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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청 아카데미 通 靑 Academy |
342회 |
주제: |
노자와 장자 (1) |
발표자: |
이태호(통청아카데미 원장) | ||||
일시: |
2017. 3. 15수) pm 7:00~9:00 |
장소: 대구시립수성도서관 시청각실 |
문의 |
010-3928-2866 | |||||
h.p. |
cafe.daum.net/tongchungd | ||||||||
통청아카데미는 서로 소통하여 사고의 틀을 좋게 바꾸려고 하는 공부모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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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노자
1. 인간 노자
노자(老子)라는 인물은 신비에 쌓여 있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노자에 대한 공식적 기록은 사마천(司馬遷, BC 145?~86) 사기(史記) 속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나온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의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를 담(聃)이라 하였으며, 주(周, 東周를 말함)나라 수장실(守藏室, 도서를 보관하는 곳, 즉 도서관)의 관리(史)였다. 공자가 주나라로 (그를) 찾아가서 예(禮)에 대해서 묻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옛날 사람(유명인들)은 이미 육신과 뼈가 썩어 없어져 버렸고 오직 말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오. 또 군자라는 사람도 때를 잘 만나면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있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대밭을 걸어다니는 것이오. 나는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한 곳에 보관하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물건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덕을 많이 쌓은 군자의 태도도 겉보기에는 어수룩하게 보인다’라고 들었소.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그대는 교만함과 욕심을 버려야 하며, 잘난 체하거나 뽐내지 말아야 하며, 쾌락을 멀리하길 바라오. 그런 것들은 그대에게 무익한 것들이오. 내가 그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오.”
공자는 돌아가서 제자에게 말했다.
“새는 날 수 있고, 고기는 헤엄칠 수 있으며, 짐승은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달리는 놈은 그물을 쳐서 잡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으며, 나는 놈은 활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용(龍)은 잡는 방법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오늘 노자를 뵈었는데 마치 용과 같더라!”
노자는 도(道)와 덕(德)을 닦았는데, 그 학문은 자신을 숨기고 이름 없이 사는 이른바 ‘자은무명(自隱無名)’을 추구한다. (그는) 주나라에 오래 머물렀는데, 주나라가 쇠해지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것을 떠나 관소(關, 하남(河南)⋅섬서(陝西)에 있는 함곡관(函谷關)으로 추정)에 이르렀다. 관문을 지키는 우두머리(關令)인 윤희(尹喜)가 “선생님께서 은둔하려 하시니, 어려우시더라도 저에게 저서를 남겨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노자는 道와 德에 관한 5천여 자의 상⋅하편 저서를 남기고 관소를 떠났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의 행적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노래자(老萊子)도 초나라 사람으로 저서가 15편 있는데 도가(道家)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으며,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노자는 160세까지 살았다고 하고, 혹은 200세까지 살았다고도 한다. 도를 닦아 수양했으니 장수했을 것이다.
공자가 죽은 후 129년(실제는 106년, 착오로 보임) 만에 쓴 사관(史官)의 기록에는 주나라 태사담(太史憺)이 진(秦)의 헌공(獻公)을 뵙고 “진나라는 처음에는 주나라와 합쳐져 하나였는데, 합쳐진 지 500년 만에 갈라지고, 갈라진 지 70년 만에 패왕(覇王)이 될 인물이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담(儋)이 곧 노자이다”라고도 하고, 또 “아니다”라고도 말하니, 세상에는 어느 말이 옳은지를 알지 못한다. 노자는 은둔한 군자이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인데, 위(魏)나라 장군이 되어 단간(段干, 고을 이름)에 봉(封)해졌다. 종의 아들은 (이름이) 주(注), 주의 아들은 궁(宮), 궁의 현손(玄孫)은 가(假)인데, 가는 한(漢)나라 효문제(孝文帝)를 섬겼다. 그리고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膠西王) 앙(昻)의 태부(太傅, 천자를 돕는 직책)가 되어, 그때부터 제(齊)에서 살게 되었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하는 사람은 유학을 배척하고, 유학을 하는 사람은 노자를 배척하였다.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청정(淸靜)으로써 (사람들을) 저절로 바르게 되도록 하였다.
