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뫼에 있었던 코쿰스 조선소 전경. 오른쪽에 코쿰스 크레인이 있다.
요즘은 어디를 가자하면 랜드마크부터 살펴보게 된다. 원래 랜드마크(landmark)란 경계표(境界標)라고도 하며 탐험가나 여행자 등이 특정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에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곳을 대표하는 상징성으로 그 뜻을 대신한다. 이를테면 도시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특이성(特異性) 있는 시설이나 건물을 말하는 것으로 물리적·가시적 특징의 시설물뿐만 아니라 개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추상적인 공간 등도 이에 포함시키고 있다.
워낙 복잡한 도심이라 그러한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도시의 각 부분을 상호 관련시키면서 각자의 정신적인 이미지를 환경으로부터 만들어낸다. 각각의 명소로서 헤아릴 수없이 많지만 서울타워(남산타워),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인도의 타지마할, 하버브리지(Harbour Bridge), 오페라하우스, 이스터섬의 모아이, 콜롯세움, 파리의 에펠, 런던의 시계탑, 킹콩이 좋아하는 뉴욕의 빌딩이나 런던의 다리, 자유의 여신상이나, 대만의 101 타워,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등등이 각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아닐까 싶다.
즉, 도시의 물리적인 현실로부터 사람이 추출해 낸 그림이 바로 도시의 이미지인 것이다. 비단 큰 도시뿐 아니라 작은 소도시라해도 저마다의 특성이나 이미지는 있기 마련이며 이렇다 할 것이 없다 싶은 동네는 랜드마크 구현을 위해 앞장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사는 곳 대전은 대덕 연구단지가 그 상징성으로서 이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여러분들은 스웨덴에 말뫼(Malmoe)라는 곳을 아는가. 생소한 이곳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단순히 크레인 때문이다. 그곳은 2002년도까지는 아주 큰 ‘코쿰스 크레인(Kockum Crane)이 있었다.
코쿰스 크레인은 1973년경 건조된 1,500톤급 갠트리 크레인(Gantry Crane)으로 규모는 높이 128m, 폭 165m, 자체 중량 7,560톤으로 말뫼에서는 이 크레인을 이용해 약 70척 이상의 선박 건조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2002년도까지는 말뫼는 배를 건조하는 명명 자자한 도시로 곳의 랜드마크는 바로 이 코쿰스 크레인이었다. 크레인은 단순히 무거운 중량물을 들어 올리는 역할로서뿐 아니라 그들의 밥줄로서 도시의 번영을 대변하였던 영예로운 산물이었던 것이다.
내가 말뫼를 알게 된 것은 그 크레인과 시민의 모습이 비추어진 TV뉴스영상 때문이다. 크레인은 해체되고 있었다. 그들의 버팀목으로 생명 줄로 굳건히 지키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항구 반대편에 선 시민들은 이를 지켜보며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 국영방송은 장송곡과 함께 ‘말뫼가 울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도했다. 나도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도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해체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코쿰스 크레인을 1달러에 구매해 그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이후 현대중공업은 코쿰스 크레인을 한 달에 걸쳐 해체해 울산으로 옮겼다. 코쿰스 크레인은 울산에 이동한 뒤 개조되어 1,600톤급으로 성능이 향상되었다. 현대중공업이 코쿰스 크레인의 해체와 운반, 개조 등에 사용한 비용은 220억 원 정도로 알려졌는데 개조 후 2003년부터 실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20세기 초 스웨덴은 세계 조선업계의 선두였으며 그 중심에 있던 코쿰스의 파산과 크레인의 이동은 세계 조선 산업의 중심이 바뀌었다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이 크레인을 울산으로 옮길 때 말뫼 시민들의 애처로운 반응 때문 이를 ‘말뫼의 눈물’이라 일컬으며 이후 말뫼의 눈물은 조선업계의 몰락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사실 나는 그 보도를 접할 때만 해도 꽤 의기양양했다. 80년대 초 나는 울산의 현대중공업에 있었다. 당시 배를 만드는 단일 공장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공장을 만든 사람이 바로 정회장,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왕회장이다. 배는 바닷가 가까이 큰 터에 무거운 것을 들 기중기 용접기술자 설계기술자 일조량 등등이 모두 구비되어야 원가가 싸게 먹히고 타산이 맞아 떨어진다. 아무리 전 세계를 뒤져도 이 요건을 다 갖춘 장소는 대한민국 그것도 남해나 울산 밖에는 없다.
배에 방수나 색칠하는 도장공사는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 일조량은 말도 못하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적도 근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문제다. 기상조건만 따져 봐도 한국이 안성맞춤이다. 정문안에서 우리 회사 까지 가는 버스가 따로 있었는데 신출인 나는 지름길로 출근하기 위해 배 립 도크를 4개 건너 다녔다. 배를 다 만들면 물을 채우는 도크는 10층 높이로 매일 80층 높이를 오르락내리락 한 셈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 배 건조 실력을 알아줄 리 없었다. 당시 크레인 이름은 골리앗이란 크레인인데 쉬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선박엔진을 만드는 곳에 근무했는데 더더욱 알아 줄 리 없었다. 좋은 생산기계를 놀릴 수는 없어서 산업기계 제작을 부업삼아 하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드디어 2천 년대 초 빛을 발하는 때가 찾아 온 것이다.
