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사도행전(6) 언더우드 선교사(5)
경신학교, 조선 기독 대학을 세우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6년 5월부터 서울 정동 32번지에서 고아들을 데려다가 돌보면서 이들에게 영어 교육을 시켰다. 조선 최초의 고아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초기 고아원에서 데려다가 기른 아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김규식 박사의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래 김규식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동래부사 종사관 김지성(金智性)이었고 그는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였으나 귀양 형에 처해졌고 어머니 마저도 사망하여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됐다. 언더우드는 빈사 상태로 버려져 있는 김규식을 데려다 극진히 간호하고 키웠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김규식은 고아원 겸 언더우드 학당 (경신학교)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 학사 석사를 마치고 (후에 모교인 로노크 대학으로 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도 받음) 고국에 돌아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일제 36년 동안 중국 상해 등지에서 대한 민국
임시정부 요인 (외무부장, 부주석 등)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해방공간에서는 미군정 하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남조선 과도 입법 의회’등에서 활약(부의장, 의장) 했다. 이후 김규식은 중도파를 결속하는 정치 활동을 벌였으며 1948년 4월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 협상
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1950년 6.25 전쟁 중 조선 인민군에 납북되어 평양을 거쳐 북쪽으로 계속 끌려가던 중 병사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경신학교(儆新學校) 초대 교장
언더우드 선교사는 초기 고아원을 ‘언더우드학당(구세학당)’으로 확장 개편하여 1986년 7월 11일 개설 예배를 드리고 초대 학당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당은 경신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씨앗이 되었다.
항일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 또한 이 학당 출신이다. 도산 안창호는 고아 출신은 아닌데 학생으로서 이 학당에서 공부하였다.
초기 새문안 교회에 고아 출신으로 송순명 장로라는 분이 있었다. 송순명은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원에서 성장해 1904년 교회 장로로 임명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발로 뛰는 복음 전파자였는데, 도산 안창호가 바로 송순명 장로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 학당은 1891년 ‘예수교 학당’으로 개명하고 입학 연령을 10세로, 수업연한을 5년제로 하였다. 그러던 중 1897년 이 학당은 선교 정책으로 일단 폐당되었다.
1901년 이 학당은 게일 목사(Re. J.S. Gale)를 중심으로 재설립 되어 연동교회 부속건물 (연지동 136-17)로 이전하였다. 1903~1904년에 언더우드가 이 학교에서 구약 신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1905년 이 학교는 교명을 ‘경신학교 (儆新學校)’로 명명하였다. 1910년 8월 언더우드는 경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1년 동안 재직하였다.
1915년에는 미국북장로교회 (한국선교부)와 미국 북감리회 및 남감리회 (한국선교부) 합동으로 ‘조선기독대학 (경신학교 대학부, 후에 ’연희전문‘으로 교명 변경)’이 설립되었다. 언더우드는 이 대학의 설립과정을 주도하였고
이 학교의 초대 교장 (설립 당시의 직명은 임시 교장)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