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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의 전쟁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74년 3월10일은 필립핀 루방이란 섬에서 1944년 필립핀으로 파병된 하루 오노다가 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30년만에 항복하는 날이었습니다. 전쟁은 이미 30년전에 끝났지만 그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무려 29년간이나 수색을 피하며 정글에 굴을 파고 숨어 살며 음식을 훔치는등 항복하지 않은채 살았습니다. 그에게 전쟁이 이미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연인원 13,000명과 수십만 달러의 비용이 들었지만 결국 전쟁시 그의 상관이 직접 나서고 난뒤 그는 항복했습니다. 52세가 될 때까지 30년을 그는 저항과 도주와 은신의 삶을 삻았던 것입니다. 오노다에게 항복이란 다름아닌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낸시 레이 드모스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의지 내어맡김이란 책에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구원의 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항복하는 것도 다름 아닌 삶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이 전쟁을 치르며 살아갑니다. 시간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채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항복하십시오. 그러면 삶의 양식이 바뀌고, 미래가 바뀌며,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맡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은혜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하여 믿음으로 올바른 반응을 하시기 바랍니다.
가톨릭 의대 교수를 지낸 홍관수(세실내과의원) 원장이 일상에서 경험한 일들,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 <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는 책을 냈습니다. 책 제목이 재미있지만 아내에 대한 이야기보다 제 마음에 감동을 준 것은 잊을 수 없는 환자 이야기였습니다. 그가 하루는 회진을 하는데 정원일이란 환자가 그의 손을 잡고 병실밖으로 나가더니 "선생님, 손에 꼭 맞을 겁니다.”라며 금반지를 홍원장의 손에 끼워주더랍니다. 어리둥절해서“웬 반지냐?”고 했더니“원장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서요.”순간 가슴이 찡하면서 언젠가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보라고 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인데, 신증후군으로 몸이 퉁퉁부어서 입원해서 치료를 통해 붓기가 빠지면 퇴원하곤 했는데 그런 고통속에서도 늘 밝은 웃음과 꿋꿋한 자세로 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반지 이야기를 자랑삼아 했는데 한 간호사가 '아 그랬구나!'하며 말하기를 "지난번에 정원일 씨가 전철에서 하모니카를 불면서 구걸하는 것을 봤어요. 외출증을 끊어서 돈 번다고 나간 것같아요.”부끄러움을 무릎쓰고 하모니카를 불면서 구걸한 그 돈으로 홍 원장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만들어진 금반지였던 것입니다.
그 금반지의 가치를 무게를 따져서 말할 수 있을까요? 한 시각장애인의 수고와 눈물과 부끄러움을 무릎 쓴 용기가 담긴 그 반지의 가치를 무게로 따지는 것은 그의 삶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은혜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 살아가야할 책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 시각장애인도 자기가 받은 은혜에 보답할줄 아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없이 사는 것은 곧 배은망덕입니다.
제가 어렸을때 좋은 친구를 사귀기를 바라셨던 아버지는 늘 명심보감의 한토막을 들려주셨습니다. <주식형제는 천개유로되 급난지붕은 일개무>라, 풀면 술이나 음식을 먹을 때 형제같은 친구는 많지만 급하고 어려울때 도와주는 친구는 하나도 없구나. 이 말씀은 나이가 들수록 제게는 '좋은 친구'를 사귀라는 말이 아니라 좋은 친구가 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좋은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내가 못되게 살아도 좋은 친구가 내 곁에 머물러 줄까요? 좋은 친구를 만드는 가장 빠른 비결은 내가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중풍병은 예수님 당시에는 천벌을 받은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사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 질병을 고대인들이 천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천벌을 받았다면 그 삶이 얼마나 못된 삶이었기에 벌을 받았나? 싶은게 사람들 생각입니다. 본문에도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천벌을 받은 사나이, 그러나 그 삶 자체는 갑작스럽게 닥친 질병으로 인한 말할 수없는 고통을 겪는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의 질병은 가정 전체의 경제적인 파탄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사람들의 대놓고 퍼붓지 못하지만 천벌을 받았다는 수근거림은 가족들이 견디기에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한 모든 노력이 헛된 것이 되고, 이제는 그렇게 죽을때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체념과 절망을 견디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불쌍히 여긴 친구들이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중풍병에 걸려 희망이 없는 그의 건강할 때의 삶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곁에 사람이 남아 있도록 살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못되게 살아서 중풍병에 걸렸다면 누가 그 곁에서 그를 염려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며 남아 있었겠습니까?