그 무렵 현대중공업은 세계 최대의 선박 건조능력을 보유하며 매년 70여척의 선박을 만들어 선주들에게 인도하였다. 2006년에는 세계 조선 역사상 월간 최대 수주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초대형 유조선 14척을 비롯해 LPG선과 LNG선 등 모두 24척(26억 미국달러 상당)을 수주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세계 조선 역사상 최단 기간인 30년 만인 지난 2002년 1만 척 건조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데 이어 2006년 영국 클락슨이 발표한 조선업계 수주잔량 순위에서 1144만 CGT(보정톤수)을 기록해 세계 수위에 올랐었다.
그러니까 그 무렵 스웨덴 말뫼 조선소에서 단돈 1달러에 구입한 1500t급 골리앗 크레인은 혁혁한 공을 세우며 현대중공업의 명물로 새로이 등장한 것이다. 말뫼의 눈물은 울산현대에서 환희를 맞은 셈이다. 그것으로 말뫼의 눈물은 끝이 난 것일까. 세상은 변한다. 변하는 세상이치처럼 문명의 주인도 바뀐다. 역사를 훑어보지만 영속한 문명대국은 없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승패를 겨루는 인류문명사다. 물론 여러 사유가 있겠지만 나는 의식의 나태함 게으름이 제일 크게 자리 한다고 믿는다.
번영의 상징적 표현인 팍스로마나를 말하는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은전 한 닢 부터서 서서히 로마는 시들었으며 콜럼버스가 건넨 신대륙의 선물로 인플레가 촉발되어 무적함대는 쉬이 잠들고 말았다. 당태종이나 신라의 경덕 왕은 또 아니 그런가. 번영은 자칫해선 깊은 음영을 드리운다. 한때는 조선대국을 말하는 우리나라였는데 2016년 여름부터 울산과 군산, 거제에서 수만 명의 실업자들이 쏟아졌다. 더 두려운 것은 구조조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올 한해 조선사들은 몸집 줄이기에 매진했고, 노동조합은 구조조정을 반대하며 사측과 대립했다. 영국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올해 1~11월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발주규모가 70% 이상 줄었다. 조직개편, 감축. 부서 통폐합.인력ㆍ운영ㆍ복지 에 들어가는 비용 절감. 분사, 희망퇴직. 비주력 자산 매각. 등이 올 한 해 무수히 나돈 말들이다. 그런데도 앞이 안 보인다.
말뫼의 눈물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40년 넘게 배를 만들어온 경남 창원시의 한 조선소 터에 있던 골리앗 크레인이 외국에 헐값에 매각됐다. 만들 당시 270억 원을 들여 크레인을 만들었지만 국내에서는 크레인을 사겠다는 업체가 없어 30억 원대까지 떨어지더니만 결국 루마니아의 한 조선소가 사게 됐다. 철거업체는 올해 말까지 크레인을 전부 해체한 후 바지선에 실어 루마니아에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말뫼의 눈물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말뫼는 눈물로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말뫼는 조선소가 문을 닫자 도시 인구의 10%인 2만 7000명이 거리로 내몰리는 수난을 겪었다. 이때 정부가 펼친 정책이 중요했다. 스웨덴 정부는 우선 말뫼와 덴마크 코펜하겐을 바닷길로 잇는 7.8㎞의 다리를 건설했다. 대규모 공공투자로 실업자를 흡수해 해고 노동자들의 삶부터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업 연명을 위해 썼던 재원을 과감하게 신재생에너지와 정보기술(IT), 바이오 등 신산업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현재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태양열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다.
이 덕에 말뫼는 유럽을 대표하는 생태 도시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산업의 몰락을 한 도시의 문제로, 또는 한 산업의 문제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차피 경제가 고도화될수록 제조업 쇠퇴는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의학의 발전으로 고령화의 흐름도 거스를 수 없다. 말뫼를 상징했던 코쿰스 조선소의 대형 크레인 자리에는 ‘터닝 토르소’라는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고 한다. 눈물로 끝이 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소생할지, 참 난감한 현실이지만 정부나 시민이 모두 힘을 합쳐 슬기롭게 해쳐나가야 할 것이다. 문득 어느 노교수가 쓴 칼럼이 내 귀에 쏙 들어온다.
“우리가 구조조정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평소 복지국가를 기피하고 사회안전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스웨덴, 덴마크 같은 복지국가는 사회안전망이 있어 구조조정에 저항이 적다.”
어느 시대에든 전성기와 황금기는 있다. 비단 일국의 나라 뿐 아니라 어느 사회 그 누구에게도 황금기는 있다. 문물 교류가 활발하고 번창한 문화가 날로 진보하여 꿈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그러한 황금기. 나에게도 화창한 봄날 같은 황금기가 있었듯 이제는 또 다가올 다른 시절도 맞을 채비를 해야 한다. 나도 몇 년 안이면 돈벌이가 끝이 난다. 구조조정도 하고 나름의 안전망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질로서는 충족하지 못할 것이지만 또 다른 행복을 구현할 내 가슴에 우뚝 설 ‘터닝 토르소’...어쩌면 홀가분해진 지금 이 나이부터서 나의 랜드마크를 비로소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늙으막 말뫼의 눈물이 내게 주는 교훈은 실로 크다.
(조성원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