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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빛고을英陽향토사 답사 [ 1 ]
1. 일시 : 2021. 9. 3.13:00 ~ 18:00
2.답사지역 및 대상
* 영양읍 동부리 여남강당.
* 영양읍 서부리 사정.
* 영양읍 하원리 한양조씨사월종택 및 숙운정.
* 영양읍 대천리 오극성 고택 및 문월당, 효자각, 송원정,삼구정.
* 영양읍 상원리 한양조씨사고종택 및 주강정.
* 일월면 곡강리 망운정.
3. 참가자 : 박원양, 이영우, 조귀현, 정영길.
4. 답사결과
[동부리 여남강당과 도항재]
1200여년 전 신라 땅에 정착한 영양 남씨 시조 南敏 기리는 곳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여남서원’이 훼철된 이후 남민의 후손들은 1920년 시조를 기리기 위해 여남강당을 세웠다. 여남강당은 1985년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 76호로 지정됐다. |
영양남씨들의 재실인 도항재. 최초 건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1968년에 중수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각지에서 온 후손들이 이곳에 모인다. |
1천200여년 전, 폭풍 속을 표류하던 이국 사람이 이 땅에 들어왔다. 그가 이 땅에 정착하기를 원하자 왕은 그
에게 성과 이름을 주고 영양 땅을 식읍으로 내렸다. 그의 이름은 남민(南敏), 그로부터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시작되었다. 하나의 뿌리로부터 뻗어나간 가지는 튼튼하고 장대했으며 시대와 상황이 요청하는 의를 행함에
결단력이 있었다. 영양의 중심인 영양읍에 남민의 묘가 있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여남강당(汝南講堂)이 있고,
영양남씨들의 재실인 도항재(道項齋)가 있으며 지금도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천년이 더 지나도록 그를 기리
는 후손들의 마음은 끊이지 않았다.
#1. 영양남씨 영의공 남민
남민은 본래 당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다. 신라 경덕왕 14년인 755년,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가던 중 태풍은 만난 그는 현재의 영덕 축산도(丑山島)에 표착하게 된다.
그는 당나라로 돌아가는 대신 정착하여 살기를 희망하였고, 경덕왕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 당나라 현종(玄宗)
에게 알려 허락을 받았다. 경덕왕은 그가 여남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 성을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의공(英毅公) 시호와 함께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영의공의 아들
김석중(金錫中)도 아버지 사신일행과 동행했다가 함께 정착했다. 이름은 남익(南翼)이며 검교 태자첨사
(太子詹事)로 영양군(英陽君)에 봉해졌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남민의 후손 3형제가 영양, 의령, 고성 등 3개의 본관으로 갈라진다.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영양남씨는 그렇게 가지를 뻗어나갔다. 조선시대에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부마 4명,
일등공신 4명 등이며 대과 급제가 183명, 무과급제는 문과급제의 배가 되었다고 한다. 소론의 거두 남구만,
대사성 남현로, 연산군에게 선정을 일깨웠던 남세주, 학자 남사고, 여류 독립운동가 남자현 등이 모두 남민
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생몰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묘는 ‘일월산 부용봉(芙蓉奉) 아래 도항동
(道項洞)’에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 선조 초에 그의 묘는 실전되었다. 정확한 연유는 전해지지 않으나 임진
왜란을 겪으면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이후 숙종 원년인 1675년에 지금 군청의 북쪽 영산
(英山) 아래 산기슭에 단을 쌓고 단사(壇祠)를 지었다고 한다. 보다 더 잘 알려진 사실로는 숙종 3년인
