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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 비엔 푸 Night Jump Paratrooper
피에르 파우루 대위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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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파우루는 1921년 태어났다. 프랑스 생시르(St. Cyr) 사관학교를 1942년 졸업했고, 그때는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비시 정부 하였다.
파우루는 1943년 스페인으로 탈출했고, 다시 영국으로 가서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했다. 거기서 영국군 특수작전단으로 가서 훈련을 받았고, 1944년 6월 노르망디 침공 동안 프랑스로 낙하산 점프해 들어갔다.
1944년 말에 프랑스가 해방되자 프랑스군은 파우루를 인도차이나로 발령한다. 2차대전 종반에 이르면서 프랑스는 식민지를 다시 장악하려 했다. 파우루는 1946년 말까지 비밀 정찰작전을 수행하다 프랑스로 귀국했으나, 1952년 낙하산대대 부대대장으로 베트남에 돌아갔고, 디엔 비엔 푸 전투에 참가했다.
파우루는 디엔 비엔 푸에서 베트민에게 포로가 되었고, 풀려난 파우루는 1954년 9월 알제리로 가서 근무했다. (프랑스 최고훈장) 레지옹 도뇌르, 미군 은성훈장을 받았다.
파우루는 2010년 사망했다. 아래 내용은 그가 사망하기 6년 전에 쓴 디엔 비엔 푸에 관한 자신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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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93년 2차대전 동안 미군과 같이 싸운 공의 은성훈장을 피에르 파우르가 수여하고 있다.
1952년 나는 발령을 받고 브리타니 지역으로 가서 보고했다. 거기서 낙하산대대가 훈련하고 있었고, 5월 2일, 우린 인도차이나로 가게 된다. 나는 인도차이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고.
마르셀 비제르 소령이 제6식민지낙하산대대 대대장이었고, 내 소속인 장 10식민지낙하산대대는 장 브레시냐크 소령이었다. 1952년 11월 우린 마르세유에서 사이공 가는 배를 타는데, 마르세유에서 대기하는 동안 우린 1낙하산연대 2대대로 소속이 변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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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빨 주 ]
마르셀 ‘브루노’ 비제르 (1916–2010) : 2차대전-인도차이나-알제리 전쟁에서 싸운 프랑스 군인이자 정치가. 디엔 비엔 푸 지휘관 중 하나였고, 인도차이나의 경험으로 프랑스군 비정규전 전술을 정착한 군인이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군인이었고, 1936년 병사로 입대해 1976년 중장으로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정치인과 작가로 살았다.
보병으로 싸우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고 독일 수용소에서 18개월 포로로 지내다 아프리카로 탈출해 자유프랑스군 공수부대에 재입대했다. 영국 특수작전단에서 훈련받고 프랑스로 들어가 레지스탕스와 연합해 전투했다.
인도차이나 이후 알제리에선 심장 바로 옆을 관통당했고, 알제리 해방전선의 표적 대상으로 암살 총알에 두 번 맞았다. 사로잡힌 알제리 해방전선 수장과 간부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경력도 있다. 그의 10낙하산사단이 무슬림 24,000명을 체포했는데 그중 4천 명이 말그대로 ‘증발’해버렸다.
장 브레시냐크 (1914-1984) : 2차대전, 1차 인도차이나 전쟁 – 알제리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장교. 인도차이나에서 제1낙하산연대 2대대를 이끌었고, 디엔 비엔 푸 전투에 참가했다. 1959~1961년 동안 알제리에선 9낙하산연대 연대장으로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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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크리스마스 부근에 하노이에 도착했고, 그 직후 타이족 지역인 나 산(Na San)으로 이동했다. 베트남 북부에 타이족이 거주하는 타이(Thai) 문화권이다. 그곳은 몇 달 동안 프랑스군이 강한 군사 거점으로 만들었다.
베트민 2개 사단이 여길 공격하다 격파되었고, 거길 지킨 것은 외인부대 소속 공수부대였다. 나 산이란 지명은 베트민 무장군 초기에 희생을 치렀고, 프랑스는 승리한 전투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즈음 최악의 전투는 끝나 있었다. 우린 나 산에 주둔하며 사방 30kn까지 정찰을 나갔다. 우린 적 베트민과 교전하려 찾아다녔고, 그들은 교전을 회피했다.
