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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3 - 러시아는 몽골군의 침략을 받아 복속되니“타타르의 멍에”라!
몽골 제국의 유럽 원정은 13세기 초반인 1220년대부터 1240년대까지 계속됐으니 몽골군은 동유럽에서 우랄
산맥을 넘어 볼가강 불가리아, 쿠마니아 (Cumania), 알라니야, 키예프 루스국을 정복한후 폴란드를
침공해 1241년 4월 9일 레그니차 전투와 1241년 4월 11일 모히 전투 그리고 헝가리 왕국과 전투에 승리합니다.
그 전에 징기스칸이 친정한 호라즘 (이란 지방) 원정에서 무함마드 2세를 뒤쫓던 몽골군은 카스피해
까지 진출해 루스지역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1221년 몽골군의 병력은 2개
투멧 (12,000 ~ 20,000명) 으로 대규모 병력이 아닌 정찰대였고 한번 찌르고는 그냥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1229년 바투의 원정대는 당시 기록으로는 십수만의 대군이었다는데... 하지만 오늘날에는 몽골인
3만에 현지에서 징발된 튀르크인등 병력을 합쳐 7~ 8만 정도리고 보지만 그래도 대군이었으니
루스는 몽골에 완전히 복속당해 200년간 몽골인의 지배를 받게되니 이른바 “타타르의 멍에” 라고 불립니다.
13세기 러시아는 슬라브인들이 세운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통일은 힘들었는데, 주력은 민병대
로 구성된 보병 (스메르디) 이었고...... 방패와 도끼, 창, 활,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루스
보병은 훈련을 받지못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갑주가 부실했기 때문에 화살 공세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대신 영주들은 드루지나 라고 부르는 용맹스러운 중장기병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도시에 성곽이 많지
않았고 도시 주변을 둘러싼 방책은 목책 수준이라 수성전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킵차크 지역에
살던 튀르크계 유목민들은 러시아 공국들을 약탈하거나 중앙아시아에서 용병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1220년에 수부타이 장군은 킵차크족을 공격하고 그들의 칸을 죽였으니 이때부터 킵차크인들은 몽골과
원수가 되었고 살아남은 킵차크인중 하나였던 코텐은 생존자들을 규합해 루스 지역으로 달아났습니다.
1221년 수부타이와 제베는 카스피해 남부 (아제르바이잔) 에서 조지아 왕국의 게오르그
4세의 군대와 격돌했는데..... 몽골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정면 충돌을 피해 경기병을 보낸 후에는 퇴각하는척 개활지로 끝어내어 포위섬멸합니다.
같은 해 벌어진 두번째 전투에서도 몽골군은 조지아군을 패퇴시켰고 코카서스 산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모두 제거했는데.... 손자병법에 전투는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전투를 해야 한다고 했으니 몽골군대는 이런 원칙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킵차크인 코텐은 루스 공국으로 넘어가 대공과 귀족들을 충동질했으니 대공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결국 1223년에 키예프를 중심으로 남부의 18개 공국이 연합군(3만 ~8만?)
을 결성해서 몽골군을 치기로 했으니..... 전투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칼가강에서 벌어졌습니다.
몽골군은 처음에는 칭기스 칸의 명령에 따라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군은 몽골군과
싸울 의도가 없다고 속인후 기습해 몽골군 후발대 천여명을 살상하는데
성공했으나, 이후 몽골의 본대와 맞붙자 루스 연합군은 몽골군의 위장 퇴각 전술에 휘말리고 맙니다.
몽골군은 계속 퇴각해 루스군을 본토에서 최대한 격리시킨뒤 강가에서 우회해 각개격파 작전
으로 먼저 킵차크족을 물리치니, 달아나는 킵차크인들이 후방의 루스군과
충돌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자 추격하던 몽골군은 그대로 돌격해 루스군 까지 전부 괴멸시킵니다.
