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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있어라∼” 이 유행어를 몰라 간첩 취급 받은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 일요일에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석간 신문을 발행하느라 새벽별 보고 출근했다가 오밤중에 집에 들어오니 재수 좋은 날에야 밤 11시 뉴스를 들을 수 있다. 내 팔자에 코미디 프로와 마주하기는 참 어렵다. TV와 가장 친한 날은 일요일. 아침 8시쯤부터 시작하는 장관이나 유명 정치인들, 이른바 스스로 나라를 짊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출연해 국가와 민족을 논하는 시간부터 조영남 아저씨와 이경실 아줌마의 익살이 돋보이는 ‘체험 삶의 현장’ ‘진품 명품’으로 오전을 마감한다.
물론 오후 시간에는 ‘TV는 사랑을 싣고’를 빠뜨리지 않는다. 내가 바로 “나가 있어라”의 주인공을 만난 것은 이 프로에서였다. 루이 윌리암스 세바스찬 주니어 3세. 개그맨 임혁필이었다.
대부분의 출연진이 어릴 때의 첫사랑을 찾거나 학교 선생님을 찾는데 임혁필은 의외로 군대시절 대대장을 찾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그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해병대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군대생활이 요즘엔 별거 아니라고 큰소리치는 엄마들이 많아 아들들이 “엄마 계모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는데 그만큼 옛날에 비해 수월해졌다는 얘기다. 그래도 우리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훈련소 앞까지 따라가 눈물바람하는 순정파 엄마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해병대출신 아버지의 강요로 아들을 해병대에 보낸 엄마가 TV에서 보여준 해병대훈련 과정을 보고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친구들 모임에 나타나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재작년인가 방영된 해병대 훈련 프로그램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그날 임혁필을 보고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임혁필은 집안의 갈등으로 현실도피차 군대를 가기로 결심했는데 어이없게 단기사병으로 빠지고 말았다. 집에서 출퇴근을 해야 할 처지였다. 이게 아닌데... 방법은 해병대 지원뿐. 훈련에 자신이 없었지만 남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소냐? 눈 딱 감고 들어갔다.
그러나 후회막심이었다. 도저히 이겨낼 자신이 없었고 낙오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때 하늘 같은 대대장님이 비실이 임혁필을 격려해주기 시작했다. “해병대는 참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포기해버릴래? 한 번 참아볼래?” 함께 뛰며 그를 일으켜 세워보려는 대대장의 정성에 감동해 한 번 참아보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대대장은 “그래, 우리 피할 수 없다면 즐겁게 다시 시작해보자.” 이병 임혁필에게 내민 까마득한 대대장의 손은 탈락 일보직전에서 임혁필을 영원한 해병의 일원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지나간 일들을 재연하는 것을 보고도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병에서 병장까지 이름을 다 외워 불러주는 대대장, 그 대대장은 이제 연대장이 되어 있었다. 사람 찾는 귀신 개그우먼 박수림이 전방부대 시찰 나간 그를 찾아 전방초소로 갔다. 초소에서 만난 사병에게 연대장님은 어떤 분이냐고 물으니 대뜸 전방시찰 오실 때 사탕 주시는 연대장이란다. 내게도 그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우직하고 객기 부리기 좋아하고 집단의식이 강하고,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끝내주게 뭉치는 해병대 문화. 우리 신문사의 해병대 출신 기자를 통해서도 익히 확인한 바다.
드디어 무대에 나타난 최승길 연대장, 경례를 올린 임혁필은 연대장의 가슴에 안겨 한없이 울었다. 연대장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한참을 울고 난 임혁필이 하는 말 “아이구! 해병대 망신 다 시키네”였다. 그런데 나는 왜 그를 따라 우는 건가.
