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식이 우리 공격수가 공격하는 공의 길을 너무도 잘안다.
이 넓은 공간을 지 혼자 수비를 하는데 거의 다 받아낸다. 공이 바로 발앞에 떨어지는 것도 톡하고 받는다. 심지어 공격때는 앞에다 콕콕 놓는데, 찰듯하다가 놓고 찰듯하다가 놓고, 반은 우리편끼리 니꺼다 내꺼다 말다툼하면서 진행되었다.
허참 이건 뭐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12:15로 또 졌다.
야 이거 정말 잘하네. 칭찬은 했지만 기분이 영 찜찜했다.
그 놈 간뒤에 우리들은 족구회를 결성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가능하면 회원도 한명씩 늘리자며 막걸리를 거나하게 한잔했다.
족구회를 결성은 했지만 회원수는 거의 그대로이다.
하지만 가끔은 서로 공을 주고 받는 연습도 하고 해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
좋은 공격수도 한명 가입이 되었다.
한데 나는 세타도 수비도 그저 그랬다.
총무직을 맡은 나는 항상 주말이면 족구장에 제일 먼저 나와 네트도 치고 혼자 연습도 하지만 좀처럼 늘 생각을 않는다.
어제는 버스 운전중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버스가 늦게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욕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나는 시간대로 운행을 하는데 너무 늦게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다. 참 기분 더럽다. 이럴때면 내가 왜 공부를 못했나 하는 생각이 더든다. 하기야 뭐 나는 공부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쩌랴. 어려서부터 집안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시골에서 시내버스 조수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 벌써 30년이 넘게 흘렀다. 그래도 그 덕에 내가 이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소작농이었다. 겨우 1500평정도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5남매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큰 형은 초등학교 문턱에 갔다만 왔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중 농촌이 살기 뻑뻑해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이제 농사지어서는 밥먹고 살기 어렵다며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들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니 뭐니 하면서 농촌이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날 큰 형이 서울을 가자고 한다.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하고 나는 따라 나섰다. 그렇게 19살 때 큰 형을 따라 서울에 왔다. 그것이 고생의 시작인 줄은 그 때는 몰랐다. 당시 처음으로 본 서울은 서울역앞 건물이 나를 기죽게 했다. 엄청난 건물들이 마치 딴 세상에 온 느낌이었던 것이다. 쌩쌩달리는 차길을 건너는데 겁이 났다. 당시는 지금처럼 교통신호를 지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형덕에 버스 회사에 취직해 종점에서 이러저런 잡다한 일을 하면서 버스 정비하는 일도 배우고 그렇게 겨우겨우 살아 갔다. 고참 선배들한테 엄청 맞기도 했었다. 동작이 느리다며 수모를 겪기도 하고 그 와중에 못마시는 술도 조금 배웠다. 겨울에 연탄불 꺼지면 이웃집에 가서 밑불 빌려왔던 일, 맨날 손이 터가지고 다닌다며 다큰 놈이 이게 뭐냐고 잔소리한던 형, 이제는 모두 옛일이 되어버렸다.
방위를 받고 제대를 하여 다른 버스회사에 기사로 취업이 되었다. 가끔 대학교 옆길은 통제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럴때면 의례껏 어딘선지 모를 최루탄가스가 스멀스멀 버스안으로 들어온곤 해서 재치기를 한 기억도 있다. 저놈들은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잘사는 게 겨워 별일을 다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러다 잡혀가면 고문을 당하여 병신이 된다는데 한편으론 용기가 가상키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학생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저럴까?
훗날 족구3광한테 애기를 들었다. 나는 지금도 알듯 모를듯한 애기인데 지금은 옛날 왕이 통치하는 시대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민주국가라면서 권력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시대가 아니란다. 누구나 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족구 총무가 지맘대로 회비를 쓰면 잘라야 하듯 국민세금을 지맘대로 사용하면 잘라야 한단다. 그리고 그 권리와 책임이 회원에 있듯이 국민들이 해야 한단다. 또한 열심히 사는데 삶을 즐길만한 여유도 없이 일만 해야하는 사회가 아니란다. 하기사 족구할 시간도 없으면 살기가 좀 팍팍하지 않을까 한다. 하긴 젊은 시절에는 정말 거의 일만 한 것 같다. 가만 생각하니 취미가 족구말고는 없는 걸보니 젊은 시절 집에 오면 잠자거나 가끔 술을 마셨던 기억밖에 없는 것 같다.
족구한지 한 8년쯤 되었다. 우리도 이제 한번쯤 족구 시합을 가지고 한다.
가서 지더라도 우리 실력을 가늠해 보자는 것이다.
좋아. 7명이 아침 일찍 일어나 학원버스 운전하는 회원의 봉고차를 타고 시합장에 갔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하는데 운동장 바닦이 별로였다.
어쨌든 우리는 40대부로 출전했다. 나도 좌수비로 출전했다.
시합시작 호각소리가 났다.
나는 시합도 시작되기전부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계속이어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