어쨌거나 1953년 4월 1일의 대규모 교전은 막을 수 없었다. 우린 대대급의 대형 적을 직면했고, 전투는 격렬했다. 우리도 10명이 전사했고, 장교도 1명 포함이다. 70명이 다쳤고 5~6명은 실종. 베트민 대대는 사실상 전멸했다. 먼저 우리 사격에 많이 죽었고, 전투기들의 기관총도 일대를 휩쓸었다.
타이족 구역에 부활절까지 있다가 4월 5일 하노이로 돌아와 휴식과 재편성을 일주일 했다. 이후 몇 달은 (중국 국경에 가까운) 붉은강 삼각주와 통킹 등에서 다양한 작전을 했다. 여기에 내 쓰라린 기억이 두 개 있다.
능력이 없는 대령들이 ‘이동 정찰단’이란 혼성부대를 이끌었는데, 정찰단에 다양한 대대들이 섞였다. 지휘관들은 인도차이나 근무를 끝내고 곧 프랑스로 귀국할 사람들이었는데, 사실상 불필요한 작전을 강행했다. 이런 작전의 밑바닥 책임은 대대장들이었다. 12일 짜리 정찰작전을 두 번 나갔는데, 우리 낙하산대대도 참가했고, 병력을 잃었기도 하지만, 중대장 두 명이 죽었다. 정말 멍청한 작전에 목숨을 대가로 치렀고, 전시 임무에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들이 현장에서 지휘 자체가 불가했다.
우린 해안지대 다낭 북쪽에 작전강하도 했다. 그 일대는 ‘Street Without Joy’란 별명으로 악명 높았다. 그 일대 1번 국도로 들어선 프랑스 병사들이 지속적으로 매복 공격을 당했다. 적은 교전을 회피하며 도망쳤지만, 우린 포로를 꽤나 잡았고, 다낭 항구로 가서 해군에게 포로를 인계했다.
1953년 봄, 프랑스 정부는 이 지지부진한 수 막힘으로 인해 전쟁에서 명예롭게 빠져나가기로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베트민이 승리하도록 놔둘 수도 없었다. 베트남 공산당인 베트민은 중공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베트남 사령관은 프랑스-베트남 병력을 육성 증강하는 임무를 받았다. 군사력을 육성한 뒤에 베트민과 협상으로 문제를 풀려 했다.
새로 온 사령관은 앙리 나바르 장군으로, 붉은강 삼각주의 베트민 사단들을 견제해 묶어두란 임무를 받고 부임했다. 중요한 것은 중공으로부터 들어오는 보급로 차단이었다. 베트민의 보급이 쌓이면 대규모 공세로 나올 기미가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베트남 주둔 여러 상급 지휘관들은 이곳 직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전임 사령관은 나바르 장군의 사관학교 동기였는데, 전임은 나바르에게 부하 장군들의 부실한 의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전임이 지목한 사람들은 전투지휘관으로 부적당했다. 특히 르네 코니 장군의 말을 조심하라 했는데, 결과적으로 디엔 비엔 푸를 진지 거점으로 나바르에게 추천한 것이 코니 장군이었다.
나바르가 부임하자마자 라오스 북부에서 문제가 생겼다. 베트민이 라오스 정글로 숨었다가 베트남으로 침투했다. 이들은 라오스에서 베트남 전역으로 침투해 베트남 남부까지 위협했다. 그런 와중에 중심으로 디엔 비엔 푸가 떠오르게 된 거다.
우리 1낙하산연대 2대대는 ‘일곱 개 탑’이라 불리는 통킹 평원에서 작전하고 있었는데, 하노이와 히이퐁 딱 중간이다.
즉시 하노이로 복귀하란 명령이 떨어졌다. 뭔가 중요한 일이 진행된다고 이해했다. 본부에서 매우 높은 레벨의 회의가 열렸고, 브레시냐크 소령은 날 데리고 갔다. 우린 카스토르(Castor. 쌍둥이자리 별)란 공수작전을 들었고, 디엔 비엔 푸 평지 중간에 뛰는 거였다. 다양한 부대 장교들이 회의에 있었고, 안도하는 기분을 느꼈다. 결국, 우리가 베트민 전투력 전체와 마주했고, 우리가 크게 궁극의 한 방을 먹일 거라고 생각했다.
drop zone은 북에서 남으로 가늘고 긴 양푼 모양의 지형에 있었고, 평균 고도는 500~700m. 북에서 동으로 계곡 드롭존을 내려다보는 수목의 고지들로 둘러싸였고, 거기 활주로(landing strip)가 있다. 양푼 모양은 북에서 남으로 14km, 폭은 3~5km.