키예프 대공은 후방의 진지에서 아군 패잔병들을 기다리다가 철수할 시간을 놓친 바람에
포위되자, 항복한 다음에 처형당했다고 전해지며..... 이 와중에도 드루지나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몰살당했고, 킴차크인 코텐은 살아 남아 헝가리로 도망칩니다.
칼가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야전병력이 사실상 궤멸되었고 이때 수부타이는 분열된 루스의
공국들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는데, 다만 본인과 제베가
거느린 군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 진격하지는 못하고 정보만을 가지고 몽골로 귀환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몽골에 대한 루스의 저항이 가장 강력했던게 바로 1223년 전투로, 이후에는 같은 류리크
가문으로 친척이기도 했던 여러 루스 공국들은 단 한번도 그들의 군사적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했으니 몽골군의 고려 침략시 고려군이 몽골군의 2~8차 침공때 단 한번도 싸우지 않은 것과 비슷합니다.
몽골군이 1차 침공한 1231년 10월 20일 안북성 전투에서 총사령관인 대장군 채송년은 야전에
능한 몽골군을 피해 성 안에서 수성을 주장했으나, 대집성등 일부 강경파들이 우겨서 3만
고려군이 성 밖으로 나왔으나..... 정작 고려군 대장들은 두려워 성안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대집성이 나오면서 보니 장군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는지라 황급히 성안으로 되돌아 갔고 지휘관이
없는 고려군은 우왕좌왕하다가 2만 몽골군에게 몰살당한후.... 고려군은 2~9차 몽골군 침공시
강화도에 숨어서 아예 내륙으로 나오지도 못했으니 야전 전투는 단 한번도 없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2차 침공 때 루스 제후들이 1차 때 보다 무능력하고 멍청하거나 이기적이라 그랬던 것은 아니니, 정보력
에서 우세했던 몽골군이 루스의 연계가 느슨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거점을
두들겨댄 탓에 공황 상태에 빠진 대공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는수 밖에 없었습니다.
몽골의 2대 오고타이칸의 명에 따른 바투의 원정은 1235년 (1236년?) 에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으니 바투의 원정군은 출발시에는 5만명 내외였으나, 볼가강의 볼가-불가르
왕국을 무너뜨리고 킵차크족들을 흡수한 후에는 15만명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습니다.
1237년 북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블라디미르 공국이 가장 먼저 격파당하고 로스토프,
유리에프, 야로슬라보가 차례로 함락되었으며 1238년에
노브고로드를 치기 위해 몽골군이 움직였을 때 루스 북부에는 온전한 도시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토르초크에서의 민병대의 선전에다가 봄이 되어 들판과 길이 진창으로 변했기 때문에 바투가 노브고로드
를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는데...... 몽골군은 후방에 위험을 놔둔 채로 퇴각해야
하는 위기에 빠졌으나, 루스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보고도 능력이 안되니 추격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1239년에는 오래된 도시이자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루스의 중심인 키예프를 함락시켰는데, 키예프는 단단한 성벽
에다가 할리츠키 휘하의 수비 병력도 잘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전멸해 도시는 초토화되었으며 산 자는 노예
가 되었는데, 키예프가 무너지자 남부 루스 전체가 무너졌고 공국들은 몽골에 상납금을 바치는 역할로 전락합니다.
러시아 남쪽인 아나톨리아 동부와 카프카스 남부 지방들이 차례대로 점령을 당하거나
아직까지 전쟁을 치르거나 조공을 바치는 와중에..... 엣날에 한번
패했던 조지아 왕국은 1238년 부터 1327년 까지 백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1250년대 이후 산악 지방인 조지아는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전에 돌입해 다비트 나린을 선봉하여
3년동안 긴 전쟁을 치렀고 이후 다비트 데메테르 2세와 다비트 8세에서까지 전쟁은 오래토록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게오르기 5세 대왕 시대에 들어서서 결국에 몽골을 완전히 캅카스지방 밖으로 몰아냈고
1200년대 초반 전성기 시절의 조지아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게 되지만
14세기 말엔 티무르 제국의 침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그후 16세기에야 겨우 회복합니다.