1677년에 시조를 향사하기 위해 영산 아래에 향현사(鄕賢祠)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민은 원래 당나라 봉양부 여남 사람
755년 日 사신 다녀가다 영덕에 표착
후손들 1677년 향현사 건립 시조 향사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1920년 ‘여남강당’ 지어 선조 모셔
‘도항재’는 재실…1968년 중수 기록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
집안 행사때 전국의 후손 모이는 곳
향현사에서의 향사는 10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리고 순조 3년인 1830년에 유림의 공의를 거쳐
서원으로 승격되어 ‘여남서원(汝南書院)’이라 했다. 이는 당시 각지에서 서원을 설립하여 선현을 제향
하고 강론처 및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던 풍속에 자극된 것으로 영양남씨 자손들과 영양현의 바람
으로 세워진 건물이었다. 여남서원은 강당을 중간에 배치하고 사당은 뒤에 두었으며, 전면에는 2층의
문루를 두었다고 한다. 서원은 강학과 선비들의 모임터로 널리 이용되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여남서원이 훼철되던 해 ‘사판(祠版)을 도항동(도뭇골) 재사의 후묘(後廟)로 옮
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재사의 후묘는 보차재(報車齋) 또는 추모재(追慕齋)라 하였고, 당은 도목당
(道睦堂)’이라 했다고 한다. 영양의 지명 유래에 ‘도항동에 영양남씨들이 도항재라는 재실을 지어 선조
를 모셨다’는 내용이 있다. 폭풍 속에 이 땅에 들어와 이 땅의 사람으로 뿌리를 내린 이래 그를 기리는
후손들의 노력은 거의 끊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남강당 비각 내부 비석에는 ‘당안렴사증시영의남공민유허’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여남강당 현판. |
도항재 현판. |
여남강당 좌측 뒤쪽에 위치한 비각. 정면 처마도리에 ‘여남(汝南)’이라고 힘차게 쓴 커다란 글씨가 눈길을 끈다. |
#2. 여남강당
남민의 후손들은 1920년에 다시 시조를 기리는 건물을 지었다. 여남강당이다. 영양군청의 맞은편, 고샅길 하나
건너 지척인 자리다. 여남강당이 자리한 마을은 여남 혹은 여남몰이라 불린다.
여남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한식기와를 올린 토석담장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에
정문인 사주문이 서있다. 좌측에는 주사건물이 있는데 담장으로 구획하고 협문을 달아 출입하게 했다. 강당
건물은 너른 마당을 앞에 두고 남쪽을 향해 서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바닥을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했
고 주춧돌은 자연석이며 기둥은 모두 방형이다. 건물의 가운데에는 2칸 마루방을 두고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구성했다. 전면에는 쪽마루를 놓았다. 마루방 정면에는 네 짝 사분합 들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했고,
배면에는 아래에 머름을 꾸미고 두 짝 여닫이 판문을 달고 판벽으로 마감했다. 좌우 온돌방 정면에는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의 뒤쪽 칸에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온돌방의 아궁이는 각 방의 전면 기단에 두었고
굴뚝은 배면에 세웠는데 붉은 벽돌을 방형으로 쌓아 처마선보다 높게 했다. 마루방의 좌측 처마도리에
‘여남강당’ 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의 좌측 뒤쪽에는 비각이 자리한다. 비각은 원형주초에 원기둥을 세운 사방 한 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이다. 사방에 홍살문을 둘렀고 기둥 상부는 단청이 되어 있다. 맞배지붕 건물로 홍살문이 둘러
있고 기둥 상부에 단청을 하였다.
비각 안의 비석에는 ‘당안렴사증시영의남공민유허(唐按廉使贈諡英毅南公敏遺墟)’라고 새겨져 있다. 정면
처마도리에 ‘여남(汝南)’ 편액이 걸려 있는데 힘차게 쓴 커다란 글씨가 인상적이다. 강당의 우측 뒤쪽에는
화장실로 보이는 두 칸 건물이 서있다. 여남강당은 1985년에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 76호로 지정되어 보존
되고 있다. 곁의 주사 건물에도 현재 사람이 살고 있다.