최초 작전은 3개 제대로 구성했다. 베트남 공수사령부는 장 질(Jean Giles) 준장의 지휘 아래 있었고, 인도차이나 전체 공수병력 지휘관이었다. 이 공수사령부에는 75mm 포로 무장한 공수 포병 2개 포대가 있었고, 공수 공병중대와 공수 군의관 팀도 있었다.
루이 푸르카드 중령을 지휘관으로 제1 Airborne Task Force가 형성되었고, 식민지낙하산연대의 1낙하산대대 6낙하산대대와 1낙하산연대 우리 2대대가 구성부대다.
제2 Airborne Task Force는 피에르 랑글레 중령으로, 외인 낙하산부대 1대대와 제5 베트남인 공수대대와 식민지 낙하산 8대대가 구성이다.
강하할 인원이 4,825명. 프랑스군으로는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공수작전의 실행이었다. C-47 다코타 수송기 65대가 동원되었고, 33대는 박 마이에서, 나머지는 기아 람 비행장인데, 둘 다 하노이에 있는 비행장이다. 점프는 2파로 구성되는데, 1파와 2파는 고도 200m 아래 위로 벌려 점프한다. 발진 시각은 1953년 11월 20일 오전 7시 30분.
정보상 지상의 적은 8개 중대 + 120mm 박격포 중화기중대.
우리 1연대 2대대는 1파의 일부였고, C-47 수송기 27대다. 난 이 카스토르 작전의 점프 명단에 원래 없었다. 먼저 투입되는 모든 낙하산부대는 확실한 후위 제대를 필요로 했는데, 후위가 재보급과 보충병을 책임져야 했다. 브레시냐크 소령은 나에게 후위제대 책임을 맡으라고 했다.
우리 대대가 뛸 때는 적이 쏘지 않았고, 포로까지 두 명 잡았다. 점프 도중 경상 여섯이 나왔다. 첫날 공수작전의 결과는 전사 15명으로, 한 명은 점프 도중 사망했다. 부상은 47명. 베트민 147명을 사살했고, 적은 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3일 동안 landing strip C-47가 착륙이 가능하도록 보수작업을 했다.
11월 26일이 되자 보병을 실은 수송기가 착륙하며 보강했고, 도착한 보병들은 낙하산부대와 교대했다. 낙하산 부대들은 보병이 타고 온 수송기를 타고 12월 8~17일 동안 하노이로 돌아왔고, 우리 2대대는 12월 10일 나왔다.
53년 11월 26일부터 54년 3월 13일까지 디엔 비엔 푸는 지속적으로 개량하고 강하되었고, 개별 방어점 혹은 거점이 8개가 되었으며, 모두 여성 이름으로 호칭했다. 53년 12월에는 12,000명에 달했고, 사이공과 하노이의 본부는 디엔 비엔 푸에 낙관적이었다.
상부는 거기서 베트민을 끝장낸다고 생각했다. 베트민 전체를 그 계곡에 몰아넣는 꿈을 꾸었다. 우린 확실한 결전을 바랐고,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끝내고 싶었다.
참호화된 진지는 철옹성처럼 보였고, 민간인이 없고 군인만 들어선 진지는 그 어떤 걱정도 안 했다. 12월 말이 되도록 나바르 장군은 디엔 비엔 푸에 위험이 가중되는 걸 못 느꼈다. 확실한 정보로 적은 대구경 포병을 가져오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보다 강력한 항공력을 동원해서 지원해야함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너무 늦었다. 더 나쁘게도, 진지는 붉은강 삼각주에서 날아오는 공중재보급만 받을 수 있었고, 그마저도 자꾸 지연되고 있었다.
우린 베트민이 디엔 비엔 푸를 공격하길 기다렸고, 사실상 거대한 변화가 오고 있었다. 2월 16일에 우리 프랑스 지도자들은 인도차이나 문제로 회담을 결정했고, 회담은 제네바에서 4월 말 예정었다.
