년 11윌 1일 취지서를 발표하고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차경신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의 구성원은 초기에 총재 김승만, 부총재 박춘근,총무 김찬성·차경신,서기 오능조·유건혁, 재무부장 김시점, 편집부장 함석은,교육부장 최지화,통신부장 오학수 등이었다. 같은 해 12월 총재 안병찬,부총재 김찬성,총무 김승만·차경신, 서기 오능조·유건혁, 재무부장 김시점,편집부장 함석은,교육부장 최지화,통신부장 오학수,교제부장 김두만,노동부장 박춘근,경호부장 여헝근 등으로 구성원을 개편하였다. 구성원 대부분은 평안도 지역 기독교인들이었다. 특히 평안도지역 출신이 많았던 것은 이곳에 이 지역 출신의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활동이 많았다.
이 단체는 대한청년보라는 협회보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특히 임시정부 임시교통국의 임무와 독립군의 역할을 병행하였다. 1919년 7월말 안동지부가 임시교통국으로 처음 설치된 이래 국내에는 평안남북도,함경남도,황해도,서울 등지에,만주에는 관전현과 장백현에 두어졌다. 관전현과 장백현은 안동과 쉽게 통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관전현의 교통국 설치는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조직을 기반으로 생겨났다. 그리하여 관전교통국의 업무는 청년단연합회 통신부장 오학수,교제부장 김두만이 겸임하였다. 오학수는 안동교통국의 통신 위원으로,김두만은 강변 8군 지방교통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차경신 선생도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와 상해 임시정부를 연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주로 평안도지역에서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김승만이 정애경,최순덕과 함께 차경신 선생에게 준 비밀서신,춘원 이광수가 '띠는 녀름날,무르는 수풀 속을 멧번이나 귀중한 국셔를 나르고 치운 만쥬벌 셜한 풍 밋헤 얼마나 그의 몸이 얼었오’라고 보낸 편지와『독립신문의 기사들 통해 그의 역할이 무엇이 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평남 안주의 부인관찰단도 1920년 9월 부총재 김찬성의 권유로 조직되었다. 아마 차경신 선생의 역할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초반에 결성된 항일여성운동단체들 대부분은 비밀리에 조직되었기 때문에 차경신 선생과 연계된 여성단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황으로 보았을 때 평안도 지역 여성단체 조직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0년 4월경 평양 상수구리에 사는 김상만이 모집한 4백여 원을 고유순이라는 여성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국내에서 모집된 군자금을 받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에서의 활동도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일본군의 토벌에 의해 유지를 할 수 없게 되자 차경신 선생은 상해로 이동하였다. 1920년 5월 16일 일경이 동 회의 본부를 습격하여 안병찬을 비롯한 5명이 체포되었고,1920년 7월 오학수 등이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보관해둔 무기가 발각되어 많은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이 와중에 차경신의 모친 박신원이 일경에 체포되어 온 몸에 화상을 입는 참극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차경신의 민족의식은 더욱 강대해져만 갔다. 몇 차에 걸친 일경의 습격으로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쇠퇴하자 안병찬,김찬성 등은 상해,북경 등지로 이동하고 김승만은 단독으로 이 단체를 이끌다 민국독립단과 연합하여 광복군 사령부로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 이 시기에 차경신 선생도 상해로 이동하였다.
당시 김마리아도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일경에게 검거되어 1920년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치료를 받자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망명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김마리아도 국내를 탈출하여 상해로 왔다. 비슷한 시기에 차경신 선생도 상해로 왔던 것이다. 상해로 온 차경신 선생은 대한민국회 부인향촌회 등 국내 항일여성단체와 계속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집과 연락망 구축을 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 상해 청년들을 중심으로 면려청년회를 조직하여 신앙을 통해 동포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고자 하였다. 3. 미국에서의 활동 상해에 있던 차경신 선생은 김마리아의 권유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김마리아의 권유도 있었지만 상해 임시정부의 분란과 관련이 깊었다. 차경신 선생이 상해에서 활동할 당시 임시정부내는 분란과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 인정 여부를 놓고 몇 개의 분파로 나뉘어져서 대립하고 있었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1922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1923년 l월 3일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결렬되어버렸다. 도산은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대독립당을 구상하였다. 그래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4년 7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차경신 선생은 이러한 임시정부내의 분란을 뒤로 하고 유학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마리아도 이러한 이유로 1923년 7월 미국으로 재망명했다. 그의 입장은 도산의 정부 개조론을 따르는 것이었으며, 차경신 선생 또한 이 노선을 따랐다. 먼저 미국에 가 있던 김마리아의 권유에 의해 차경신 선생은 1924년 l월 클리버린들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 같이 온 인물은 차영완과 정신희였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차경신은 대한여자애국단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대한여자애국단에서는 환영회를 크게 개최하였다. 이 때 정인경이 차경신 선생의 약력을 소개한 후 차경신 선생의 연설 등이 있었다.