현재 남민의 묘는 영양읍 동부리의 도뭇골(도항동)에 자리하고 있다. 1958년 후손들이 옛 기록에 따라 선조
남민의 묘라고 전해오는 곳을 발굴해 보았는데 그곳에서 신라시대의 석관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묘역을 조성하고 단사는 폐하였다. 매년 음력 10월10일마다 향사하고 있으며 지금도
시제 때면 전국 각지에서 후손들이 모여든다. 그날 영양읍의 숙소와 식당은 남씨 후손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3. 도항재
여남몰과 바로 이웃한 북동쪽에 재궁몰이라는 마을이 있다. 영양남씨들의 재실인 도항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항재의 최초 건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1968년에 중수했다는 기록만 있다.
도항재는 정면의 대문채에 좌우측의 동재와 서재가 이어진 ‘ㄷ’자형 건물과 ‘ㅡ’자형의 재실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대문채 옆으로 낸 한식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전체를 감싸고 있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이며 좌우는 온돌방이다. 대청방의
정면에는 네 짝 여닫이 세살문을 달았고 배면에는 두 짝 판문을 달았다. 좌우 온돌방에는 정면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의 뒤쪽 칸에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기단은 시멘트모르타르로 계단 형식으로 높게
축조했다. 주춧돌은 자연석을 썼고 전면에는 두리기둥,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처마도리에는 ‘현덕사(顯德祠)’와 ‘예인재(禮仁齋)’ 2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대문간은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가운데 ‘도항재’ 현판을 단 솟을대문이 서있다. 대문 좌측의 1칸은 서재와
연결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2칸의 방 2개로 구성되어 있다. 방의 배면에는 4칸 모두에 미닫이 창문을 달아
놓았다. 대문 오른쪽은 2칸 규모의 방이다. 우측 방 뒤로 동재가 연결되는데 2칸의 부엌과 1칸의 창고로 구
성되어 있다. 부엌 배면에는 근래에 증축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붙어 있다. 동재와 서재 모두 기단을
자연석과 시멘트모르타르로 축조 마감했으며, 주초는 자연석, 기둥은 모두 사각이다.
도항재는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 각지에서 온 후손들이 모이는 곳이다. 집안의 회의가 열리기도 하고 연회
를 베풀기도 한다. 남씨의 본관은 문헌에 57본에서 60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선조 때 편찬된 일종의
백과전서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는 남씨를 조선의 20대 명벌(名閥)로 전하고 있다. 지금도 전국에
산거(散居)한 남씨들은 역사적인 견고한 뿌리를 인식하며 대동단결(大同團結)에 노력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입력 2019-08-22 발행일 2019-08-22 제13면ㅣ수정 2021-06-21 17:53
▨참고= 영양군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양읍 서부리 사정]
영양여행/거부이자 육영.자선사업가인 권영성 선생의 사정. | 정자. 누각. 사정 思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457호. 영양군 영양읍 현 2리 소재. 대은 (大隱) 권 영성 (權 永成)이 1934년 구월 팔일에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전통적인 누정형태인데, 계단이나 담장에는 붉은 벽돌, 인조석 씻어내기, 타일 등 근대적인 재료와 수법을 사용한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權 永成(1881~1959). 권 석업(權 錫業)의 셋째 아들로 1881년(高宗 18)에 영양읍 서부동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그는 생계를 개척할 직업에 농.공.상업을 가리지 않고 하다가 상업이 번창하여 일용잡화. 포목상으로 날로 번창하고 재산이 불어났다. 흉년에는 각 면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하여 빈민구제금을 내려보내고, 의성군에까지 구제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영양의 학교 뿐 아니라 대구여고, 대구의학전문학교, 김천고보 등의 설립기부금을 보낸, 폭 넒은 자선 육영사회사업에 의연히 희사한 덕행에 감사한 민중이, 군내 각 면에 '권영성자선기념비'를 세워 선생의 은덕을 기렸다. 한문서책을 수집하여 말년에 영양고등학교에 기증하였으며 후에 영양군립도서관에서 보관 중이다. 1959년 영양 사정에서 별세하니 영양사회장으로 영결하였다. 영양군지에 사회사업과 자선사업을 한 건수의 조목이 기재되어 있다. *안동권씨 자료실 참조. |
