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왜 백의종군을 해야 했나?
1596년 12월, 정유재란은 의외로 조선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도체찰사 이원익의 지시를 받은 허수석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침투해 탄약고를 폭파하고 군량과 선박을 불태운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과 관련해 이순신이 약간의 구설수에 올랐다. 그의 군관이 우연히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가 허풍으로 자신이 한 일이라고 이순신에게 보고하고, 이를 그대로 믿은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포상을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진상이 밝혀져 이순신이 모르고 한 일임이 납득되었으나, 갈수록 이순신을 찜찜하게 보고 있던 선조에게는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된다.
1597년 1월, 일본에서는 8개 군, 총 12만 명이 조선으로 건너가 남해안에 남아 있던 2만 명의 일본군과 합세하여 조선을 치기로 계획이 세워지고, 고니시와 가토가 병력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왔다. 여기서 이른바 ‘요시라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은 가지고 있던 으뜸패를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스스로 내팽개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널리 알려진 대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요시라라는 이름의 이중간첩을 활용해 ‘가토군이 몇 월 몇 일에 바다를 건너올 테니 기다리고 있다가 요격하라’고 유인했으며, 이순신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으나 조정은 넘어가 버려서 이순신을 처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니시와 가토가 서로 원수지간이었음은 틀림없으며, 요시라는 왜란 이전부터 귀중한 정보를 많이 전해주던 대마도인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고니시가 정말로 이순신의 손을 빌려 가토를 제거하려 했을지 모른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이순신의 말처럼 “적들의 수가 적으면 도망칠 것이고, 많으면 역습할 것”으로, 요시라의 말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조선 수군이 섣불리 공격하기 어려웠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일단 오랜 전란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군의 인원이나 건강 상태가 매우 열악했으며, 내내 당하기만 했던 일본에서도 대비책을 세워 ‘일본 배가 속도와 숫자에서 가지는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조선 배를 겹겹이 둘러싸고 공격한다’는 지침을 세워 두었으므로, 전처럼 만만하게 덤빌 수 없었던 것이다. 자칫 적들이 다수라면 개떼들에게 포위된 곰처럼 당할 수 있고, 적들이 소수라 해도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면 느리고 탑승인원도 적은 조선 배로 추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유재란 이전에도 부산포를 공격해 왜놈의 근거지를 쓸어버리라는 조정의 지시에 거듭 불복해온 이순신이었다.
그래서 계속 불만이 쌓여온 선조는 요시라 사건에 마침내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순신이 지시 내용을 오해한 점도 있었다. 선조는 출정하여 가토를 잡으면 좋겠지만, 어려울 경우 단지 부산 일대를 순항하며 위력 과시만 해서 적군이 섣불리 상륙하지 못하게 방해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출정 명령을 어기고, 가토와 그 후속 군대가 줄줄이 상륙하게 내버려 두었으니, 분격할 만도 했다. 게다가 원균은 이순신이 자신의 공을 가로챘다고 계속 항의하고 있었고, 그것은 허수석 사건과 맞물려 이순신에 대한 인상을 더욱 나쁘게 했다.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지만 자신의 허가도 없이 무과를 실시하거나 둔전을 만들거나 한 점도 거슬렸다. 말하자면 선조의 눈에 이순신은 ‘좀 유능한지는 몰라도 오만하고 상급자를 무시하며 정직하지도 않은 지휘관’이었다. 그래서 마치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하듯,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직에서 끌어내리고 백의종군케 했던 것이다(서인들이 당쟁의 일환으로 원균을 지지하고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설은 다소 과장되어 있다. 이순신의 거취를 결정한 어전회의록을 보면 유성룡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인들이 이순신을 성토하고 있으며, 서인인 윤두수는 ‘이순신과 원균 모두 통제사로서 함께 싸우도록 하자’고 가장 온건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리지웨이가 대신할 수 있었지만, 이순신은 원균이 대신할 수 없었다. 아주 무능한 장수는 아니었으나 다혈질에 지모가 부족했던 그는 이순신처럼 군관과 병사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고, 막상 통제사가 되고 보니 이순신이 왜 출정을 꺼렸는지 그 실상을 알게 되어, 조정의 출격 명령에 마찬가지로 불응했다. 결국 도원수 권율에게 불려가 매까지 맞은 끝에 출정했으나, 칠천량에서 처참히 패배하고 만다. 빠른 속력으로 치고 빠지는 일본 수군에게 끌려다니다가 기진맥진이 된 사이에 기습당한 결과였다.