연설 내용은 고국에 있는 동포들이 미주에 있는 한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본국에 있는 노인,청년남녀,어린이들이 모두 교육에 가장 관심이 많으며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현실 등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러한 교육을 담당할 사람들은 미주에 있는 한인들이며 2세 교육이 한국의 독립에 필수조건임을 주장하였다. 차경신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와 교회 주일학교에서 주일공과를 맡았고, 샌프란시스코 여자애국단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곳 한인들이 국어학교를 운영하려는 계획이 있었는데,경제적인 문제, 법률적인 문제,교사의 문제 등으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차경신이 도착하자 그에게 요청을 해서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몇 개월이 지난 1924년 3월 연안선을 타고 로스엔젤레스로 이동하였다.
차경신 선생은 로스엔젤레스로 옮긴 후 도산과 계속 연계를 가지면서 대한여자애국단, 국민회,흥사단에서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국어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로스엔젤레스로 온 초기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너무 어려워 어느 집의 요리사로 취업을 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생계를 꾸리기 위해 가정부,애보기 등을 했다. 차경신 선생은 만주 등을 돌아다니며 몸을 돌보지 않아 자주 몸져누웠다. 이러한 상태였으므로 도산의 권유로 재미사업가 박재형과 혼인을 했다. 결혼 후에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얻게 된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계속 미주 한인사회에서 임시정부와 연계를 가지고 활동했다.
1926년에는 국어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로스앤젤레스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는 등 꾸준히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여자애국단과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1924년 8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엔젤레스 지부 기념식장에서 애국단에 대한 감상과 희망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였으며,1926년,1929년 로스엔젤레스 지부 단장으로 취임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는 여성들에게 민족의식과 여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주제 발표를 듣고 이에 대해 찬성하는 파 2인, 반대하는 파 2인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방식이었다.
그 후 몇 년 지난 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에 선출되어 중요한 활동을 많이 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미주지역 최초의 조국 광복 지원을 위한 최초의 통합 여성단체였다. 이 단체는 1919년 8월 2일 다뉴바지방에서 다뉴바의 신한부인회 대표 한성선,이은기,이낸시,이성애,인성실,로스엔젤레스 부인친애회 대표 임메불,박순애,안혜련,김혜원,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대표 양제현,권영복,김자혜,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대표 전그레이스,박애나,최유실,백낙희,윌로스 지방부인회 대표 임광명,윤우루쓰 등이 모여 조직한 것이다.
이 단체의 조직 목적은 ‘대한의 국녀자를 단합하야 리상 활을 계도하며 실력을 준비하야 대한 독립 운동을 힘쎠 진함'이었다. 즉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대한여자애국단 초기 규칙에 연설 흑은 토론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단원들에게는 의견제출권,표결권,선거권,피선거권 등이 있음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규칙들은 여성들에게 정치의식,자유민주주의의식 등을 고양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여성들이 민족운동을 전개한 것은 일제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려는 것뿐 아니라 모든 압제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사무실은 1919년부터 1926년까지 다뉴바에,1926년부터 1933년까지 샌프란시스코에,1933년부터 1945년까지는 로스엔젤레스에 있었다.
차경신 선생은 로스엔젤레스 지부 단장으로 지내다 총부 사무실을 로스엔젤레스로 옮긴 이후인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이 단체의 총단장 그리고 1940년부터 1944년 해방 직전까지 서기로 선출되어 많은 활동을 벌였다. 선생은 김혜원,임메불,이성례,김혜란,최연실,윤도연,전그레이스,임인재 등과 함께 대한여자애국단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 서부 지역의 한인여성사회의 지도자들이였다.
대한여자애국단은 3·1만세정신을 계승하여 조직된 단체임을 밝히면서 그 중심 활동이 민족운동임을 강조하였다. 동안 민족 운동 후원금을 둘러싼 내부적인 갈등과 자선사업에 치중하던 대한여자애국단은 차경신 선생이 총단장이 되자 직접적인 항일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차경신 선생은 총단장이 되자 단원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활동에 주력하였다.
첫째 지부의 확대였다. 그동안 미주지역 내에만 지부가 존재하였으나 차경신 선생의 활약으로 쿠바와 멕시코까지 확대되었다. 대일전선강화를 위해 1933년 차경신이 총부단장으로 선출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지부의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6년 쿠바의 칼데나스지부,1938년 멕시코 메리다지부,쿠바의 마탄자스지부,하바나지부 등이 속속 결성되었다.