비슷한 시기 잉구시나 체첸 지방을 여러차례 공격했고 오늘날의 러시아도 힘들어하는 이들 전투민족들은
2~3차례의 전면전 공격에도 특유의 게릴라 공격으로 버텨내고 더 이상 침략 시도는 무의미
하다고 판단한 몽골 제국은 포기했으니 체첸은 두번의 침공을 이겨냈으나 긴 후유증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킵차크족의 칸 코텐은 킵차크족 생존자들을 규합해 러시아를 떠나 헝가리의 벨라 4세에게 몸을 의탁하고
가톨릭 으로 개종했지만, 몽골은 수만명이나 되는 투르크족들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으며
더불어 헝가리 평원에 너무나도 광대한 목초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투는 계속 서쪽으로 진군합니다.
흔히 유럽인들이 몽골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십자군 전쟁의 사례를 보듯 당시 유럽의
기사들은 강력한 충격력을 갖춘 막강한 돌파력을 자랑했으며 아랍인들의 기록에 기사단의 돌격은 마치
쏘아진 화살과 같아, 이들이 돌격을 시작한 이상 막아내기 힘들어 단번에 전황을 뒤집을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들의 충실한 철갑류 갑옷은 화살에 대해 뛰어난 방호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몽골군과 비슷한
유목민적 전투법을 쓰는 이슬람군도 전투를 결정짓는 단계인 육박전인
혼전에서는 감히 함부로 대적하지 못했으니 이는 보두앵 4세의 활약상과 용맹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1차 헝가리 침공 당시 몽골군은 대부분 전투에서 우세를 점했는데, 이는 몽골군이 중세 후기 유럽 수준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의 중장기병을 보유해 경기병과 보병 위주던 동유럽군에 우위를 점할수 있었고,
조직력과 전술 노하우가 필요한 대규모 회전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동유럽 장교단의 능력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동유럽의 주력인 중무장 기사들에 대해 몽골군이 상대한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었으니 하나는
노포, 투석기, 불화살 등 단순한 화살 이상으로 강력한 투사 무기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경무장과 몽고마로 인한 기동력과 지구력을 활용해 추격하는 기사들이 지칠 때까지 후퇴하면서
유인하다가 마침내 유럽 기사와 말이 탈진하면 역으로 중장기병과 함께 반격을 가한 것이니, 역사적으로
매우 흔하고 단순한 전술인 "위장 퇴각, 포위 섬멸" 의 초원 전술을 적절히 활용해 적의 약점을 찌른 것입니다.
바투는 군대를 넷으로 나누었으니 목표는 헝가리였는데.... 바이다르는 북쪽으로, 구유크는 남쪽을 경유하도록
했고, 카단은 폴란드와 독일로부터 건너올 원군을 막는 역할을 맡았으니, 당시 폴란드는 분할
공국 시대로 나라 전체가 내전으로 사분오열되어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국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카단의 병력이 폴란드를 황폐화시키면서 크라쿠프로 향하자 볼레슬레프 4세는 가족과 패물을 챙겨 모라비아
로 달아났고 시장인 블라디미르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근위대와 함께 몽골군에
맞섰으니..... 타타르인들을 막으며 귀중한 시간을 벌어준 덕에 많은 시민들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무모할 정도로 끝까지 몽골군에 맞서던 블라디미르 시장과 근위대는 모두 몽골군에게
패해 전사했으며, 이후 몽골군은 진격 과정에서 도시 내외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닥치는 대로 학살과 약탈을 행하며 피난민을 발생시키고 공황상태를 야기합니다.