나바르 장군은 경고를 받지 못했고, 나중에 디엔 비엔 푸 실패의 책임이 몰린다. 그러나 정작 책임은 이 회담이다. 베트민은 회담을 위해서 일체의 행동을 중지한다 공언했고, 프랑스 협상자들은 거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 것으로 착각했다.
3월이 되자 베트민은 28개 보병대대 6~8만 병력으로 디엔 비엔 푸를 포위했다. 거기에 3개 포병연대와 대공포연대 공병연대도 포위에 동참했다. 그들은 총력전으로 하루 50톤의 보급품을 받았는데, 도보 인력, 큰 중량을 버티는 자전거, 소련제 트럭 700대로 보급망을 형성했다. .
우린 보병 외에 105mm 2개 포병대대에 155mm 포대 하나가 있었고, 120mm 박격포 2개 중대, M24 경탱크 10대와 2개 공병중대가 있었다.
9일치 식량,
8일치 연료,
5일치 포탄.
진지 지휘관은 크리스티앙 드 카스트리스 대령이고, 제2 Airborne commander는 랑글레로 공수부대를 지휘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엔 몰랐지만, 실전에서 중요 요소는 대위와 중위들이었다.
3월 11일, 베트민 포병은 엄청난 포격을 퍼부으면서 주기된 F8F 비어캣 전투기 여섯 대도 파괴했다.
우린 그 정도 규모의 베트민 포병에 정말 놀랐고, 우리가 대응할 수 없도록, 산에 터널을 파고 포를 집어넣었다가 나와서 쏘고 들어간다. 베트민군의 포격 때마다 무엇을 때려 부숴졌고, 프랑스군은 제압할 수가 없었다. 포격 때마다 진지의 프랑스군 포병이 재빨리 대응 포격을 했으나, 대포병 포격으로 제압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진지의 프랑스군 포병 지휘관 샤를 피로트 대령은 자기 벙커에서 자살한다.
첫 지상 공격은 3월 13일 밤, 표적은 베이트리체 진지다. 외인부대 제13 데미 여단(1/2 여단) 450명이 지키고 있었고, 자정에 베트민 수중으로 떨어졌다.
3월 14일, 베트남 제5낙하산대대가 증강군으로 디엔 비엔 푸에 점프했다. 이틀 후 비제르 소령과 6낙하산대대가 뛰었고, 남은 3월 동안 진지 내 거점들이 하나씩 넘어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3월 13일 디엔 비엔 푸 전투가 폭발할 때, 우리 2낙하산대대는 라오스 남부 사바나켓에서 지역 평정작전을 하고 있었다.
(주 : 사바나켓은 나중에 미군 MACV-SOG 대형 작전이 벌어지는 곳.)
재빨리 하노이로 돌아와 점프를 준비했다. 그때 하노이에서 우리는 시민들의 혐오스런 눈총을 보았다. 뉴스 통신원들은 현대의 파파라치처럼 거리에서 시민들을 인터뷰했고, 카스트리 대령의 와이프가 이 파파라치에 극도로 시달렸고, 이 인터뷰 내용이 프랑스에서 반전주의자들을 위한 기사로 활용된다. 우린 배신감을 느꼈다. 우린 프랑스 정부가 왜 이렇게 지원을 안 해주는 지 이해가 안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린 디엔 비엔 푸를 향해 이륙했다.
우린 전투에서 거의 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프랑스 공수부대 창설자 중 하나인 앙리 소바냐크 대령이 우리와 함께 했다. 대령은 그런 환경에서 우리를 작전 시키려고 일생에 거쳐 프랑스 공수부대를 훈련시켯다.
비행기로 가는데 공항 건물 벽에 걸린 미국 스타 영화배우 에바 가드너의 거대한 사진을 본 것이 기억난다. 친구가 그랬다.
“가드너는 정말 예쁘지 않냐?”
난 그랬다.
“지금 세상이 우릴 버리고 있어, 임마!”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등에 낙하산을 지고 복부에는 빈약한 개인 물품이 담긴 jump bag을 달고 있었다. 이미 지고 있는 전투를 위해 떠나는 몸. 우리들이 무수한 펭귄처럼 보였다.