[영양읍 대천리 오극성고택吳克成古宅]
[ 개요 ]
명 칭 : 오극성고택(吳克成古宅)
소 재 지 : 영양읍 대천리 595
건 축 주 : 오극성(吳克成)
중건시기 : 1760년경 중건
소 유 자 : 오창홍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
[건축 이야기]
오극성 고택은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책록된 문월당 오극성이 낙향하여 건립한 가옥이다. 현손인 오학지(吳學智)가 1760년경에 개수한 이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현재는 2006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오극성은 자는 성보, 호는 문월당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왜놈 도적에게 보복하리라[報倭寇]”는 세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어두고 늘 바라보았다. 1594년(선조27)에 병과에 급제한 뒤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후에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600년(선조33)에 수산樹山의 옥선대 아래로 낙향하여 문월당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이외에 자세한 행적은 관련인물 편에 기술되어 있다.
[건축 특징]
오극성 고택은 1760년경에 개수한 이후로 문화재관리를 위해 최근에 다시 보수한 고택이다. 그리하여 빛바랜 고색의 모습은 덜하나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넉넉한 공간 배치가 돋보인다.
[건축 구성]
오극성 고택은 정침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로 이루어진 사랑공간이 있고, 우측에는 온돌방 1칸과 부엌, 고방을 두었는데, 좌측의 사랑마루와 우측의 고방은 좌,우로 1칸씩 돌출되어 양 날개집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건너방의 전면으로는 각각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좌,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고택에서 남향으로 약 백보 정도를 옮기면 문월당이 중건되어 있다.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함양 오씨의 시조 오광휘(吳光輝)는 고려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복야를 지냈고, 명종 조에 명주에 출몰한 외적을 격퇴한 공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推忠靖亂匡國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보성 오씨에서 본적을 나누어 본관을 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오극성은 함양군 오현필(吳賢弼)을 상조(上祖)로 한다. 16세를 지나 오중원(吳仲元)이 있으니 벼슬이 태재(太宰)였다. 오중원이 관찰사 오엄(吳儼)을 낳았다. 뒤에 오강(吳江)은 직산현감이며, 오덕산(吳德山)은 통례원 인의이며 오필(吳滭)은 중부장이며 오민수(吳敏壽)는 참봉이다.
오민수는 세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오흡(吳潝)은 좌랑이며 오익(吳瀷)은 통정이며 오연(吳演)은 사과이다. 한 딸은 현감 이대규(李大圭)에게 갔다. 오흡의 세 아들은 오이건(吳以建), 오이원(吳以遠), 오이달(吳以達)이며, 세 딸은 조유정(趙惟精), 정종주(鄭宗周), 구세해(具世楷)이다. 익의 세 아들은 오이진(吳以晉), 오이정(吳以鼎), 오이승(吳以升)이며, 두 딸은 신석호(辛奭昊), 남빈(南?)이다. 오연의 두 아들은 오이흥(吳以興), 오이극(吳以極)이다.
오극성의 아우 오윤성(吳允成, 1563-1627)은 자가 성립(誠立)이다. 1594년(선조27) 갑오 별시 무과에 오극성과 함께 급제하였다. 임란 때 통제사 이순신 막하에서 거제도 앞 바다의 왜적을 대파하여 큰 공을 세웠고, 벼슬은 5품직인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이다. 세상 사람들의 공의 형제무훈(兄弟武勳)을 난형난제라 칭송하였다.