크라쿠프를 함락시킨 카단은 브로츠와프를 우회해 실롱스크로 향했고, 1241년 처음으로 군대다운 군대를 만났으니
실롱스크의 헨리크 2세 포보즈니는 몽골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영지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각지에 원군을 요청했으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했고 보헤미아 왕으로부터 원군을 약속받았습니다.
하지만 애타게 기다리는 보헤미아군 보다 카단의 몽골군이 먼저 도착했고 헨리크는 보헤미아군의 도움 없이
싸워야 했으니 4월 9일 양군은 레그니차 평원에서 격돌했고, 몽골군은 "또!" 위장퇴각에 이은 역포위
전술로 폴란드군을 전멸시켰으니... 이 때 헨리크 2세를 비롯한 기사들 모두가 전사하니 레그니차 전투입니다.
몽골군은 교토의 이총에 12만개의 조선인 귀와 코를 묻은 정유재란 처럼 전사한 폴란드 군의
시체에서 전리품으로 귀를 모두 잘랐으며, 특히 헨리크는 목이 잘려
창끝에 꿰였는데... 그러나 레그니차 전투에 참여한 몽골군 또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튜튼기사단의 병력이 참여했다는 설이 있지만, 튜튼기사단의 참전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며 다만 헨리크는 그야말로 모을수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달달 긁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
기사단이 소수 참여했을 가능성은 존재하며 심지어 광산의 광부들을 무장시켜 전장에 내보낼 정도였습니다.
광부들은 포로로 잡혀 바투의 사유지에서 부역에 시달리게 되는데, 레그니차 전투는 끝났지만 보헤미아 원군은
건재했고, 몽골군은 보헤미아 군대의 참전을 막기 위해 폴란드 남부와 중부를 약탈하다가 헝가리의
본대와 합류했으며, 폴란드 내에서는 몽골의 폴란드 침공을 대홍수와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덕분에 북부에서 성장하던 튜튼기사단에 대한 견제를 할수가 없었으며 이미 나라가 분열되어 있던 폴란드는 몽골의
침공으로 치명타를 맞았고,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들의 견제까지 겹치면서 이후 폴란드는 1320년
브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테크가 집권해 폴란드를 통합할 때까지 완전히 사분오열된 상태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훗날 발슈타트 전투로 명명된 레그니차 전투는 군사학에서도 의의를 가지는데, 기동력과 조직력의 우위를
살려 화력과 개인 단위의 전투능력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인 유럽 기사군단을 제압했기 때문 입니다.
결정적으로 몽골군이 승리한 주 원인은 '유럽 장교단들의 능력 부족' 이니, 또한 카이두는
폴란드군을 포위한후 화약무기를 쏟아부었는데, 이 무기는 연기와 악취를
일으켜 시야를 제한해 일부 폴란드군이 적의 계략을 염려해 퇴각하게 만드는 효과도 보입니다.
이 일은 몽골인들에 대한 소문과 겹쳐져 "몽골인들은 말뿐만 아니라 용까지 길들이고 있는 악마들이다" 라는
소문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헨리크가 전사한 장소에는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19세기 폴란드를 분할한
프로이센 왕국은 이 수도원을 군사학교로 만들었고 600년전 그곳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숱하게 강의했습니다.
폴란드 침공과 동시에 몽골 제국군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보헤미아 왕국을
침공했으니..... 보헤미아의 왕이였던 바츨라프 1세는 이웃한
마이센 변경백국과 튀링겐 방백국을 통치하는 베틴 가문의 영토에서 용병을 모집해 대응합니다.
몽골 제국군은 우선 오토무호프를 공략했으나 실패했고 소규모의 분대가 글라츠를 침공
하였으나 역시 실패했으며..... 올로모우츠를 공격했지만 결국 지휘관까지
포로로 잡히며 실패했으니 이는 유럽군이 몽골군을 상대로 이긴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바투의 본대는 헝가리-크로아티아로 순조롭게 진군하여 1241년 벨러 4세의 군대와 교전했는데
몽골군은 페스트 근처를 약탈하며 헝가리군을 자극했고, 프리드리히 공작이
이를 격퇴했으며..... 이후 벨러 4세는 몽골군 전위대를 격파하며 사요강까지 군을 전진시킵니다.