둘째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참가였다. 1934년 7월 25일 가맹통지서를 받고,1934년 10월 l일 총임원회를 개최하여 모든 단원들에게 통상회가 열릴 때마다 5센트씩 걷어서 총액을 1년에 l회씩 대일전선통일동맹회 총본부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셋째는 항일중국군을 지원하는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6월 8일 총단 임원회에서 중국전쟁 재난민과 부상병 등을 돕기 위한 약품과 붕대 등을 모집하는 운동에 참여하자고 결의하여,이를 실천에 옮겼다. 1937년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에게 중국항일동정금 638원 65전을,1938년에는 재난민과 부상병을 돕기 위해 78원을 송부했다. 1939년에는 중국군을 위해 솜옷 마련 의연금을 모금하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중국군을 지원한 것은 곧 이것이 우리의 독립운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넷째 일화배척대회의 참가를 들 수 있다. 1938년 12월 11일 헐리우드영화 예술가조합이 로스엔젤레스 제퍼슨 블러버드의 슈라인 오디토리움에서 개최한 일화배척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여성들의 모습을 자랑하면서 한국의 존재를 홍보했다. 이 행사에서 헐리우드의 남녀배우들,캘리포니아주 부지사 피터슨,영국 맨체스터 가디안지의 극동특파원 등이 일화배척과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다. 주최측으로부터 일화 배척대회를 지원한 공로로 감사장을 받았다.
1940년부터는 1944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서기로서 그리고 1945년에는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단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핵심적인 멤버로 움직였다. 1943년에는 미국 재무성 주최로 로스엔젤레스 공원에서 각국 민족의 민중대회와 전시공채금 모집을 목적으로 한 아메리카데이 행사가 열렸는데 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45년 12월 31일 신한민보사와 차경신 선생이 감사장을 받았다.
1944년부터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참가하였다. 재미한족 연합위원회는 1941년 4월 29일 독립운동을 위해 내부부터 먼저 단결해야 한다는 미주 한인들의 바람으로 성립되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이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은 1942년 연합회 제1차 전체위원회가 개최되었을 때이다. 그 후 차경신 선생이 연합회에 참여한 것은 1944년이었다. 1944년 1월 6일 김혜원 집에서 총단 임원회 개최 결과 차경신 선생이 이성례,임인재,임메불,김혜원 등과 함께 연합회 참석 대표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연합회에서 차경신 선생은 1944년 4월 8일 국방과장으로,1944년 11월 9일 재무 등으로 선출되었다. 이 연합회의 주요 활동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모금활동과 재정지원 확보 등이었다. 그리고 1945년 3월 3일 전쟁으로 인한 본국과 해외 난민 구제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된 한인구제회에서 이사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한인구제회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에서 신설한 구제부가 별도로 독립한 단체였다. 차경신 선생은 이와 같이 미주에서의 활동도 모두 임시정부와 연계를 가진 것이었다.
차경신 선생이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와의 연계 속에서 미주에서 활동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여성에 대한 임시정부의 인식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경신 선생이 평생을 민족운동에 바친 것도 남성 못지않게 여성도 정치,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차경신 선생의 활동은 민족 운동을 전개하던 많은 남성들에게 여성의 존재를 자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일제강점기 차경신 선생의 활약과 오늘날 한국여성의 지위향상 차경신 선생이 민족에 대한 의식이 싹튼 것은 주변환경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와 깊은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892년 기독교 급성장지역인 평북 선천에서 미곡상 집안에서 출생한 차경신은 모친 박신원을 통해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박신원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유교적 여성관으로 인해 수모를 받았던 자신의 환경 때문이었다.
박신원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남녀평등관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았다. 이러한 남녀평등관은 종교적 개인주의에서 기인하였다. 즉 기독교 신앙에서 주장하는 구원은 교회나 사제가 아니라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개인주의는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성별구분 없이 신과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둥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십계명,기독교 문서 등을 통해 정직과 신용,근면과 절제 등을 기독교 윤리로 받아들이고 장차 이러한 기독교 윤리에 철저한 인간만이 살아남올 것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교육을 받아야 장래에 희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 했다.