오극성의 맏아들인 오흡(吳潝,1576~1641)은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이다. 1576년(선조9)에 영양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성품이 굳건하고 재략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이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광해군조에 이이첨이 모후를 유폐한 데 분개하여 여러 선비와 더불어 그를 참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638년(인조16)에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향리인 대천리 반월산 아래에 내려와 초옥을 짓고 은거하였다. 1639년(인조17)에 그의 절행을 가상히 여겨 승훈랑 호조좌랑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용계문집』2권1책이 있다.
이외에 문월당 오극성의 11대손인 오승봉(吳承鳳, 1888~1954)은 자는 응상(應祥), 호는 송원(松源), 진암(進庵)이다. 영양읍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척암 김도화(金道和)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만년에 송원정을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9권4책의 필사본으로 된 『송원유고』가 영양읍 대천리 송원정사에 소장되어 있고, 『진암만록』1책이 편간되었다.
[관련유물]
- 『문월선생문집』
문집은 2권(건 곤) 1책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체제는 다음과 같다. 첫머리는 류치명과 이돈우가 쓴 서문이 장식하고 있다. 권1은 6편의 시와 1편의 상소, 서간문 및 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2는 임진일기(上), 권3에는 임진일기 하편과 <黃間榜諭文>이 실려 있으며 권4는 부록으로 만사, 묘표 등의 행장류와 발문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선무원종훈록 전지」와 「장악원계첩」도 별첨되어 있다.
[관련인물]
- 오극성(吳克成, 1559~1617)
오극성은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아버지는 오민수(吳敏壽)이고, 어머니는 무안박씨 참봉 박붕(朴鵬)의 딸이다. 1559년(명종14) 정월 아무날에 영산 대천리 집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자질을 지녀서 어버이를 모시기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남다른 기질을 가져서 남들과 함께 숙이거나 우러르지 않았다. 글을 읽는 여가에 활쏘기를 함께 익혔으니 그 뜻은 장차 아울러 쓰려는 것이었다.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쳐들어와서 여러 군이 함락되니 걱정하고 분하여 시를 지었다. “나라의 일을 어찌 말하랴. 외로운 성에는 이미 도움이 끊어졌네. 남쪽 고을에는 의로운 선비가 없구나. 누구와 더불어 충성스러운 귀신이 될까.(國事那堪言 孤城已絶援 南州無義士 誰與作忠魂)” 마침내 여러 관료들에게 글을 올려 지키고 막을 방책을 갖추어 진술하였다. 뒤에 호남의 장사들이 절개를 지켜 죽었다는 것을 듣고 반드시 복수하려고 눈물 흘린 감개가 여러 번 시에 나타났다.
갑오년(1594년)에 오랑캐가 다시 쳐들어오자 아우 오윤성과 함께 권무과에 오르니 주상께서 비로소 그 모습을 알고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하였다. 1595년(선조28)에 도총부 도사 겸 비변랑에 옮겼다. 공은 글을 짓는 데에 능했는데 비변사에서 아뢰기 어려운 글들은 공이 지은 글에서 많이 나왔다. 또 명령을 받들어 남으로 내려가서 상소를 올려 아뢰니 임금께서 가납하였다.
1598년(선조31)에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왔다. 이때 관찰사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명나라 장수를 따라 사천으로 들어가는데 공이 가서 종군했다. 겨울에 아우와 함께 이통제사의 막하에 나아가 수군을 단속하여 거느리고 도적을 추격하여 남해 바다에 이르러 크게 깨뜨리고 삼등공신에 기록되었다.
1600년(선조33)에 훈련판관에 제수되고, 1601년(선조34)에 봉상시정에 제수되었다. 인사를 담당하는 한 낭관이 있었는데 오극성이 타는 말을 좋아하여 저자에서 흥정하는 것처럼 사고자 하였다. 오극성은 마침내 세상에 뜻을 버리고 옥선대(玉仙臺) 아래에 집을 지었다. 그 집에 문월당이라는 편액을 달고, 옛 사람을 마음에 품고 날마다 시골의 늙은이와 들판의 벗들과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1617년(광해군9) 11월에 돌아가시니 수가 59세였다. 이듬해 3월에 청기 관령 부감원에 장사하였다. 부인인 숙인 평해황씨(平海黃氏)는 교위 황승백(黃勝白)의 딸로, 맑고 현철하여 부인의 행덕이 있었다. 오극성보다 12년 뒤에 돌아가시어 오극성 묘 왼쪽에 붙여 장사하였다.