4월에 헝가리군은 사요강까지 진출했는데 헝가리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강 건너편에는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 본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벨러 4세는 어찌되었든 근처에 몽골군이 있다고 가정하고 보급품
수레를 사슬로 연결해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했고 몽골군 척후병들이 도강을 유도하는데에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4월 11일, 헝가리군은 별동대를 보내 야간에 7km 를 전진해 몽골군 진지를 기습하려
시도했는데 바로 그날 새벽에, 몽골군 또한 헝가리군 진지에 야간 기습을
하기 위해 강을 건넜고, 양군은 사요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바로 직전에서 맞부딪칩니다.
활을 겨냥할수 없는 야간인데다가 먼저 강을 건너 배수진 상황에 처한 몽골군은 그 특유의 기동력을 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중무장한 헝가리군과 맞서 싸우니 결국 다리를 내주고 철수했으며,
헝가리군은 다리를 점거하는데 양군은 각 7~8만이라고 기록됐지만 오늘날에는 3만 정도로 여겨집니다.
이 소식을 접한 몽골군은 계획을 바꾸어 수부타이가 별동대를 이끌고 후방으로 돌아들어가서 강을 건너
헝가리군 본영을 공격하고, 그 사이 바투는 남은 부대로 다리의 헝가리군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포위망을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바투가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한 탓에 헝가리군과 정면대결을 하게됩니다.
이때 까지도 헝가리군은 몽골의 본대가 온 걸 모르고 있었으니.... 전투에 참가했던 칼만 왕자는
그 사실을 깨닫고 벨러 4세에게 군을 움직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바투는 그 사이 방해도 받지않고 무사히 도강을 마칠수 있었습니다.
군을 둘로 나눈 탓에 바투군은 수적으로도 열세였으니 헝가리군의 석궁에 대응해 7대의 투석기(노포)를 동원했으나,
전 병력을 동원한 벨러 4세의 맹공에 바토르 30명과 바카투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수부타이
별동대가 도착해서 후방을 찔렀고, 몽골군이 불화살로 응전하자 헝가리군은 포장마차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합니다.
피해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바투는 추격섬멸을 포기할 생각도 했으나 수부타이의 권유에 따라 헝가리군
포장 마차를 공성무기 까지 동원해 파괴하고는 포위망을 느슨하게 하여 헝가리군의 도주를 유도합니다.
기동력 격차를 감안하지 못하고 도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헝가리군을 끝까지 추격해 궤멸시켰으니 헝가리군
은 우골린 대주교가 전사하고 칼만 왕자가 부상으로 사망했으며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납니다.
그후 몽골군은 헝가리와 동군연합 관계였던 크로아티아 왕국을 다음 상대로 삼았고, 주요도시였지만
무장은 빈약했던 자그레브 지역을 파괴하고 약탈했으며, 1년 뒤인 1242년,
몽골군 카단이 크로아티아로 피신한 벨러 4세를 잡기 위해 다시 처들어와 클리스 요새를 포위했합니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무장하고 튼튼하게 손을 보았기 때문에 쉽게 함락이 되지 않자 이후 귀족들이 벨러
4세의 탈출을 도우면서 몽골 군대는 결국 클리스 요새 함락을 포기하고 트로기르 방면과 스플리트
방면으로 나뉘어 약탈과 학살을 벌였으나 분노한 시민들과 크로아티아군이 결사항전하자 결국 물러갑니다.
