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사
문충공 이항복(白沙文忠公李恒福)
● 25세
이항복(李恒福)
- 상서공후 정헌공후 백사공파 파시조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이항복(李恒福. 명종 11년(서기 1556년)~광해
10년(서기 1618년)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의 대신이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백사(白沙)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공의 아버지 몽량(夢亮)은 3조판서를 지냈고 당대의
명경(名卿)으로 칭송되던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악동(惡童)으로 골목대장이었으나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학문에 열중하더니
뒤에 학궁(學宮)에 들어가 더욱 정진하여 이름을 떨치니
당시의 재상 권철(權轍)이 듣고 만나보고서 손녀사위를
삼았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이 때에 만나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선조 13년(서기 1580년) 문과에 급제한 다음
호당(湖堂)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호조참의에 이르렀을 때에
왕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공평하게 다스려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당시 사화(士禍)가 일어나
대신 정철(鄭澈)이 수괴(首魁)로 몰리어 찾아가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거리낌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 때에 정철의 죄를 태만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의 신분으로 임금을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開城)에 이르렀으며
이때에 이조참판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두 왕자를 호위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때에 조정(朝廷) 대신들의 공론은
임금이 함흥(咸興)으로 피란해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공은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寧邊)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임금의 장전을 한음과 교대로 찾아가서
간청한 끝에
새벽녘에야 윤허(允許)를 받았다.
그러자 함흥으로 가자고 주장하던 대신들이 부모의 병이나
자신의 노구(老軀)를 이유로 호종(扈從)하기를 꺼리므로
공이 분연히 나서서 임금의 수레를 붙들고 진두지휘를 하였다.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가서 명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고
명나라의 대병(大兵)을 조선에 이르게 하였다.
임진∼정유의 전쟁 중에 병조판서를 5번이나 맡으면서 침략자를
소탕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선조 31년(서기 1598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부원군을 받고
정응태(丁應泰)가 명나라에 무고(誣告)한 사건을 바로잡기
위하여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특유의 해박한 문장으로 해명하니
명나라 황제가 오해를 풀고 정응태를 파면하였다.
이어서 영의정에 오르고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때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므로 그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의 당(黨)”이라는 혐의를 받으니 자진하여
영의정을 그만두었는데,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거듭 불렀으나
‘성만(盛滿. 벼슬과 명예가 가득함)’이 되었으니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하였다.
선조는 거듭 부르고 공은 응하지 않으니
조정이 이 일로 어수선하여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때에 한 벼슬아치가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싫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자꾸 부르시는지 모르겠다.”
는 불평이 선조의 귀에 들어갔다.
선조가 진노하여
“대신(大臣)을 능멸하는 자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찾아보라”
고 나무라시고 그 자는 그 길로 청풍군수로 내쳤다.
이 뒤에도 공은 끝내 복직하지 않았으나 예우는 예전과 같이
했고
큰 일이 있을 때에는 공의 자문을 받았다.
광해군(光海君)이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하려 하므로 변호하다가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고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자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에 귀양 가서 거기에서 죽었다.
후에 관작이 환급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포천(抱川)에 예장했고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에 사액(賜額)되었다.
공은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는 40여 년 동안 당쟁(黨爭)에서 초연하였다.
저서는 『백사집(白沙集)』2권 ·『북천일록(北遷日錄)』2권
·『주소계의(奏疏啓議)』2권 ·
『사례훈몽(四禮訓蒙)』1권 ·『노사영언(魯史零言)』15권
등이 있다.
● 백사공
휘 항복의 처신과 공적
생몰년은 명종11년~광해 10년이다.
고려의 대학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방손이며
참찬공 몽양(夢亮)의 아들이다.
선조 13년 백사는 과거에 급제하여 공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백사가 도승지(비서실장)로 있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 가는 형국이었다.
임금이 피난길에 오를 때 신하들이 모두 도망하여 궁궐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았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칠흑 같은 밤에 임금이 궁궐을 떠나
피난길에 나서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임금을 수행하는
신하가 없었다.
잘못하면 임금 혼자 비를 맞으면서 밤길을 떠나야 하는 처참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때 임금의 어가를 앞장서서 이끌고 간 인물이 백사다.
피난 행렬이 임진강에 이르렀다.
비가 쏟아 붓는 캄캄한 밤에 어떻게 강을 건널 것인가.
다행히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견한
율곡이 기둥에 기름을 발라 정자를 세워 두었고,
이 정자를 불태워 그 빛으로 무사히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었다.
강을 건넌 이후에는 임금의 피난 방향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를
두고 논의가 분분하였다.
동북방(함경도)과 서북방(평안도)으로 가자는 의견으로
양분되었다.
신하들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로 갈 것을 고집하였으나
백사는 평안도로 가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였다.
“우리나라는 원래 약한 나라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데 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 계책은 중국의 힘을 빌려 다시 권토중래하는
길입니다”
라고 밤새 진언하였다고 전해진다.
어가는 이미 함경도 쪽으로 가기로 정해져 있었지만
백사가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임금을 설득하여 방향을 돌리도록
했던 것이다.
그 설득으로 인하여 임금은 서북방인 평안도로 정했고,
그 대신 왕자들은 동북방인 함경도 로 가기로 하였다.
동북방을 고집하여 함경도로 갔던 일행은
중도에 왜군에게 포로가 되는 봉변을 당해야만
하였다.
선조가 동북방으로 갔더라면 역시 왜군의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임금이 포로가 되었더라면 이후의 전쟁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백사의 판단이 예리하게 적중하였음을 알려주는 일화다.
또 한 번의 갈림길이 의주에서 발생했다.
왜군이 계속 북상한다는 정보를 듣고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려고
하였다.
이때 백사는 임금이 못 건너도록 적극 만류했다.
임금이 그래도 나라 안에 머무른다는 사실이 바로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영호남 3도에 특사를 보내 임금이 요동(만주)으로 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싸운다’
는 칙명을 내리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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