최용우 목사가 사람에게 친구가 없는 이유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여러분을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흔히 물이 너무 깨끗하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하지요. 물은 그래요.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깨끗하면 깨끗할수록 그 깨끗함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깃듭니다. 사람들이 여러분과 가까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격성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공격하는 듯한 말투와 태도를 보이면 그 누구라도 정나미가 떨어져 도망갑니다. 또 하나는 정죄성입니다. 자신은 올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마구 지적하며 훈계하며 충고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틀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곁에는 친구가 없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죄송하지만 착각입니다. 야고보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되물었고 이에 대해서 그가 대답합니다. 눅10:27절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나님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친구가 없다고 탄식하기 전에 좋은 친구가 되십시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사랑의 사람이 되십시오. 나무고 베풀며, 위로하고 격려하며 낮아져 섬기십시오. 여러분이 인생의 가장 외롭고 힘든 길을 걸을때 함께하는 사람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좋은 의도가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겪어야할 과정이 있습니다. 친구들은 들것을 만들었고 예수님에게 그 친구를 데리고 가기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 자체에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이 중풍병자를 위해서 예수님이 하실 일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실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인생의 어려움을 안고 찾아나오는 것입니다. 타는 풀무불속에 안 뛰어들어도 됩니다. 사자굴에 들어가지 않아도 됩니다. 문제가 있을때마다 주님앞으로 뛰어나오면 그게 믿음입니다. 내 자식을 위해, 내 가정, 내 남편과 아내, 가족들, 내 직장, 내사업의 문제를 들고 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가 좋은 의도를 갖고 나설때 그것이 열매맺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나오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존재가 사단입니다. 믿음의 일은 반드시 영적훼방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분별하여 알고 극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본문에 보면 문앞에 사람이 많아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출입구를 막았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이기적입니다. 이웃은 고사하고 마누라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죠? 물론 저도^^* 중풍병자의 들것을 보면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이 길을 열어줘야 하는데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의 선한 의도는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중풍병에 걸려 살아가는 한 불쌍한 인생을 위해 길을 내어줄만큼의 양보심도 없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겠다고 그 집의 문을 막아서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불쌍한 영혼을 돌앚보지도 않은 채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 모습이 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집의 문을 막아선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의도가 열매맺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무관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좋은 의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에서 나왔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비결이 됩니다.
동생이 암투병을 하면서 감리교단에 실망한 이야기를 토로했습니다. 교단선교국에 전화를 했더니 수술과 치료를 위해서 100만원 도와줄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딴에는 한국감리교회 최초로 독일감리교회에 파송된 선교사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게 무너진 거죠.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네 병이 우리가족에겐 특별한 일이지만 한국교회엔 너보다 어렵고 힘든 목회자가 수도 없이 많다. 네 일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기대하지 말고 기도해라' 좋은 나무는 그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좋은 나무가 되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들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선한 의도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27세에 백만장자가 된 폴 마이어 박사가 있습니다.‘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이라는 책을 썼죠. 수익의 50%를 기부한다는 원칙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젊을 때 57개 회사에 지원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체구가 작다는 이유이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직업을 찾았고 마침내 도시 변두리의 흑인 마을에서 보험 영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기회로 생각하고 뛰었습니다. 그는 참가한 모든 세일즈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결국 교육, 컴퓨터 소프트웨어, 금융, 부동산, 인쇄, 제조, 항공 등 40여 개가 넘는 회사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의 저작물의 판매액만 총 20억불이 넘었습니다. 그는 무엇으로 그의 한계를 극복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기도로 그가 가진 한계를 극복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즉각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은혜, 창의력" 등 상상을 초월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였습니다. 매일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에 드리는 일상화된 기도의 결과 그의 세계는 점점 변화되었고 항상 어제의 자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는 이유는 5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둘째, 내 능력의 한계 때문에. 셋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넷째,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다섯째, 그분의 뜻을 이룰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폴 마이어는 세상의 길이 막힐때마다 기도로서 하늘의 길을 열며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을 보는 사람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땅으로부터 눈을 들어 하나님을 쳐다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길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사람들로 막힌 문앞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발 비켜달라고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힘으로 밀어젖히며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았고 거기에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엉터리 지붕이라도 뜯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거나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볼수 없었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한다는 믿음이 없이는 그 길은 열리지 않았을 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열망이 있는 사람들은 훼벙이나 장매물앞에서 뒤돌아서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지붕을 뜯어내는 일 때문에 얼마간의 소란이 일어난후 사람들의 눈앞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들것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중풍병자는 그토록 원했던 주님앞에 올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는 오래도록 그의 육신과 영혼을 고통스럽게 했던 중풍병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보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에 지혜를 부어주신 하나님은 하늘의 길을 우리도 보게 하셨습니다. 사람 때문에, 물질 때문에, 건강 때문에 그 무엇 때문에 막혔든지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길을 여는 믿음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