불가리아도 공격했으니 정복하지 못하고 조공을 받아내는데 만족했으며 이후 35년이 지난 1277년 무거운
조공에 시달리던 불가리아에서는 돼지치기 출신의 이바일로가 "신의 계시로 몽고 놈들을
격퇴시키겠다" 라며..... 의용군을 조직하여 정말 몽골군을 도나우강 이북으로 쫓아내고 안정에 들어갑니다.
헝가리를 박살낸 몽골군은 또 다른 신성로마 제국의 오스트리아 공국과 이탈리아 반도 북부를 정찰하며
움직이려 했는데 그러나 1242년 돌연 헝가리에서 철수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했으니.... 본국의 오고타이 칸의 사망 이후 벌어진 후계자 계승 문제 쿠릴타이 때문으로 봅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몽골군은 어느날 갑자기 동쪽에서 나타난 미지의 존재니 13세기 초엽에는 프레스터 존
설화와 엮여 '동방의 기독교 국가' 에 대한 환상이 있었으나 바투의 원정으로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유럽인들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추론해내려고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그들이 동방박사들의 후예라는 설이 퍼졌으니 1164년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기사들이 '동방박사의 유골' 로 추정되는 인골을 가져온 일이 있었는데, 지금 동방에서
온 무리들은 그들의 후손이며 탈취당한 선조들의 유골을 되찾으러 온 것이라는 얘기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마땅히 동방박사들의 유골을 돌려줘야 하며 그렇게 하면 그들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것, 또한 몽골인들이 유대인의 후손이며
유대력 5천년을 맞아 다윗의 재림을 앞두고 유럽인들을 학살하러 왔다는 풍문도 있었습니다.
가장 자주 접할수 있던 이야기는 "이들은 인간이 아닌 악마이며, 인육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악한 존재" 라는 식의 소문이었으며 편집증적인 기록에는 악마들이
벌이는 광란의 살육과...... 그들의 소상한 취미에 대한 서술까지 곁들여져 있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설정을 짜서.... 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타르타로스 지옥의 문을 열고 무저갱에서 세상을
멸망 시키기 위해서 나타났으며 말세가 임박하였다는 종말론으로 까지 번지는데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재생산된 측면도 있으니...... 유대인에 대한 낭설은 몽골인들을 막아내는
데는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민심을 선동하여 유대인 세력을 억제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몽골군이 헝가리를 침입한지 44년 후인 1285년에 벌어진 제2차 헝가리 침공에서 헝가리는 중무장한
기사들의 비율을 늘리는 군제 개혁을 한 상태였고, 헝가리군을 상대로 실전이 부족한 새로운
장수진으로 세대 교체되고 군제에 변동이 없던 3만명의 몽골군은 거의 전멸을 당하는 대패를 겪고 철수합니다.
한편, 몽골군이 발칸반도 남부를 훑고 지나가며 된서리를 맞은 국가는 4차 십자군이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세운 라틴 제국으로.... 니케아 제국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불가리아 제국과의 분쟁으로
어려움에 빠진터라,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는 프랑스와 로마를 돌며 지원군을 박박 긁어모으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하필 이때 몽골군에게 쫓긴 쿠만족들이 라틴제국 영내로 밀려들어왔고, 보두앵 2세는 이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몽골군은 쿠만족을 보호했다는 구실로 라틴제국의 트라키아를 침공하니 서전에서는
라틴제국 군대가 분전했지만 몽골군 본대와 맞붙은 두번째 전투에서는 대패해 보두앵 2세는 포로로 잡힙니다.
당시 기록에는 보두앵 2세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대패했던듯 하며, 보두앵 2세는 석방을
댓가로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니 이후 라틴 제국은 발칸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고, 1259년 니케아를 향한 마지막 공격도 실패하며 결국 1261년 니케아 제국에 멸망당합니다.