2. 서적 『노자』
노자가 남긴 유일한 저서는 『도덕경』으로 불리기도 하고 『노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함곡관령인 윤희에게 주어진 道와 德에 관한 두 편의 저자는 태사담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태사담이 보았던 노자의 서적이 존재했다고 보는데, 그 서적을 고본(古本)이라고 한다. 그 고본이 초간본(楚刊本) 노자로 추정된다. 초간본은 1993년 8월 중국 호북성(湖北省) 곽점촌(郭店村)의 楚나라 무덤에서 죽간(竹簡)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고본을 가능하게 하는 그 이전의 진본(眞本) 혹은 조본(祖本)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초간본으로 나타난 고본도 진본의 개작(改作)이라고 할 수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고본을 태사담이 개작(改作)하였다고 보고 이것을 1차 개작본인 금본(今本)이라고 한다. 금본은 고본에 없는 내용이 60% 정도 추가되었다. 이 금본이 필사(筆寫)되어 秦의 獻公에게도 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금본을 다시 개작한 2차 개작본이 1973년 12월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발견된 백서본(帛書本)으로 보인다. 백서본이 만들어진 시기까지는 아직 『노자』가 『도덕경』으로 불리지 않았다. 이것은 이때까지 노자가 성인(聖人)으로까지 숭앙받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서본 등의 『노자』가 널리 읽히다가 위나라 천재 사상가로 위진현악(魏晉玄學)을 대표하며 24세로 요절한 왕필(왕필, 226~249)이 18세(243년)에 주석을 단 왕필본이 나타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통행본(通行本)의 원형이 된다. 그리고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하상(河上)에 살았던 은둔한 선비인 하상공(河上公) 혹은 하상장인(河上丈人)의 것으로 전해지는 하상공본[노자하상공장구(老子河上公章句 또는 하상장구(河上章句)]이 있다. 이 서적은 저자가 불분명하고, 제작시기도 동한(東漢), 서한(西漢), 위진(魏晉) 등 여러 설이 있다. 만약에 西漢시기라면 주석서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내용상 신선설(神仙說) 등의 색채가 짙은 점 등으로 보아 왕필본 보다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초기의 도사(道士) 부혁(傅奕, 555~639)이 왕필본과 하상공본 등 몇 가지를 비교하여 만든 부혁본(傅奕本)이 있다. 그리고 당나라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712~ 756)가 개원(開元) 20주년 기념으로 스스로 주석한 개원어주본(開元御註本)이 있다. 이씨(李氏)가 지배한(618~ 907) 당나라 때는 노자의 성이 이씨라고 생각하여 황실과 종친관계로 보아 노자를 매우 신격화하였다. 당대의 비본(碑本, 景龍本), 청대말기 돈황석실에서 발견한 육조시대 필사본 잔권(殘券)과 당대의 필사본 잔권(殘券), 엄준(엄준)의 도덕지귀(道德指歸)(서한 말), 송대 범응원(范應元)의 노자고본집주(老子古本集注) 등이 있는데 이들이 백서본 『노자』와 체제를 달리해서 통용되기 때문에 통행본이라 한다. 통행본부터는 『도덕경』으로 불리며, 81장으로 정리되었고, 앞의 1~37장까지 『道經』, 뒤의 38~81장까지 『德經』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元나라 明나라 淸나라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의 학자들에 의해 간행된 많은 책들이 있는데 이들을 현행본(現行本)이라고 한다. 특히 청대 필원(畢沅)의 노자고이(老子考異, 당의 부혁본에 근거), 주겸지(朱謙之)의 노자교석(老子校釋, 북경, 中華書局, 1973)이 있다. 최근 현행본에는 진고응(陳鼓應)의 노자금주금역급평가(老子今註今譯及評價)도 있는데, 이것은 왕필본을 표본으로 하면서도 백서본, 초간본까지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원문을 교정한 것이다. 그러나 통행본과 현행본에는 큰 차이가 없이 모두 왕필본과 하상공본을 골격으로 하고 있어서 현행 통행본 또는 통용본으로 불리기도 한다. 노자 『도덕경』은 중국에서 1.800종, 일본에도 250종 정도의 해설서가 나왔다. 우리나라도 일본에 못지않을 것이고 세계의 많은 나라 언어로 된 해설서도 나왔다.