[마을연혁 ; 영양 > 영양청기권 > 영양읍 대천리]
- 영양읍은 서북쪽으로 일월산이 뻗어 내려와서 일월면을 읍의 경계로 접해 있으며, 다시 청기면 금성산을 사이하여 팔수곡 큰재를 분기점으로 읍내 서부리와 연접해 있다. 영양읍의 동과 서를 가르는 반변천은 일월면 곡강리에서 상원리를 돌아 대천 2리 입구에서 동천(東川)과 합류하고 감천리를 지나 입암면으로 흘러 낙동강의 동쪽 원류를 이룬다. 1676년에 이르러 현재의 군청 자리에 동헌(東軒)이 들어서게 되면서 동부리와 서부리가 영양군의 중심을 이루었다.
대천리(大川里)는 흔히 한내[大川,旱川]라고 부른다. 이는 큰 냇물이란 뜻으로, 마을 앞에 큰 내가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조선 인조조에 함양오씨 용계(龍溪) 오흡(吳潝)이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한 뒤에 가뭄이 십여 년간 계속되어 강이 말랐던 것에서 연유하여 한천(旱川)이라고도 한다. 영해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골짜기가 많고, 들이 넓게 퍼져 있어 논농사를 주로 한다.
대천리의 상징은 비파담 소와 그 근처에 세워진 삼구정(三龜亭)이다. 비파다소[沼]는 한내 서쪽에 있는 소로, 옛날에 어떤 미인이 이곳에서 비파를 타다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삼구정은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장자인 오흡이 세운 정자이다. 소 아래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셋이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대천리는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선당동 , 문양동 , 고월동 , 옥산동의 일부를 가르고 합쳐 대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각각 자연 마을 단위로 이름과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고월(古月)은 고달골, 고드랫골이라고 불리며 지형이 반달 모양이다. 이곳에서 달맞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직곡(直谷)이라 하여 곧은 골짜기란 뜻으로도 불리었다.
문양(汶陽)은 시내의 북쪽[陽]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문양 앞을 주머이골이라는 하는 것과 관련하여 마을의 자리가 주머니처럼 움푹 들어간 모습을 이르기도 한다.
구전(口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선비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의에 집에 한 채밖에 없어 가까이 가보니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주인 몰래 부엌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새벽녘에 주인이 나가 보니 나그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으니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방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 나그네는 암행어사였다고 전하고, 이 문양 앞을 주머이골이라고 한다. 암행어사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수비면에 위치한 문수담이 있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효험이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면 기도한다.
선당(仙塘),선댕이는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다가 간 곳이라고 전해진다. 문양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옥산(玉山)은 마을 북쪽 산이름에서 유래한다. 신선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라고 하여 옥산이라 불렀다. 마을 입구에 절벽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옥선대(玉仙臺)라 한다. 추수(秋水) 엄순봉(嚴舜奉, 1903~1938)이 태어난 마을이다. 그는 김좌진 장군을 도와 조국의 광복운동을 하였으며 조선인 아나키스트(arnachist,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였다.
장숫골[長壽谷,長水谷]은 산이 아늑하고 물이 깊어 식수가 좋아 예부터 사람들이 장수하는 마을인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황곡[黃谷,篁谷]은 평해 황씨가 부유하게 살아서 황씨 성을 따서 황곡이라 하였다. 그러나 황씨가 떠난 뒤에는 황곡이라 하였으니 깊고 큰 골짜기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