차경신 선생 이러한 박신원을 통해 기독교를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박신원이 먼저 접한 기독교를 통해 기존의 유교적 여성관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자유와 자가 결정의 권리에 대한 신념을 배웠다. 모친을 동해 알게 된 기독교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배운 차경신 선생이 민족의식올 가지게 된 것은 양전백의 영향이 컸다. 양전백은 기독교 목사이면서 민족교육운동,신민회운동,3·1만세운동 등에 깊이 관여하면서 서북지방의 기독교 민족지도자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모친 박신원과 함께 선천북교회를 다니면서 차경신 선생은 자연스럽게 양전백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을 지난 인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차경신 선생은 보성여학교와 정신여학교 등을 다니면서 민족적 인물들과 교류,교과과정 등을 통해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보성여학교는 양전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설립된 학교였다. 이 학교를 여성교육운동,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강기일,김성무,오순애,김신의,김강석 등과 함께 다니면서 이들과의 교류를 통 해 민족에 대한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졸업 후 몇 년간의 교사생활을 한 다음 입학한 정신여학교는 이후 차경신 선생이 실천적 민족운동에 뛰어드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김마리아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정신여학교 재학 중에는 김마리아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이 학교는 김마리아 외에도 민족적 인물을 많이 배출한 학교였다. 학교 기숙사에서의 생활,학우와 선생님들과 교류 등은 차경신 선생의 민족의식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차경신 선생은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배움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교사생활을 하다가 1918년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떠난 지 얼마 못되어 차경신 선생은 김마리아를 만났다. 김마리아와의 만남은 정신여학교 선후배 관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차경신 선생은 김마리아를 통해 신한청년단과 관계를 맺게 되고 이후 이를 계기로 일제강점 36년간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된 것은 첫째는 상해임시정부에 차경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교통차장으로 있던 동생 차경순의 남편 선우혁,이광수,안창호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있던 도산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도산과 차경신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 차경신이 도산을 만난 것은 김마리아 때문이었다. 김마리아는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안창호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차경신 선생은 도산과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둘째는 상해 임시정부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이렇게 표방한 것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여성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19년의 3· 1만세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일어났을 때 각 지역마다 그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남녀의 협력을 통한 독립운동과 국가건설,한국의 행복,일본의 행복,세계의 행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힘을 남성들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서 남녀평동과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항일여성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차경신 선생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 만주 · 상해, 미주에서 활동하였다. 국내에서는 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간호대 조직을 계획하는 동의 활동을 벌였다. 그 후 일경의 감시등으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활동 무대를 만주로 옮겼다. 만주에서는 임시정부의 임시교통국의 임무와 독립군의 역할을 병행하던 대한청년단연합회에서 총무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는 국내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 몇 차례에 걸친 일경의 습격으로 이곳에서도 활동이 불가능해져 상해로 이동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면려청년회를 조직하여 기독교 신앙을 통해 동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려는 일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내부의 갈등과 분란,유학 등을 목적으로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 운영,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으로 몇 개월간 활동하다 1924년 3월 로스엔젤레스로 건너갔다. 로스엔젤레스에서는 국어학교 운영, 국민회 회원,흥사단 회원,대한여자애국단 로스엔젤레스 지부 단장,총부단장,서기,그리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국방과장,재무,한인구제회 이사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한인구제회 활동 등은 모두 대한여자애국단의 대표로서 활동한 것이다. 차경신 선생은 주로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동했다. 차경신 선생이 대한여자애국단의 총부 단장이 됨으로써 이 단체의 노선을 전면적으로 혁신하였다. 그동안 민족운동 후원금 모집과 자선사업 등으로 국한되어 있던 대한여자애국단의 활동을 항일민족운동에 전력 집중하게 만든 것이다. 차경신 선생이 주력한 대한여자애국단은 또한 여성들에게 연설 흑은 토론회,의견제출권,표결권,선거권,피선거권 등을 허용함으로써 정치의식,자유민주주의의식 등을 고양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일제강점기 차경신 선생의 민족운동은 해방 이후 여성들에게 어떠한 방향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지를 제시 한 본보기였다고 할 수 있다.
차경신 선생은 해방 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에서 재무, 위원,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지부에서 서기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0년에는 자유당의 부정 부패를 규탄하기 위한 민주정권 수립 촉구 민중대회에 이화목,임메불,강영복 등과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로 참석하였다. 1968년에 대한여자애국단에서는 차경신 선생이 기부한 은가락지와 은비녀를 국립박물관에 기증하여 이를 기념하도록 했다. 1978년 차경신은 보성여학교에 장학금 5천달러를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한국 여성들은 차경신 선생의 예에서 보듯이 민족주의라는 이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공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여성들은 민족주의를 적극적인 동력으로 삼아 자신이 삶의 주체이며 인격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덕분으로 해방 이후 한국여성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여러 권리들을 주장하며 여성운동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었다. 1993년 차경신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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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니 고마워. 메일로 스크랩해서 잘 읽을게!(^^)
나도 메일로 스크랩좀 할께! 씻구와서 읽어야징>_<!
나도 스크랩
메일로 스크랩해서 두고두고 볼게욤ㅠㅠ
[독립운동] 여자독립운동가 차경신!! 여시야 땡큐!! 잘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