이후 1264년에 몽골군은 니케아 제국이 재건한 동로마 제국도 공격했지만, 어째선지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약탈하려거나 점령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동맹을 맺는데 성공하자...... 쿨하게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정복한 동유럽의 많은 영토는 킵차크 칸국에 합병했고, 유럽은 서로 연합하여 몽골에 맞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유럽 왕국들은 서로 간의 갈등을 멈추고 몽골군에 대항했고, 결국 몽골군은 철수
했으며 이후 유럽 왕국간의 갈등은 다시 불거졌고 몽골의 유럽 습격과 원정은 13세기 후반까지 계속됩니다.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는 쿠릴타이에 가지 않고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칸국을 세웠으니
거의 대부분의 루스는 킵차크의 칸에게 무릎을 꿇고 몽골의 지배를 받는데.... 루스인들은
킵차크 한국을 '졸로타야 오르다 (金帳汗國 금장한국)' 라 부르고 몽골족의 루스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 라 합니다.
'타타르의 멍에' 는 루스의 서부 지방에서는 1세기, 북부와 중부 지방에서는 2세기, 남부와 동부 지방
에서는 3세기 이상 이어졌으며...... 대량학살로 인한 인명의 손실, 약탈과 파괴로 인한 재산 손실,
노예로 팔려간 포로들은 엄청난 규모였으며 조세의 수취로 땅은 척박해지고 사람들은
절대 극빈에 시달렸는데 키예프 루스의 찬란한 문화는 뿌리를 뽑히고 문화의 암흑시대로 접어듭니다.
기존 루스의 중심지였던 서남부 키예프공국은 붕괴되고 북동부 모스크바에 새로이 형성된 루스
공국인 모스크바 공국이 분열되어 있던 전체 루스 공국들을 통일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이 새 루스의 중심지로 성장해 루스의 명맥을 이어받게 되니 러시아로 발전합니다.
킵차크 한국은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해 행정 · 징세 · 징병 업무를 집행했으니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인구조사도 세차례(1275년 세 번째 인구조사에서 루스 인구는 1,000만명) 나 했고 인두세 형태로 거두었으니
사정관의 징세는 철저했고, 저항하는 주민들은 참혹하게 진압했으며 루스인 청년들은 몽골을 위해 병역에 끌려 갑니다.
그러나 루스인의 반발을 고려해 13세기 말에는 루스의 공국들에게 권한을 위탁하고 세금을 받는 간접지배
방법으로 전환하니 허가장인 야를리크를 내주었으며.... 가장 믿음직한 대공에게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주어 루스의 공후 위에 서게 했으니 루스의 공들은 앞다투어 사라이를 드나듭니다.
킵차크의 칸은 루스 공후들의 대립과 반목을 교묘히 이용해 지배를 강화했는데, 이후 최종적으로 잘 보인
류리크 왕조의 3대인 이반 1세의 모스크바 대공국이 1328년에 야를리크와
'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이 대공)' 칭호를 독점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스의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1238~ 40년의 타타르- 몽골 제국의 침공 때에 러시아 북부에 있던 블라디미르공국등 거모든
국가들이 몽골에 짓밟혔는데 그후 얼었던 강이 녹아 진창인 지역이 많이 생기는
바람에 기병 중심이던 몽골군이 노보고르드를 공격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노브고로드 공국은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할수 밖에 없었고 러시아 남부공국들이 멸망한 것과 달리 독립은
유지하지만 독일과 스웨덴의 침입을 지속적으로 받았는데, 노브고로드 공(公) 인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1240년 네바강에서 스웨덴인을 저지하고 1242년에 페이푸스호에서 튜튼 기사단을 물리치면서 국력을 키웁니다.
첫댓글 예전에 여행같던곳을 다시 꺼내어보시니 감회가 아주 다르실것같습니다.
저는 늘 세계의 이곳저곳을 마음데로 다니시는 선생님이 부러울뿐입니다.
하아...... 뭐!
여행 추억은 늘 아름답지요!
네 여행보따리는 언제 꺼내셔도 항상 즐거운것이지요.