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24년 8월 26일에 가진 루터칼빈신학회 제2회 공개신학세미나에서 '십자가 신학과 신앙'이란 주제로 발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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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신학과 신앙
목 차
Ⅰ. 서 론 : 들어가는 말
Ⅱ. 루터의 십자가 신학
1. 십자가 신학이 등장하게 된 시대의 배경
1-1. 십자가 신학이 형성된 사상적 배경
1-2. 십자가 신학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
Ⅲ. 십자가 신학에서 말하는 십자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신 십자가
2.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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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도의 십자가를 잇는 칼빈의 십자가 신앙
1.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길을 같이 하는 칼빈의 십자가 신앙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시고 또한 예고하신 대로 지신 십자가는 사도에 의해 각 교회에 보내신 서신에서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신앙의 암흑기에 놓인 중세교회 시대에서는 십자가에 의해서 있게 되는 신앙이 예전 중심으로 바뀐데다가 교회를 상징을 나타내는 표로 건물 꼭대기에 달린 것으로, 교회 내를 장식하는 것으로, 십자성호1) 등으로 남아 있고, 정작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는 루터가 지적하는 것에서 보게 되는 바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하는 성직자임을 근거로 영광스러운 길을 감으로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영광의 십자가로 취함에 있다. 이에 대해 루터가 이해한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징벌 속에 두시는 대속주의 고난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를 입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들의 죽음이 됨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도된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으신 십자가를 통해 우리 또한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에 있지 않다. 그리고 이는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미워함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는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이해를 갖고 있는 것에서 루터와 다르지 않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숨어 계시므로 우리가 아버지의 형상(히 1:3)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을 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고, 십자가에 나타난 대속의 은총을 믿음을 때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2.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에서 ‘제자의 삶’이 강조되 고 있는 칼빈의 십자가 신앙
이에 의하여 칼빈이 이해한 십자가 신학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에 의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로 정리된다. 이는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 그리스도인의 십자가 죽음이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관계에 의해서 이다.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은 서로 상응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그리스도인의 고난으로 넘어가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함으로부터 도적적인 자기의식이 지배하는 자만 아래에 있는 인간의 해체로 넘어갈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자신들 또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는 것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음 – 하나님과의 만남 - 에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루터와 칼빈의 이해가 같다. 그런데 이것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루터와 다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는 중세교회 시대에서 보여 온 성직자들의 타락에 대한 비판에 따른 ‘숨어계신 하나님’과 함께 ‘영적 시련’(Anfechtung)2)이 부각되고 있으나, 칼빈의 십자가 신학3)에는 개혁교회가 세워지는 것에서 주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 된 삶에 적용되는 해석적 의미가 강조되는 것에서 상대적인 개념4)이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직은 그리스도께서 지실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한데다가, 제자들이 주의 나라가 임하실 것에 대한 이해 또한 가지고 있지 못했던 사실로 인해 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에서 주께서 지실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그로인해 제자들이 지게 될 십자가가 있게 될 것에서 정립되는 십자가 신학이다. 이 사실은 그의 기독교강요와 주석에서 잘 설명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부분적으로나마 발췌하여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건한 정신은 한층 더 높이 올라가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를 불러 “아무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데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마 16:24). 그것은 누구든지 주님께서 택하여서 자녀로 삼아 그와의 교우(交友)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자는 모두 어렵고, 고생스럽고, 불안하고, 별의 별 재앙으로 가득 차 있는 생애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장자인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는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다른 자녀들에게까지 적용시키시는데, 그리스도는 땅에 사는 동안 끊임없는 십자가를 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가 계속적인 십자가 연속의 생애였다. 사도는 그 이유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야 했다”(히 5:8)고 들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여 대속주의 뜻을 온전히 이룸에 있으시는 것에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우리의 생애를 계속적인 십자가 밑에 두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상 만사를 혈육에로 기울어질 경향이 있어 자기의 힘을 알맞은 분량 이상으로 평가하므로 그 교만을 꺾기 위하여 십자가에로 이끄신다. 더욱이 자신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서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지극히 거룩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더욱 깊은 지식을 얻게 하시지 않으면 자신의 용기와 지조를 과신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 힘으로 영구히 설 수 있을 것으로 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꺾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맡겼을 때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체험하며, 풍성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보호를 받는다.
주의 나라는 거대한 위풍이나, 큰 부유나, 세상의 즐거운 갈채 속에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치욕의 죽음으로 임한다. 이는 주님을 따름에서 애타게 고대하던 주의 나라의 영광을 누릴 행복의 당사자라고 여겼던 제자들로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실족이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어 보이실 그 순간을 공허한 희망으로 붙들고 있었기에 십자가의 치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주님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으며 죽음의 고난을 당하는 것을 비롯하여 어떤 불명예스러운 일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할 것이란 가혹한 말씀을 주심은 그들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어서 즉시 자신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들 마음의 상처를 고쳐주고 계신다. 분명히 우리의 신앙이 성령의 권능이 빛나는 그의 부활에 미치기까지 주님의 십자가에는 육신의 약점만 보인다. 그러므로 십자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신앙도 지탱할 수 있게 해 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에 그의 부활의 영광을 언제나 결합시켜 이를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에서 칼빈의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에 있는 십자가를 이해하고 그 설명에 있는 것에서 였다. 그러한 칼빈에게서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자기 부정’에 있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음’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마 16:23)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름”(마 19:21; 막 10:21; 눅 18:22)에 있는 것에서 실현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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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호, 또는 십자성호는 2세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가톨릭교회의 교파마다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한 손을 경건하게 들어 자신의 상반신에 십자를 그어 보이는 동작을 취한다. 성호는 모든 기도와 전례의 시작이자 끝이며, 어느 기도에서나 사용된다. 성호를 긋는 종파들에서 성호를 긋는 의식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기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십자성호에는 악을 쫓고, 악을 멀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힘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공회와 루터회를 제외한 개신교 교파에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다른 전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2) ‘앙페히퉁’(Anfechtugn)은 ‘영적시련’으로 번역되는 외에도 이 단어를 이해하는 견해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영적 시험’ , ‘영적 고통’, ‘ 영적 고뇌’, ‘영적 유혹’, ‘영적 시험’, ‘영적 싸움’, ‘영적 갈등’, ‘영혼의 고투’ 등.
3) 칼빈 자신은 ‘십자가 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한 용례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4) 상반적인 개념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임을 유의하라.
*발제자 : 이 천 우(개혁성경신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