우리 점프는 4월 1일~2일의 밤에 시작되었다. 그날 밤 점프는 3파로 구성되었고, 세 번의 성공이 필요했다.
나는 1파로 자정 즈음에 점프했다. 낙하산이 펴지자마자 난 상상을 초월하는 장관 속에 있음을 보았다. 대공포, 조명탄, 예광탄들... 바스티유 기념일의 폭죽 쇼를 보는 것 같았다.
가능한 빨리 과정을 진행했고, 우린 곧 앙리 소바냐크 대령이 점프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대령이 탄 비행기는 대공포로 인해 드롭존을 지나치면서 진지 안으로 점프할 안전구역을 지나쳤다.
우리 대대 2개 중대에 땅에 내려왔고, 난 중대 지휘소를 찾았고, 진지 사령관은 우릴 4번 진지 엘리안느로 보냈다.
브레시냐크 대대장은 다음 날 밤에 왔다. 대대장은 철조망에 떨어졌고, 바지를 거기 벗어놓고 나와야 했다. 대대는 엘리안느 진지에서 재편성앴고,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5월 7일 까지 고요한 아침을 구경하지 못 했다.
4월 1일 휴게트 진지 전투 후에, 전투는 우리 엘리안느 진지로 집중되었다. 우린 공격을 격퇴했으나 피해가 상당했고, 적 포병은 사방에서 점차 증가한다. 동료들이 쓰러졌지만 우린 여전히 상당한 전투력을 유지했다.
4월 9일 밤에 또 증강 병력이 점프해 들어왔고, 그 안에는 외인 공수부대 2대대도 있었다. 그 외인 공수부대 700명은 자원자였고 공수교육을 안 받은 사람들이다. 태어나서 처음 낙하산을 봤고,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렸다. .
전투 한 달이 흐르자 보급이 필사적이 된다. 강렬한 대공포 때문제 공중재보급은 보다 높이, 더 더 더 높은 곳에서 뿌렸다. 식량과 보급품을 너무 높은 곳에서 뿌린다. 어마어마한 양이 적 진영에 떨어졌다.
전투 후반부에, 우린 클레어 체놀트 장군의 민간 수송기들의 크나큰 도움을 받았다. 그 수송기들은 나중에 CIA의 Air America가 되는 민간 회사로, 대만에서 국민당군을 위해 활동하던 것이다. 체놀트는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자원자 조종사들을 모아 플라잉 타이거스를 지휘했던 사람이다. 그들은 디엔 비엔 푸에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저고도에서 화물 낙하산을 투하했다. 그렇게 온 수송기 두 대가 격추됐다.
5월 1~3일 밤 동안, 베트민의 장거리 포격이 집중적으로 날아왔고, 마지막 세 시간은 우리 엘리안느가 표적이었다. 우리 대대 피해는 극심했고, 중대장과 중위 한 명이 전사했고, 두 중대장은 중상, 병사 30여명이 전사했다.
전투가 끝나기 3일 전, 식민지낙하산연대 1대대가 또 점프했다.
5월 4~5일 엘리안느에 공격이 들어왔고, 비가 내려 수송기들도 오기 힘들었고, 5월 5일에 식민지낙하산연대 1대대의 반 개 중대만 점프했다.
6일 오후에 대대장 브레시냐크 소령은 나에게 무전병을 데리고 전장을 돌아다니며 대대 생존 제대들이 모여서 보다 견고하게 방어할 구역 찾아보라고 했다. 난 가슴까지 빠지는 진흙밭 참호를 통해 나갔고, 포격은 끊임이 없었다.
참호 모퉁이를 도는데 무전병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포격이 직격 당해 진흙 속으로 삼투되었을 것이다. 이제 비로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태란 걸 깨달았다.
난 지휘소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난 2m 깊이 참호 구덩이가 아직도 보인다.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보인다. 6식민지낙하산대대 대대장 비제르 소령, 2nd Airborne Task Force 지휘관 랑글레 중령, 8식민지낙하산대대장 피에르 소령, 외인부대 낙하산 1대대장 모리스 기로우드 소령, 외인 낙하산2대대의 내 사관학교 동기 로베르 카일로드 대위.
