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거정의 생애
《사가집(四佳集)》은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문집이다. 서거정은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25세에 관직에 오른 이후 6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화려한 관직생활로 일관하였다. 네 번이나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45년간 다섯 임금을 섬겼고, 23년간 문형(文衡)을 담당한 대문호(大文豪)이자 전형적인 대각문인(臺閣文人)이다. 그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정정정(亭亭亭),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서거정의 증조부 익진(益進)은 고려조 말기에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냈으며, 조부 의(義)는 역시 고려조에서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지냈다. 이들은 고려말 1362년(공민왕11)에 벼슬을 그만두고 난세를 피하여 경북 경산군(慶山郡) 자인면(慈仁面) 아방곡(餓防谷)에 은거하면서 백이 숙제(伯夷叔齊)의 절개를 지켰다. 그러다가 서거정의 아버지 미성(彌性)이 다시 출사하여 조선조에서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따님이다. 서거정은 2남 5녀 중 둘째 아들이며 남매 중에서는 막내이다. 서거정의 형인 거광(居廣)은 1444년(세종26) 서거정이 문과에 급제하던 그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언양 군수(彦陽郡守)를 지냈다. 또 서거정의 다섯 자형(姊兄) 중에 넷째가 최항(崔恒)이다.
서거정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6세에 독서하고 시를 지을 줄 알아서, 사람들이 그를 신동이라 불렀다. 중국 사신의 시구에 절묘한 대구를 맞추었으며, 8세 때 외조부인 권근이 시제(詩題)와 운자(韻字)를 내자 다섯 걸음 안에 시를 지었다. 19세(1438년)에 진사과와 생원과에 잇달아 합격하였고, 25세(1444년)에 식년 문과의 을과로 급제하여, 처음으로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었다. 28세(1447년)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에 승진되었으며, 33세(1452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가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중간에 돌아왔다.
서거정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34세(1453년)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이었다. 그는 절의를 지키는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을 따르지 않고 계유정난의 주역인 한명회(韓明澮)ㆍ신숙주(申叔舟)ㆍ권람(權擥) 편에 서게 된다. 이에 서거정은 세조 및 정난 공신(靖難功臣)들과 함께 밀접한 인간관계를 맺고서 문학으로 봉사하였으므로 순탄한 벼슬살이를 계속하게 된다.
37세(1456년)에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에 전직되었으며, 38세(1457년)에 중시(重試)에 발탁되어 사간원 우사간대부(司諫院右司諫大夫)에 특진되었다. 그해 여름에 한림시강(翰林侍講) 진감(陳鑑)과 태상박사(太常博士) 고윤(高閏)이 사신으로 오자 영접사(迎接使)로서 그들과 수답(酬答)하였다. 39세(1458년)에 정시(庭試)에 우등으로 합격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특진되었으며, 41세(1460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다.
44세(1463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46세(1465년)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역임하였다. 47세(1466년)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 참판이 되었고,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특진되었다. 48세(1467년)에 형조 판서로 성균관 지사(成均館知事)와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였는데, 이때부터 문형(文衡)을 잡아 죽을 때까지 23년간 계속하게 되었다. 이에 나라의 전책(典策)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지어지게 되었으며, 주요 관찬서도 그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50세(1469년)에 완성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시발이 된다. 52세(1471년)에 순성명량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55세(1474년)에 《동인시화(東人詩話)》를 편찬하였으며,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임명되었다. 57세(1476년)에 중국 사신 기순(祈順)과 장근(張瑾)이 왔을 때,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그들과 수창하였는데, 그들에게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해 가을에 우찬성에 승진되었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여 바쳤으며, 58세(1477년)에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을 편찬하였다.
59세(1478년)에 홍문관 대제학을 겸직하였으며, 《동문선(東文選)》과 《역어지남(譯語指南)》을 편찬하여 올렸다. 《동문선》은 130여 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나라 삼국 시대부터 사가 당대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글을 선별하여 찬집한 것으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60세(1479년)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61세(1480년)에 《오자주석(吳子註釋)》과 《역대연표(歷代年表)》를 각각 편찬하여 올렸다. 62세(1481년)에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輿地勝覽)》 50권을 지어 올렸고, 64세(1483년)에 의정부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66세(1485년)에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였고, 67세(1486년)에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하였다. 69세(1488년)에 한림시강(翰林侍講) 동월(董越)과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왕창(王敞)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맞이하여 시문을 수창하였다. 그해 12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거정은 공적ㆍ사적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문집 외에 사적인 저술로, 《동인시화》는 조선조 최초의 한시비평서이며, 《태평한화골계전》과 《필원잡기》는 필기류(筆記類) 저술이다. 이처럼 서거정이 한시비평서와 필기류의 저술을 지은 것은 15세기 후반 훈구계 문인들의 문예취향적 분위기의 일단을 반영한 것이다.