나를 스쳐간 소중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인생 굽이굽이마다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건만 그들을 잊고 내 바쁘다고 뒤도 안 돌아 보고 살아온 것이다. 비록 스타가 되지 못해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해서 그분들을 찾을 수는 없지만, 누구든지 만약 내가 저 자리에 나간다면 나는 누구를 찾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초, 지방 도시의 변두리 학교는 시설도 형편 없었다. 그래도 6학년 우리 담임 선생님만은 글씨가 보일 때부터 깜깜해져 글씨가 안 보일 때까지 공부를 가르치셨다. 시험도 많이 보고 매도 많이 때리셨다. 1등과 꼴찌, 2등과 꼴찌에서 두 번째 이런 식으로 짝을 지어 앉혀놓고 공동 운명체가 되어 공부를 가르쳐주도록 하셨다. 둘이 합해 틀린 수만큼 함께 나누어 벌을 받았다. 틈만 나면 짝에게 공부를 안 가르칠 수가 없었다. “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은 공부밖에 없다, 누구도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건만, 우리가 그 말씀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자식을 키우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5·16 직후인 5학년 때 사업이 망해 아주 낙향해버리신 부모님과 떨어져, 참고서 하나 없이 공부해 오빠들이 있는 서울에서 이화여중에 합격했건만 입학금이 문제였다. 내일이면 입학을 포기해야 할 마지막날 밤, 그 전에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딸이 셋이나 되는 가난한 육군 대위가 신문지에 돈을 싸서 들고 왔다. 어린 것이 자기 노력 부족이 아니라 어른들 때문에 학교를 못 간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한 달 월급의 반이 넘는 돈을 놓고 갔다. 그덕에 나는 오늘이 있건만 그 시골도시를 뜬 지 이제 40년째다. 그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그분의 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고생하며 살지는 않을까?
중학교 3년이 내 인생의 가장 고난기였다. 수예시간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지 새로 수예품을 준비해야 하는 날은 우렁각시가 있는 듯 내 책상 서랍 속에 수예준비물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소풍가기 전날 나를 살짝 불러 돈을 쥐어주시며 도시락 준비해 소풍 오라고 하시던 우리 담임선생님이 우렁각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민주화운동으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를 받았을 때 외국인 선교사가 나를 숨겨 주었다. 그때는 숨겨준 사람도 같이 벌을 받는 긴급조치 상황이었다. 꽃장사로 위장하고, 운전기사를 윽박질러 선교사집들도 감시할 때 겁에 질린 나를 보살펴주던 사람은 오히려 희생을 각오한 선교사댁의 파출부 아줌마인 건이 엄마였다. 선교사는 추방을 각오했지만 건이 엄마는 감옥을 각오해야 했는데도...
그댁도 안전하지 않아 이리저리 떠돌다가 간 곳은 무교동에서 고급 술집 마담을 하던 빼어난 미인이던 심언니의 작은 아파트. 성이 심씨라고만 말하고 이름도 알 필요 없다던 그 언니를 못 본 지도 이제 30년이다.
즐거울 때보다 어려울 때, 손끝만 닿아도 고맙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솟는데 각박한 사회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아니, 괴로움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의 세계마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예전에는 학생 간의 싸움은 강자와 강자끼리의 힘다툼이나 우리 학교의 학생이 타 학교 학생에게 맞고 오면 혼내준다고 몰려가서 한바탕 싸우고 오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은 가장 힘없는 아이나 장애아동, 가난한 아이들을 골라 왕따를 시키거나 몰매를 주고 괴롭히는 너무나 야비한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다. 힘없는 피해 아이들에게 가해 아이들은 작은 악마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아이들은 철이 없어, 주먹이나 힘으로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한심하고 잠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에 남을 것인가. 과거는 과거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가. 내짝이 시험 못봐 틀린 것도 내가 함께 맞아 엉덩이를 한쪽만 의자에 걸치고 공부하면서 어린 마음에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던 6학년때 담임선생님이 왜 내가 찾고 싶은 첫 번째 사람인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군대생활, 남자들 술 한 잔 걸치면 증인이 없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뻥치며 회고록 쓰는 것을 미워했지만 그 속에 담긴 아름다운 사람냄새가 있다. 물론 악몽으로 기억되는 선임자나 동료, 장교들도 있다. 그리고 남을 평가하며 기억하듯이 나는 그들에게 어떤 동료, 어떤 부하로 기억되게 할 것인가!
세바스찬 주니어 3세 덕에 지금 내 곁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을 둘러보고, 내 인생에서 만났던 소중한 사람들을 찾아나서야겠다.
개그맨 세바스찬 임혁필(해병702기)
공식홈페이지 http://myhome.naver.com/gagfeel
첫댓글 임혁필이 702기 였나요? 난 왜 몰랐지 동기였구나 반갑네 혁필아 !
개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