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張保皐, ?(?) ~ 846(문성왕 8)]
신라 무장(武將)·국제무역가. 장보고(張寶高)라고도 한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일찍이 중국 당(唐)나라에 건너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 장교가 되었다. 당시 해적이 신라 해안에 출몰해 주민들을 붙잡아 중국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에 분개하여 828년(흥덕왕 3) 귀국, 왕에게 남해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莞島)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여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 승인받아 1만 민군(民軍)을 조직하여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였다.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을 받고, 독자적 세력으로 해적을 완전 소탕하여 동북아시아 일대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토대로 당나라·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해 나갔으며,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836년(희강왕 1)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신무왕)이 청해진으로 피란해 와 그에게 의탁하였으며, 838년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생겨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는 혼란을 틈타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실봉이천호(食實封二千戶)를 봉하였다. 신무왕이 죽은 뒤 문성왕에 의하여 진해장군(鎭海將軍) 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고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845년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삼으려 하였다가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듬해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8세기 후반 이후로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절정기를 이루게 하였으며 신라 말기 호족세력의 선구적인 정치가였다. 현재 중국 산둥성[山東省] 원덩현[文登縣] 츠산촌[赤山村]에는 1990년에 복원된 법화원(法華院)이 있는데, 이곳은 장보고해상군단의 중국 내 활동거점으로서 신라의 승려 30명이 상주하였으며, 연간 500섬 이상 추수하는 장전(莊田)을 갖춘 대가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