한편 서거정은 위에서 본 것처럼 수많은 관찬서(官簒書) 편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서목을 연대별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경국대전(經國大典)》 8권. 1469년
②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14권. 1476년
③ 《동문선(東文選)》 133권. 1478년
④ 《역어지남(譯語指南)》 권수 미상. 1478년
⑤ 《오자주석(吳子注釋)》 1권. 1480년
⑥ 《역대연표(歷代年表)》 권수 미상. 1480년
⑦ 《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輿地勝覽)》 50권. 1481년
⑧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 1485년
⑨ 《오행총괄(五行總括)》 1권. 연대미상
이처럼 서거정이 당시 관찬사업에 대대적으로 참가하여 많은 저술을 남기게 된 데에는, 그의 뛰어난 문재(文才)가 바탕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서거정이 자기 시대의 문운(文運)이 어느 시대보다 가장 성대하다고 인식한 점이다. 그는 당시 조선과 명나라 등 범동아시아는 안정된 정국을 맞이하여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어 ‘서동문(書同文) 거동궤(車同軌)’가 이루어진 태평성대라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서거정은 조선 건국 초기로부터 자기 시대까지 약 100여 년간을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태평성대로 파악하였으며, 그에 따른 이 시기의 문운도 가장 성대하다고 보았다. 바꾸어 말하면 서거정이 자기 시대의 태평성대는 시운(時運)이 성대한 때이며, 시운의 성대함은 바로 문운의 성대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문학이 천지 기운의 성쇠에 따라서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 시대는 시운이 가장 성하기 때문에 자연히 문학도 성대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이런 태평성대에 정치ㆍ경제ㆍ문화ㆍ문학 등을 주도하는 당시 대각문인, 즉 고관대작(高官大爵)의 글이 바로 최고의 문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관찬사업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정치적인 면에서는 사대부 출신의 개국 공신들이 정치 실권을 장악하면서부터 국가체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유교적인 이상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국가의 전반적인 통치규범을 만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경국대전》의 편찬이다. 또 문화적인 면에서는 문치에 힘쓴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시기에 각 방면의 학문이 크게 발전하여 예악문물의 제도정비와 문화 편찬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동문선》의 편찬이다. 정치적인 면에서 제도적 완비를 의미하는 《경국대전》의 편찬사업과 문학적인 면에서 총결산을 의미하는 《동문선》의 편찬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서거정이다. 그는 조선 건국 이래 정치제도를 확립하고 문화적인 정비를 한창 벌이던 국가사업에 발맞추어, 거기에 적극 참여하는 선봉자가 되었다. 그 결과 그가 왕명으로 편찬하여 올린 것이 위에서 본 것처럼 모두 9종으로 수백 권의 분량에 달하였던 것이다.
한편 서거정의 삶과 문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외조부 양촌(陽村) 권근(權近) 일족과 자형 최항(崔恒), 그리고 스승 유방선(柳方善)이다. 이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거정은 외조부 권근(1352~1409)과 같은 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문학과 사상이 권근의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거정은 권근의 일생을 자기 인생의 좌표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권근의 의식세계를 자신의 삶과 문학에 내재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 1387~1445 서거정의 외숙부)와 손자 권람(權擥, 1416~1465 서거정의 외사촌) 등 권근 일족과의 교유를 통하여 훈구관료의 의식세계와 국가관 등을 배웠다. 따라서 권근 일족이 서거정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으로 생각된다.
최항(1409~1474)은 서거정의 넷째 자형이며 서거정보다 11살 연장자이다.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서거정으로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인생의 선배인 최항에게 의지하여 학문과 인격을 연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항은 국가적 관찬사업에 두루 참여하고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였으며 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서거정이 이러한 환로를 그대로 이은 것은 최항의 영향이 컸다. 서거정이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최항이 대제학으로서 문형을 잡고 있었으니, 그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또 1467년 서거정 나이 48세 때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문형을 잡을 때도 최항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모로 도와주었다.
서거정의 시학(詩學)의 스승은 태재(泰齋) 유방선(1388~1443)이다. 유방선이 만년에 원주(原州) 법천사(法泉寺)에 머물고 있던 1439년 전후로 서거정은 한명회ㆍ권람과 함께 유방선을 사사하여 시학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유방선은 시학을 권근에게 배웠으므로, 유방선 또한 권근의 문하에 의하여 형성된 조선 초기의 문예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서거정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최항이나 유방선도 모두 권근으로 귀결된다 하겠다.
한편 서거정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남산 아래에 집 한 채와 도성 근교에 여러 개의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남산의 집에는 정정정(亭亭亭) 또는 정우당(淨友堂)이라 이름한 정자와 동산 그리고 채소밭을 함께 갖추고 있었으며, 도성 근교 별장에도 정자는 물론이거니와 일정한 전장(田莊)을 두고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별장 이름은 임진(臨津)에 있었던 임진촌서(臨津村墅)와 양주(楊州)에 있었던 토산촌서(兎山村墅), 그리고 광주(廣州) 일대에 있었던 광주촌서(廣州村墅)ㆍ광릉촌서(廣陵村墅)ㆍ광진촌서(廣津村墅)ㆍ제부촌서(諸富村墅)ㆍ몽촌별서(夢村別墅) 등이다. 이 별장들은 서거정에게 관직 생활에서 오는 세상일의 번뇌를 녹여 주고 정신적 여유를 찾게 해 주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틈만 나면 이들 별장을 찾아 한가로움을 마음껏 누렸다. 더욱이 이 별장들은 서거정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함께 정신적인 안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풍류를 즐기고 시상(詩想)을 떠올리어 시작(詩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서거정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용마산 용마폭포 :: 아하스페르츠의 단상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