왜군의 남원성 침공 작전도. 코무덤. <출처: (CC)Insers at Wikipedia.org>
지옥문이 열리다
칠천량 해전(1597. 7. 15)이 일어나자마자 남해안의 일본군은 두 갈래로 전라도를 공략해 들어갔다. 그동안 기다렸던 것은 그들이 출격한 사이에 조선 수군에게 뒤통수를 맞을 것을 염려해서였는데,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정유재란에 앞서 히데요시는 장수들에게 지침을 내렸는데, 그 중에는 임진년과는 크게 다른 것들이 있었다. “전라도를 반드시 손에 넣고, 나머지는 가능한 한 그리하라”와 “점령보다는 섬멸을 목표로 하라”였다. 임진년에는 최대한 빨리 한양을 공략하여 선조의 항복을 받으려 했고, 그것은 조선인을 히데요시의 신민이자 대륙 공격군의 일부로 쓰려 했기 때문이기에 잔악행위는 되도록 자제하고 일본식 통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썼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성격이 달랐다. 이순신과 의병들 때문에 손을 못 대 본 전라도를 철저히 유린하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그런 전략을 세운 까닭은 불확실한데, 단순히 히데요시 개인의 분풀이 차원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공포 효과를 극대화해 조선인의 저항을 마비시키고, 최소한의 전력으로 점령을 달성하는 한편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확보해 장기전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려던 것이 아닐까 싶다(야담이지만, 히데요시는 “조선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고 그 땅에 일본 서도의 백성들이 옮겨 살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유명한 “코 무덤”도 이 때 생겼다. 일본 병사들은 조선 백성을 잡으면 외국에 노예로 팔아서 돈을 벌려고 했는데, 학살이 우선 목표였으므로 먼저 일정한 수의 조선인을 베고 난 다음에 팔 권한을 주었다. 죽인 증거로 목을 가지고 다니기에는 거추장스러웠기에 코를 베었고, 그 코를 모아서 본국의 히데요시에게 보내면 히데요시는 흐뭇하게 훑어본 뒤 “코 무덤”에 묻게 했다는 것이다.
모리 히데모토가 지휘하는 ‘우군’은 양산을 출발해 밀양, 창녕, 합천을 거쳐 황석산성에서 곽준의 병력과 마주쳤으며,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좌군’은 부산을 떠나 배편으로 사천과 왜교에 상륙하고는 하동, 구례를 지나 남원으로 밀려들었다. 황석산성은 쉽게 함락되었으나, 남원성에서는 전라병사 이복남의 조선군과 부총병 양원이 지휘하는 명군이 합세하여 치열하게 방어전을 벌였다. 명군과 조선군의 대포 십여 문이 평양성에서처럼 불을 뿜었으나, 수만 정의 조총들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8월 16일, 남원성은 함락되고, 성 안의 조선인은 남김없이 살육당했다. 이렇게 계속 북상하던 좌, 우 일본군은 힘을 합쳐 전주로 향했으며, 공포 효과가 작용했음인지 병사들이 도망쳐 버린 전주성에 8월 25일 입성한다. 마침내 전라도 점령의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그리고 좌, 우군 중에서 우군이 그치지 않고 계속 북상해 충청도까지 이르자, 선조는 광해군에게 대비를 모시고 북으로 피난가게 한 다음 자신은 한양에서 적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임진년의 ‘비겁자 오명’을 씻겠다는 듯.
최후의 제물
울산성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조-명 연합군.
그러나 일본군의 승세도 거기까지였다. 9월 7일에 명군이 직산에서 일본군 선발대와 만나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는 어느 쪽이 이겼는지 불분명했으나 거침없던 일본군의 진격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9월 16일에는 명량해전이 벌어진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믿고 이번에야말로 이순신에게 설욕할 수 있을 줄로 믿었으나, 이순신은 초인적인 지도력(가공할 적의 숫자에 질려 다만 일부라도 전선을 이탈했다면 끝장이었을 것이다), 조선 배의 강점, 그리고 지형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는 한산대첩처럼 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꿀 정도는 아니었으나, 일본군의 사기를 크게 꺾고 해상에서 조선군에게 요격당할 염려를 다시 심어주었다. 게다가 이제 동장군이 돌아올 때도 가까워지고 있었고, 명군도 다시 대규모 병력을 본격적으로 파병해왔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전선을 물리며 전쟁에서 발을 뺄 시늉을 했으며, 울산성 전투 같은 치열한 전투가 가끔 벌어졌지만 전세는 대체로 소강 상태가 되었다.
마침내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죽었다. 그리고 조선 주둔군의 완전 철수가 결정되었다. 그 철수 병력을 섬멸시키고자 노량 앞바다로 출동한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어디선가 날아든 총탄에 가슴을 맞았다. 그렇게 7년의 전쟁, 조선 역사상 최대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낳았으며, 일본인과 중국인들의 피 역시 이 땅을 흠뻑 적시도록 한 전쟁은 그 전쟁이 낳은 가장 큰 별, 이순신을 제물로 하며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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