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매화 雪中梅. 만해 한용운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며 옥중투쟁을 하다가 1921년 12월 22일 출옥한 만해는 물속에 피어나는 신비로운 연꽃 같은 시세계를 통하여 미묘한 법문의 세계를 열었다.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은 이후 만해는 낙산사 홍련암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총독부에서 새로 부임한 군수가 관광차 홍련암에 오게 되었는데 도로 정비까지 해가며 다른 스님들은 모두 나가 영접을 하는데 만해는 요지부동 관음정근만 하고 있었다. 약이 오른 군수가 ‘저 자를 끄집어내라’고 하자 ‘네가 군수면 네 나라 군수지 내 나라 군수는 아니다.’라고 만해는 벽력같은 소리로 호령했다. 그에 대해 군수는 할 말을 읽어 버렸다.
1927년 49세가 된 만해는 서울에 올라와 민족운동에 가담했다. 민족항일전선인 신간회 창립위원으로 활약하여 6월 10일(음력 5월 11일)에는 이 모임의 서울지회장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올라 좌파·우파로 갈려져 있던 그들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려고 노력했다.
바쁜 생활 중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신간회에서 전국에 돌려야 할 긴급 공문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된 봉투 뒷면에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월 며칠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여 장이나 되는 그 봉투를 아궁이 속에 넣고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사람에게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가슴이 시원하군!" 하는 한마디만 남겼다. 참으로 만해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29년 겨울에는 조병옥 박사와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여론화에 앞장서고자 당대 유수의 민족 운동가들과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만해는 젊은이들을 사랑하며 모든 기대를 늘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청년들이 좀 더 열심히 정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심(小心)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를 보면 사정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 나 같은 존재는 독립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 해봐!’라고 말하며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이가 있으면 그는 오히려 축하한다는 격려의 말로 위로하였다. 그를 따르던 젊은이들을 대하면 엄격한 반면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주었다. 만해의 방에서 밤늦도록 이야기하다가 방 한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어 깨어보면 어느 틈에 옮겨졌는지 따뜻한 아랫목에 눕혀져 이불이 잘 덮여 있었으며 그 자신은 윗목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김관호 선생은 술회하고 있다.
만해는 민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려면 역시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늘 신문사 경영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눈치 챈 총독부에서는 식산은행을 통하여 서류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성북동 일대의 산림 20여만 평을 무상으로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돌아앉았다.
‘난 그런 거 모르오! 어서 나가보시오.’
그는 그것이 무엇을 하자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온 돈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렵고 힘들지만 옳은 일이 아니면 사정없이 통박을 가했다. 고난의 칼날 위에 올라서는 고통이 있더라도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들의 가슴 속에 심어주었다.
조선불교총동맹 조직으로 일제의 종교 억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의 선봉이 된 만해는 1931년 6월에 당시 유일한 불교 잡지인『불교』지를 인수하여 『유심』지에서 못 이룬 종교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84호부터 시작하여 108호에 이르기까지 종교에 관한 글뿐 아니라 청년의 교육문제, 민족의 진로문제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으로 스님의 혼을 실어 발표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1931년 전주 안심사에 내려가 그동안 쌓여있던 한글경판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손질하여 책으로 만들어냈다. 조선 500년 동안 박해받아 오던 불교가 민중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토끼전』이나『별주부전』등 부처님의 전생담을 옮겨놓은 이야기들이었으나, 그 출처를 모르는 채로 묵혀 두었던 것들이었다.
그 해 9월 24일에는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 수용소 설치를 결의하여 나병구제에 온 정력을 쏟았다. 그러나 사실 자신은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외톨이 신세였다.
만해는 김법린, 김상호, 최범술 등 청년 승려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만해가 추대 받은 사실이나 54세의 나이로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목된 사실들은 바로 그의 지조와 기개, 이미 감춰질 수 없는 설중매화의 법의 향기로 만인을 감화시킨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의 만해에겐 소망스런 활동의 터전이 주어질 리 없고, 만들어도 곧 단절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인도의 유마거사처럼 중생의 병을 도맡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요시찰 인물이었던 만해는 늘 갈 곳이 없었다. 주로 가있던 곳이 안국동 선학원이었는데 무슨 사건만 생기면 일차로 잡혀갈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혀야 했기 때문에 늘 불편한 처지였다.
그때 경봉 스님의 은사이신 구하 스님께서 서울에서 고생하지 말고 통도사에 내려와 조그만 암자나 하나 맡아 편히 지내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고 통도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만해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구하 스님은 신바람이 났다. 도량 청소며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스님을 흐뭇하게 해드리려는 마음에서 통도사 일주문 옆 큰 바위에다 기념글자를 새겨 넣어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만해는 ‘나는 돌에다가는 내 이름을 안 새깁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름을 새기면 새겼지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했다.
그런데 양산경찰서에서 만해를 떠나게 하려고 통도사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조선인 경찰이 뒤를 따랐다. 그는 펜을 들었다.
‘모기 너는 영웅호걸의 피를 빨고 어린아이의 피도 빨고 지조가 없는 얄미운 놈이다. 하지만 너에게 두 손 합장하고 크게 배울 것 하나는 동족의 피는 빨지 않는다는 점이다.’
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것은〈모기〉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발표되었다. 이 시를 보자 일본 앞잡이로서 만해의 뒤를 쫓던 그 조선인 경찰은 그만 그곳을 슬그머니 떠나고 말았다.
마저절위 - 마저(磨杵)는 절구공이가 갈고 닳아서 바늘이 되었다는 뜻이다. 절위(絶葦)는 책을 묶은 가죽 끈이
닳아서 끊어져버렸다는 뜻이다. 곧 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제자 효당 최범술에게 서주었다고 한다.
풍난화의 매운 향내를 토하듯이, 설중매화와 같이 찬바람 눈비를 원망할 것이 없이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렇게 버티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