Ⅱ. 장자
1. 인간 장자
사마천의 『史記』 「老莊申韓列傳」에 의하면, 장자(莊子)는 이름이 주(周)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며, 몽(蒙, 지금의 河南省 南丘 북쪽)의 칠원(漆園)의 관리자 노릇을 하였다 한다. 양(梁)나라 혜왕(惠王, BC 370~335)과 제(齊)나라 선왕(宣王, BC 342~ 324)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생존 연대는 정확치 않고 BC 370~280, 360~290, 355~ 275 중 하나로 보며, 맹자(맹자, BC 372~289)와 비슷한 연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적 『장자』와 『맹자』에 서로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특이한데, 주자(朱子, BC 1130~1200)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그 이유를 장자의 사상이나 이론이 생존 당시에는 매우 좁은 지역에서만 논의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서적 『장자』의 외편(外篇)이나 잡편(雜編)에서 보이는 것처럼 유가(儒家)에 대한 투쟁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았을 것으로 주자는 보았다.
장자는 평생 벼슬하지 않고 자연에 숨어 가난하게 살았다지만, 혜시(惠施, BC 370?~310?) 같은 재상급의 인물을 친구로 사귀고 있었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을 본다면 그가 전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였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가 노자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는 하지만 장자의 학설이 더욱 믿음직하고 체계적인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학문상으로는 도가를 흔히 노장학(老莊學)이라 부르지만 전목(錢穆, 1895~1990)처럼 노자보다 장자를 더 중요시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당(唐) 현종(玄宗)은 서기 759년에 장자를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 부르고, 서적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 부르도록 명령을 내렸다. 남화(南華)란 말은 장자가 조주(曺州, 지금의 山東 曺縣)의 남화산(南華山)에 숨은 일이 있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2. 서적 『장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와 『여씨춘추(呂氏春秋)』 「필기(必己)편」 고유(高誘)의 주(注)에서는 『장자』 52편이라 하였으나 지금 우리에게는 33편의 『장자』가 전해지고 있다. 당(唐) 초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經典釋文)』 서록(序錄)에는 『장자』의 주해서(註解書)를 7개 들고 있다. 그 중 2개(『사마표주(司馬彪注)』와 『맹씨주(孟氏注)』)가 52편으로 되어 있다. 7개 중 지금은 『곽상주(郭象注)』본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52편에는 지금의 『장자』에는 보이지 않는 글들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경전석문』 서록에서 지적하듯이 이것들은 극히 조잡한 내용의 것들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곽상주본은 내편(內篇, 7편), 외편(外篇, 15편), 잡편(雜篇, 11편)으로 분류된다. 이들 중 내편만이 순수한 장자의 사상을 기록한 것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난 부분이라는 데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외편과 잡편은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장자의 사상을 그의 제자들이 다시 부연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청대(淸代) 초(初)의 왕부지(王夫之)는 『장자고(莊子故)』에서 “외편과 잡편은 모두 내편 7편의 뜻을 밝히기 위한 글이다”고 하였다.