그 시기 준장으로 진급했다는 디엔 비엔 푸 사령관 카스트리스는 한 번도 못 봤다. .
5월 6일 밤, 브레시냐크 대대장은 final message를 전파했다.
“적이 여기 들어왔다. 난 무전기를 파괴한다. 모두에게 작별을 고한다.”
비제르 소령과 랑글레 소령과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항복하거나 백기를 올리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얼마 뒤, 사령관 카스트리스는 백기를 올리지 않고 항복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전문을 보내왔다.
모든 부대는 공통 전문을 받았다.
[모든 병기와 무전기를 파괴하라.]
사령관은 5월 7일 오후 5시 30분 부로 교전행위가 중단된다고 알렸다. 고요가 찾아왔다.
우린 기다렸다. 곧 그들이 오는 소리가 들리고, 마치 파도처럼, 떼로 고함을 지르며 다가왔다. 우린 참호 밖으로 나와 모였고, 잔학행위 같은 건 당장 없었다. 우리 항복에 적도 상당히 놀란 상태였고, 꽤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우린 정치장교에게 건네졌고,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디엔 비엔 푸 전투의 아군 손실은 전사 2,379명, 부상 5,234명(부상자 중 708명은 차후 사망한다), 포로 11,579명. 포로 중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고작 3,290명.
적은 전사 8천, 부상 15,000이 공식적인 추산이다.
프랑스 육군은 두들려 맞았지만 전멸하진 않았다. 2004년 르 몽드는 기사를 썼다. 우리 젊었던 장교들은 딱 두 가지를 써달라고 했다. 첫째, 우린 잘 지휘했다. 둘째, 우릴 도와야 했었다. 지원을 해주면서 전쟁터에 보내야 했다. 첫 번 째는 성취했지만, 두 번째는 결코 오지 않았다고 우린 말했다.
파리에서 전투의 끝이 공표되었을 때, 프랑스인 감정은 상당했다. 의사당에서 모두 일어나 오랫동안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공산당만 그대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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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빨 주 2]
위의 잇빨 주 1에서 언급한 두 낙하산 대대장,
마르셀 비제르와 장 브레시냐크.
둘 모두 1961년, 프랑스 정부의 대 알제리 정책에 반대하여 드골에 반기를 든 알제리 주둔 반란군 쪽에 섰고, 체포되어 구금과 사형선고까지 받았었다. 1961년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반란을 Algiers putsch라 부르며, 반란군은 알제리 강압 식민통치 지속을 바랐고, 식민통치 완화/중지를 정책으로 내세운 프랑스 정부는 주둔군 폭동 부대를 해체하며 해산/진압했다.
프랑스 외인부대에 공수부대가 2공수(강습)연대만 있는 것이 이 알제리 폭동 때문이다. 1외인공수연대가 알제리에서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해체되었다. 서양은 불명예로 해체된 부대 단대호를 절대로 다시 쓰지 않는다. 반대로, 명예롭게 싸우다 전멸했거나 침몰 격추된 단대호는 종종 부활시킨다.
또한 프랑스 외인부대는 알제리가 제2의 고향 같은 곳으로 적극적으로 반란에 동참했다.
이 반란은 심각하여, 알제리 주둔 폭동군이 알제리 비행장과 주요 시설을 점령하고 프랑스 정부와 별개로 자신들이 알제리를 통치까지 하려 했다. 군인들의 최초 불만은 알제리 주둔군 축소였다. 알제리 안에서 프랑스군이 두 편으로 나뉘어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심각했고, 70세 고령의 드골이 2차대전 때 입던 군복을 입고 텔레비전에 나와 프랑스 대중과 군부에게 호소함으로써 판세가 되돌아왔다.
이 군부 반란 사건은 알제리 독립의 기폭제 중 하나다. 그러나 물론, 뿌리는 100년 넘게 핍박과 차별로 피눈물을 흘린 알제리 국민이겠지만.
알제리는 130년 프랑스 식민을 끝내고 1962년 9월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 독립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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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첫댓글 감제고지로 둘러싸인 분지 디엔비엔푸에 진지거점을 만든것이 위험한 작전처럼 보이는데 거기에 더해 육상 보급로가 없었다는것이 전투피해를 가중시키는 윈인이었던것도 같습니다.
https://youtu.be/873rzPgtH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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