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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8:16-22(p.977) 열어주시기를 사모하라
우리가 어릴적에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다음해 봄까지는 농한기라 하여 시골에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겨울 내내 어른들은 어른들까지 놀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긴긴 겨울을 보냅니다.
그럴때에 가설(假設) 극장이 옵니다. 넓은 공터에 말뚝을 박고 흰 천을 둘러치게 되면 안에서 나는 소리는 들려도 영화 화면(畵面)은 볼수가 없게 됩니다. 낮 동안에는 가설극장 사람들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선전을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영화 보여 달라고 엄마를 조르기 시작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가설극장에서하는 영화는 년령제한이 없는 그런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돈이 한푼이라도 귀한 시절에 어른들이 영화를 보라고 돈을 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초저녁부터 가설극장 주변에서 얼쩡거리지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화면은 볼 수 없지만 영화의 대사를 듣습니다. 그리고 어떤 장면일까 상상을 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즈음에 둘러쳐져있던 포장을 ‘확’ 거두워 줍니다. 그때 밖에서 오들 오들 떨면서도 기다리던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마지막 장면은 놓치지 않으려고 화면 가까이 몰려갑니다.
앞부분은 말소리만 들으면서 어떤 장면일까 상상을 하였지만, 짧은 몇분 동안의 마지막 장면이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신통하게도 그 영화 전부가 이해가 된다는 놀라운 사실이 믿어집니까? 이것은 사실입니다.
돈이 없어 영화를 볼수 없던 아이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막았던 것을 ‘확’ 열어주므로 모든 것을 알게해 줍니다.
이 세상에는 닫쳐있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닫쳐져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재물의 복이 닫쳐져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지식의 문이 닫쳐져 있기도 합니다. 평화의 문이 닫쳐져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닫쳐져 있다면 그 시대는 불행합니다. 그 시대는 암흑의 시대가 됩니다.
하나님은 열어주시기도 하시고 닫아 버리시기도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의 말씀을 한곳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7절과 8절 말씀입니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열고 닫는 권세가 하나님께만 있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닫고 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의 문을 열어 주시는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먼저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너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말씀을 싸매어 봉함하라 하셨습니다. 함부로 뜯어 볼수 없도록 밀봉하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의 제자들이 읽지 못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폐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폐기하면 영영 볼수 없지만 봉함하여 두면 언제든지 열어 볼 수가 있습니다.
열어보여주시는 때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열어 주실때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봉함하여 두라는 것은,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가는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지금 봉함하여 두었던 말씀을 열어 보여주실 때가 있으신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빠나 엄마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질문 중에는 설명해줘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언제가는 어릴적에 궁금했던 그 일을 알게 될때가 올 것입니다. 옛날 아이들은 엄마나 할머니에게 “엄마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하는 질문입니다. 그것 아이에게 사실 그대로는 설명해줘도 알아듣지도 못할뿐 아니라 설명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도 그것을 아는 날이 옵니다. 그때까지 어른들은 덮어 놓고 기다리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때는 현실이 답답하여 낙심됩니까? 설교를 듣는 동안 무슨 응답이라도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문이 닫친 듯 아득하십니까? 답답하십니까? 하나님이 열어 주시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마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 하셨습니다. 찾으라 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열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보실때에, 때가 이제 되었다는 싶으실때에 주실 것입니다. 찾게 될 것입니다. 열릴 것입니다. 아멘
. 17절과 18절 말씀을 봅니다.
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말씀이 봉함된 듯 할때가 있습니다. 설교자가 가장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설교를 전하지만 알아듣지를 못할때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이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한주간 설교를 준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지만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설교자의 가슴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실망은 하지 않습니다. 언제가는 깨닫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훗날 언제가 성령님이 역사하사 회개하고 돌아오는 심령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저들에게 말씀이 봉함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봉함한 것을 떼어내시고 은혜를 부어주실 때 주님 앞에 돌아올 심령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자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멀찌감치 예수님을 따라가 대제사장 관저의 뜰까지 갔습니다. 그는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서 결말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야바의 법정에서 갖은 곤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예수님을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뺨을 때리면서 “그리스도야! 누가 너를 때렸는지 예언자처럼 말해 보아라.”라고 말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치욕을 당하고 계시는 동안 지척에 있던 베드로에게, 한 하녀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을 부인하며 “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하려고 앞문 있는 데로 나왔는데 또 다른 하녀가 베드로를 보더니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이 사람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맹세하고 또 부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못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씨를 보니 분명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예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나가 심히 통곡하였습니다.(마26:69-75)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은 잠시 동안 봉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닭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했던 베드로였습니다. 말씀이 열릴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봉함되어 있는 것처럼 말씀을 들어도 읽어도 감동이 없거나 주님을 향한 사랑도 감사도 없다면 이는 말씀이 봉하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가리신 것입니다.
이럴때에 우리는 더욱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봉함(封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집을 향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것으로 알고 자신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여호와를 바라보리라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18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가정 또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사여 선지자는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주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선포한 예언들을 글로 적었고, 그 문서를 봉해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맡겨 보관하게 했습니다.
이사야는 비록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의 반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낙심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그가 전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될 미래를 바라보고 기다리므로 만족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얼굴을 숨기고 계시지만, 자신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다리며 바라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사야의 태도에는 하나님이 지금은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시지만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자녀들’, 즉 두 아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징조와 예표를 믿고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가 반드시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가정이 하나님의 언약 관계 속에서 세워질 때 온전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믿음의 가정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삶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이 그 시대에 그래도 남아있다는 것은 다음 세대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여호와를 바라보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은혜의 문을 여실 것이라는 징조와 예표로 쓰여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모든 은혜가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주시는 것임을 믿고 믿음과 소망 가운데 기도하는 우리 모든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19절 말씀에서 22절까지를 보겠습니다.
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사람의 영혼은 신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신을 찾을 때는 보통 어려움을 당할때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할때에 어리석게도 점술가나 굿을 하는 신접한 자를 찾아가서 자신의 운명을 묻습니다. 점술가나 굿을 하는 자들은 많은 말로 주절거리며 속살거리지만 헛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을 찾는 것을 보면 그 어리석음에 탄식이 나올 뿐입니다.
본문 20절과 21절 중반절 까지를 우리는 명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부모의 묘를 찾아갔어 거기서 신세타령을 하고 죽은 부모에게 도와달라고 목놓아 울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자가 죽은 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의 날에 환난의 날에,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대는 전쟁의 혼돈과 두려움이 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흑암이 덮는 날에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봉함하였던 말씀을 열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안다면 아무리 어둠의 터널이 길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초행길에 운전을 하면서 가다가보면 터널에 들어갈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 발에 등이며 우리 길에 빛이시기 때문에 시대와 환경은 어두울지라도 우리 안에 빛이 있기에 그 빛을 따라 그 어둠의 건너편이 보이기에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봉함하신 하나님은 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열려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예만 들어보려 합니다. 한 아이는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갖고 싶은 그것을 살 수 있는 백화점의 상품권을 선물로 받았다 합시다. 아이는 다음날 백화점으로 달려갑니다. 백화점은 아직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백화점 정문에는 이런 팻말이 있었습니다.
OPEN AM 10:00 CLOSE PM 10:00
아이는 시계를 보니 아직 1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시간이 분명 있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으셨다면 여실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구하라 하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