▣ 『장자』의 목차
◾ 내편(7편)
1. 어슬렁어슬렁 노님 [소요유(逍遙遊)]
2. 모든 사물은 한결같음 [제물론(齊物論)]
3. 삶을 길러주는 주인 [양생주(養生主)]
4. 사람들 세상 [인간세(人間世)]
5. 덕이 속에 차 있는 증험 [덕충부(德充符)]
6. 위대한 참스승 [대종사(大宗師)]
7. 자연에 따르는 [응제왕(應帝王)]
◾ 외편(15편)
1.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어 있는 사람 [변무(駢拇)]
2. 말 발굽 [마제(馬蹄)]
3. 남의 상자를 열고 도둑질함 [거협(胠篋)]
4. 있는 그대로 버려둠 [재유(在宥)]
5. 하늘과 땅 [천지(天地)]
6. 하늘의 도 [천도(天道)]
7. 하늘의 운행 [천운(天運)]
8. 뜻을 굳게 지님 [각의(刻意)]
9. 본성을 닦음 [선성(繕性)]
10. 가을 물 [추수(秋水)]
11. 지극한 즐거움 [지락(至樂)]
12. 삶의 진실에 통달함 [달생(達生)]
13. 산 속의 나무 [산목(山木)]
14. 문후의 스승 전자방 [전자방(田子方)]
15. 지가 북쪽 방에 노님 [지북유(知北遊)]
◾ 잡편(11편)
1. 노자의 제자 [경상초(庚桑楚)]
2. 세상으로부터 숨어사는 [서무귀(徐無鬼)]
3. 임금을 만나고자 하는 [칙양(則陽)]
4. 우리 밖의 일과 물건 [외물(外物)]
5.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 [우언(寓言)]
6. 임금자리를 물려줌 [양왕(讓王)]
7. 강도의 괴수 [도척(盜跖)]
8. 칼싸움 말 것을 설복함 [설검(說劍)]
9. 고기잡이 [어부(漁夫)]
10. 도가의 계승자 [열어구(列禦寇)]
11. 천하의 사상가들 [천하(天下)]
▣ 『장자』의 주요 해설서들
▪ 당(唐) 성현영(成玄英)의 『남화진경주소(南華眞經注蔬)』
◾ 송(宋) 임희일(林希逸)의 『장자구의(莊子口義)』
▪ 명(明) 초횡(焦竑)의 『장자익(莊子翼)』
▪ 청(淸) 임운명(林雲銘)의 『장자인(莊子因)』
▪ 청(淸) 곽경번(郭慶藩)의 『장자집석(莊子集釋)』
▪ 청(淸) 마서륜(馬敍倫)의 『장자의증(莊子義證)』
▪ 청(淸) 왕선겸(王先謙)의 『장자집해(莊子集解)』
▪ 민국(民國) 왕숙민(王叔岷)의 『장자교전(莊子校詮)』
▪ 민국(民國) 전목(전목)의 『장자찬전(莊子纂箋)』
Ⅲ 노자와 장자의 비교
老子가 老聃인지, 老萊子인지, 太史憺인지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노자가 공자보다 앞선 사람인지 뒤에 사람인지도 불문명하다. 거기에 비해 『장자』를 지은 사람이 장자라는 한 인물이 중심인 것은 분명하고 공자 사후 맹자와 비슷한 시기라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노자와 장자가 둘 다 둘 다 소박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노자는 주나라 수장실(守藏室, 오늘날의 도서관)에 근무했고 장자는 칠원(漆園, 옻나무 밭)의 관리자 일을 했다.
노자는 5천 자 정도의 서적을 남겼고, 장자는 10만 자(지금 남아있는 것은 6만 5천 자) 정도의 서적을 남겼다. 노자는 제자를 두지 않았고 장자는 제자를 육성했다. 노자는 학자나 세도가들과 적극적인 대화를 하지 않았고, 장자는 대화를 전개하였다. 노자의 서적은 잠언형식의 짧은 문구들로 이루어졌고, 장자는 우화를 포함한 긴 서술문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보아 노자보다 장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노자와 장자를 합쳐서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 불리면서 그들의 사상은 도가(道家)로 분류된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노자와 장자를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서 다루었다. 이것은 노자(老子), 장자(莊子),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를 같은 계열로 보았다는 의미가 있다. 다음 강의[노자와 장자(2)]에서 이것과 관련된 논의와 함께 노자와 장자의 사상적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 다음 주 강의 예고 >
통청 아카데미 通 靑 Academy |
343회 |
주제: |
반야심경 (1) |
발표자: |
조현춘(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
일시: |
2017. 3 22 (수) pm 7:00~9:00 |
장소: 대구시립수성도서관 제1강좌실 |
문의 |
010-3928-2866 | |||||
h.p. |
cafe.daum.net/tongchungd |
343주(2017.3.22) : 반야심경(1), 조현춘(경북대학교 명예교수) 344주(2017.3.29) : 니체의 주인도덕, 이경희(대구가톨릭대학교 강의교수) 345주(2017.4.5) : 칸트의 순수이성비판(眞), 권욱혜(대구가톨릭대학교 강의교수) 346주(2017.4.12) : 칸트의 실천이성비판(善), 권욱혜(대구가톨릭대학교 강의교수) 347주(2017.4.19) : 칸트의 판단력비판(美), 권욱혜(대구가톨릭대학교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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